은주님은 옆에서 내가 보기만 해도, 혹은 듣기만 해도 엄청난 일을 하고 계신 분이셨다. 회사에서는 부장의 타이틀을 달고, 직원이 모자라면 본인이 3명 분의 일을 기꺼이 맡아서 하셨다. 당연히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에도 회사에 나가서 일하셨다. 내가 분개했던 지점은 그 모든 것을 추가의 보상 없이 그냥 누군가는 해야 한다 생각하기에 아무런! 보상 없이 묵묵히 하고 계셨다는 거였다. 평생을 그렇게 일을 해 오셨기에 그걸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계셨다. 그런데 몸 상태는 아무렇지 않은 것과는 멀어도 너무 멀었다. 허리 디스크는 너무 심해서 수업에 오실 때면 서 계시지만 기어 오는 듯했고, 이명이 심했으며, 가끔은 물속에서 잠수하고 있는 느낌이라고도 하셨다.
카페에서는 주위의 소리를 걸러내지 못해 모든 테이블의 대화가 동시에 다 들려서 너무 힘들다고 하셨다. 그리고 글을 읽을 때 한 단어가 다음 문장에 걸쳐 하이펀으로 연결이 되는 걸 견딜 수 없어하셨다. 그리고 가끔은 문장이 위아래로 휘어 보여서 자를 대고 읽어야 하기도 한다고 하셨다. 내가 주위에서 봤던 몇몇 신경다양성의 개인들과 닮은 부분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그녀도 신경다양성으로 인한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을 좀 줄이고, 많은 것에 대한 책임을 내려놓고, 운동을 하고, 건강한 식단에 좀 더 신경 쓰면 상황이 많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혼자만 해봤다. 하지만 곧 그게 그렇게 쉽게 되면 이 세상의 거의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이란 생각도 했다. 나는 그녀를 참 좋아했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던 차에 찾았다. 한 가지 방법을.
난독증에는 참 여러 유형이 있는데 그중 한 유형은 글자가 흩어져 보이거나 겹쳐 보이거나, 문장이 휘어져 보이거나, 흐려 보이거나, 글이 사라지거나, 형광등 아래서 읽기가 힘들거나, 눈부심이 있어 읽기가 힘든 경우들이 있다. 이 경우는 음소 인식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빛에 눈이 너무 예민해서 그렇다고 한다. 일반인의 12~14%, 학습 장애의 46%, ADHD나 자폐의 33%, 그리고 두뇌 손상의 55%가 이런 증상들을 겪는다고 하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경우는 간단히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는 듯하다.
난독증상이 있는 경우 중 어떤 때는 지능이 낮아서 오기도 하는데 이때는 여러 가지 다른 어려움과 함께 동반되는 난독증상이고 (이 경우는 '난독증'으로 진단되는 것이 아니라 난독의 증상이 수반된다고 한다), 다른 경우는 지능은 정상이거나 높은데 읽기가 어려운 경우에 음소 인식이 잘 안 되거나 (이 경우를 '난독증'이라고 진단 내린다), 글 자체가 휘거나 흩어지거나 사라지는 등 은주님과 비슷한 경우도 있는데 이를 난독증이라고 진단 내리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얼렌증후군'이라고 한다.
얼렌증후군은 colored overlay (컬러 오버레이)라는 제품을 사용하거나, 컴퓨터나 종이의 색깔을 바꾸거나, 아니면 안경에 아예 색깔을 넣거나 하는 방법으로 즉각 호전이 되는 것 같았다. 은주님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말씀해 주신 바와 내가 공부한 바가 비슷하니 일단 컬러 오버레이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우선 한국 사이트에서 해외배송으로 구할 수 있었던 제품을 만원이 조금 넘는 가격에 한 세트 구입해 보았다. 내가 그 제품을 흰 종이에 대고 글을 읽었을 때는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초록색이 다른 색보다 조금 더 깔끔하게 보이긴 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별 말없이 초록색 오버레이를 은주님의 프린트물 위에 올려드렸다. 그런데 은주님이 너무 깜짝 놀라시는 게 아닌가??!! 글이 갑자기 너무 선명하게 보인다고 하시면서. 아... 얼렌증후군이 맞았던가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색깔들도 다 종이에 대어보시라고 했다. 그런데 그 초록색이 가장 선명하게 잘 보인다고 하셔서 그걸 드렸다. 그리고 은주님은 그 후로도 늘 초록색 오버레이를 들고 다니면서 책을 읽으신다. 그러니 효과가 있긴 있는 것 같다.
얼렌증후군 전문 사이트에 가면 좀 더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오버레이를 더 높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지만 그곳의 제품이 더 좋은지, 다른 다양한 색깔들이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마다 편한 색깔이 다 다를 수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아마존에는 위와 같은 한 페이지를 다 덮을 수 있는 큰 사이즈의 오버레이도 팔고 있었다. 사이즈가 작으면 계속 움직이면서 읽어야 하는 불편함은 있을 테니 크기가 좀 더 크면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서양에서는 안경 렌즈에다 자신이 읽기에 가장 편한 색깔을 아예 집어넣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유튜브에 가니 이런 안경을 쓰고 큰 변화를 겪는 영상이 있다.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9Djb4uaas9E
난독증은 영어로 dyslexia라고 한다. 한국에는 난독증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당연히 그와 관련된 제품이나 정보도 많지 않다. 그러니 더 다양한 제품이나 훈련, 교재 등을 알아보려면 dyslexia라고 검색하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는 두뇌치료와 관련된 단체들이 엄청 크거나 유명한 듯하다. 하지만 그런 곳에 큰돈 들여서 후회하지 않으면 좋겠다. 큰 효과는 없을 터이니 말이다. 효과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난독은 결국에는 난독인의 두뇌에 맞는 방법을 찾아서 스스로 훈련하는 방법 밖에 없는 것 같다. 슬프게도 난독 치료법 같은 건 없다고 하니까. 뭐 난독이 따지고 보면 문제도 아닌데 '치료법'이라고 하는 것도 웃기긴 하다. 하지만 문자 사회에서 덜 힘들려면 최대한 어린 시절에 읽기 훈련을 잘 받으면 읽기는 조금 더 수월해질 것이다. 물론, 읽기가 수월해진다고 해서 다른 난독증의 특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난독증이 치료된다는 말은 사실은 올바르지 않다. 난독증은 문자학습만 아니면 너무나 많은 강점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걸 간과하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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