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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아코알라 Dec 20. 2023

내 삶의 첫 (영어) 난독증

"자, 이제 이 글을 한 번 외워와 볼까?"

그리고 며칠 후 아이들은 그 글을 외워왔다.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잠시 잠시 본문을 살짝씩 컨닝해 가며 외웠다. 그런데 유독 지민이만 본문을 전혀 보지 않았다. 완벽하게 외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민이는 생각이 나지 않을 땐 눈을 사선으로 들어 공중을 보며 빠르게 기억을 해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본문을 쏟아내곤 했다. 결코 끝까지 본문은 보지 않으면서. 


지민이는 초등 5학년이었고 내가 그 아이를 만난 건 8년 전이었다. 그때 나는 다른 곳에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나의 이력을 들은 학부모 몇 분이 자신들에게 영어를 좀 가르쳐달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성인들에게 다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평생 호주와 한국, 두 나라에서 했던 게 어른들에게 영어 가르치는 것이었으니. 그런데 다시 얼마 후 그 엄마들의 자녀 한 명에 다른 아이들 몇이 더해져 내게로 왔다. 엄마들만 배우기 너무 아까우니 아이들도 같이 좀 해 달라는. 그중에 지민이가 있었다. 나는 지민이의 엄마를 알지는 못했지만 얼떨결에 그 아이를 잠시 가르치게 되었다. 


그런데 지민이를 가르치다 보니 그 아이는 뭔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참 똑똑한데 책의 본문을 '보고' 외우거나 문장 외우기를 숙제로 내면 정말 싫어했다. 그냥 듣고 알아맞히거나 듣고 외우기를 하면 안 되냐고 했다. 물론, 그래도 되지만 모든 문장들이 오디오 파일이 있지는 않았으므로 그러기가 힘들었다. 알파벳도 다 알고 있었지만 가끔 순서를 헷갈려했다. 물론 처음에는 모든 이가 다 그렇게 헷갈려하지만 익숙하게 된 후에도 그러지는 않는다. 또 숫자 6과 9를 헷갈려했고, 글자 b와 d, p와 q를 자주 헷갈려했다. 


본문 외우기 숙제를 해 온 다음 날은 가끔 입술이 다 터져있거나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가 피가 날 정도록 긁혀 있었다. 엄청난 피로와 스트레스가 느껴졌다. 지민이는 집에서 엄마와 엄청나게 공부를 따로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너, 바보야?! 왜 못 읽어?!!! 외워!! 외우고 또 외워! 될 때까지 해!"와 같은 말을 어릴 때부터 늘 들으며 될 때까지 하고 또 했던 지민이. 남들이 혹시라도 자신이 바보라고 할까 봐 몇 배로 노력하고 또 했던 아이. 아이는 정말 똑똑해서 거의 모든 것을 소리를 내어 다 외워버렸다. 그래도 아주 기본적인 것에서 자꾸 특이한 점들이 내게 보였고, 오지랖의 나는 그걸 그 아이의 부모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지민이 어머님, 제가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지민이에게 약간의 난독 증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뭐라고요?!!!"

"네.. 항상 텍스트를 읽기를 힘들어하고, 비슷한 글자나 숫자들을 헷갈려합니다...."

"난독이라니요?!!! 애 담임도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당신이 뭔데! 애가 난독이라는 겁니까?"

"... 아,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고요, 물론 저도 전문가가 아니긴 하지만 담임 선생님도 난독에 대해 잘 모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호주에서는 난독증이 흔해서 저는 조금 더 익숙할 뿐입니다."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

그렇게 그녀는 한참을 화를 내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며칠 뒤,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현관 앞에서 문전 박대를 당했지만 나는 계속 문 앞을 지키고 서서 말했다. "어머님, 화가 조금 누그러지셨으면 이제 지민이에 대해 좀 더 얘기를 했으면 합니다. 지민이는 공부 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아니면 중고등 학교에 올라가서 학업을 못 따라갈지도 모릅니다...." (x 5)

"나는 이제 당신을 보고 싶지도 않고 다시 연락을 받고 싶지도 않으니 제발 좀 가세요!!!" (x5) (이런 비슷한 대화가 한참 오갔다) 그리고, 나는 그 집 앞에서 한참을 서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그녀는 결국 나오지도 않았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동네에서 마주쳤을 땐 아주 경멸하는 눈초리로 나를 보며 지나갔다. 


그게 8년 전이었는데 어제는 그 아이에 대한 얘기를 우연히 전해 들었다. 그 아이는 제주도로 이사 가서 살다가 중학교 때는 결국 난독치료를 (거의) 아무도 모르게 받았고, 지금은 읽기가 많지 않은 과목 위주로 공부를 잘하고 있다고 했다. (*난독은 치료가 되는 것이 아니니 실은 읽기 트레이닝이라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내가 만약 8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 

"어머님, 지민이는 정말 남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더 예술에 재능이 뛰어납니다. 그리고 시각적 문자 학습보다는 청각적 학습에 최적화되어 있는 두뇌를 가졌어요. 아무나 이런 두뇌를 가지고 태어날 수는 없는데 이 아이는 정말 평범한 아이가 아니네요. 이 아이의 재능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공부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인슈타인이나 피카소가 평범한 사람들처럼 교육을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도 지민이의 두뇌를 조금만 나눠가질 수 있으면 참 좋겠네요..." 하고 얘기했더라면 그녀가 똑같이 반응했을까 싶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명의 난독인을 보았다. 그런데 그들 중 거의 아무도 자신이 난독증이 있다는 걸 몰랐다. 그리고 '난독증'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아주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난독증'이란 말은 한국 사회에서 엄청나게! 부정적인 어감을 지니고 있다. '난독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할 수도, 아니면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순수한 '난독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우리 중 최소! 10명 중 한 명은 난독인데 정말! 아무도 모른다. (아주 스펙트럼을 넓히면 5명 중 한 명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공부했다. 영어 난독증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당신이 뭔데?"라는 말을 듣지 않고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난독증 #영어공부 #신경다양성 #고학년 파닉스 #dyslex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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