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리아코알라 Dec 20. 2023

*그녀가 영어를 읽을 수 없었던 진짜 이유

8개월쯤 전에 40대의 그녀를 만났다.

나는 영어를 가르칠 때 가장 먼저 토대를 잡는 과정을 6개월 정도 반드시! 거치게 한다. 대부분 영어를 좀 했다는 사람들도 발음이나 문법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는데 그녀는 완전 왕왕기초였다.


첫날 그녀에게 그녀가 영어공부를 하고자 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여행을 다니다 보니 주위에 생각보다 영어 잘하는 사람이 많아서 자신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학교 다닐 때도 그랬지만 공부에 영 취미가 없어서 수업시간에 졸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게 과장법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실제로! 수업시간에 졸았다.


여러 달이 지나는 동안 본 그녀는 정말 성격이 둥글둥글하며 사업 수완도 좋은 것 같았고 인간관계도 참 잘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학생분들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발음도 좋아지고, 문장도 조금씩 만들어내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영작해서 제출도 하고 질문도 아주 많았다. 그런데 그녀는 여전히 읽는 것 마저도 아주 힘들게 해내고 있었다. 정말 아주 쉬운 단어 하나하나도 너무 힘겹게 읽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는 모두 외워오는 문장들을 그녀는 보고 읽기만 했지만 그마저도 아주 힘들어했다.


당연히 글을 잘 읽지도 못하는 수업이 재밌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종종 수업에 늦었고, 가끔 졸았지만 결석은 하지 않았다. 수업 중에 무슨 말을 하는지 설명을 잘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 나는 수업 내용이 어려워서 그런 줄 알고 그녀를 따로 몇 번이나 불러서 도왔다. 열심히 문장이 만들어지는 과정, 문장을 강조할 때, 부정으로 만들 때, 의문문을 만들 때, 언제 be동사와 일반동사를 구별해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 설명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제야 좀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은 계속 흘렀고 그녀의 읽기는 이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아직도 다른 사람들의 속도에는 근접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여전히 숙제는 외워오지 않았다. 아니 외우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는 가끔 "공부를 해야 하는데 자꾸 잘 안 되네요. 죄송해요.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데 제가 공부를 많이 못해와서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할게요. ㅎㅎ "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더 신경 써서 수업 내용만 열심히 가르쳤다.


그렇게 똑같은 나날이 여러 달 동안 반복되던 어느 날 문득! 그녀가 어쩌면 난독이어서 음소 인식이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정말 난독이라면 그 말을 어떻게 끄집어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이미 한 번 데인 적이 있었으니까)


어떻게 기분 나쁘지 않게 도와줄지를 고민했다. 한국에서의 난독증은 마치 부진아와 비슷한 아주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해서 나는 '난독증'이란 말은 이제 쓰지 않기로 했던 터였다. 그래서 나는 "좌뇌보다는 우뇌로 정보를 처리하는 창의적이고, 이미지나 패턴형 사고에 최적화된 유형이신 것 같아요. 이미지나 패턴형 사고에 우세한 뇌는 종종 글을 읽을 때 각각의 음소를 분리해서 인식하지 않고 통으로 그림처럼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후두엽을 좀 더 활성화시켜서 글을 음소로 인식하는 걸 좀 훈련하시면 훨씬 더 효율적으로 빨리 글을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소인식 훈련을 같이 좀 해 보실래요?"라고 했다. 보통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은 뭔 말인지 잘 모르고 순순히 뭐가 됐든 그러자고 한다. 그녀도 그랬다.


즉,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cat을 'ㅋ ㅐ ㅌ', 이 세 가지의 다른 소리가 합쳐져 '캩'(캣)이 된다는 걸 안다. 그럼 c자리에 p를 넣으면 무슨 소리가 나겠냐고 하면, 'ㅍ ㅐ ㅌ'(퍁/팻)라고 답한다. 처음엔 잘 안되어도 p가 무슨 소리가 나는지만 알고 나면 쉽게 대입을 한다.


다른 예로, like를 '라이ㅋ'라고 한다, 그럼 다른 소리들은 그대로 두고 'l'만 'h'로 바꾸면 무슨 소리가 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h'가 한국어의 'ㅎ'와 같은 소리가 난다라고 말하면 그걸 '하이ㅋ'로 답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뭐가 어려워?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독증이 있는 사람들은 음소('ㅍ, ㅋ, 애, 아'와 같은 자음, 모음의 개별 혹은 그 조합의 소리들) 인식을 정말로! 힘들어한다.


첫날, 나는 그녀에게 각 글자의 소리를 또다시 천천히 가르쳐주고, cut에서는 u가 '어'에 가까운 소리가 나지만 cute처럼 끝에 e가 붙으면 u의 소리가 '유'처럼 바뀌어서 '큐ㅌ'가 된다. pin에서는 i가 '이'소리에 가깝게 나서 'ㅍ ㅣ ㄴ', 즉 '핀'이 되지만 pin에 e가 붙으면 'i'의 소리가 '아이'로 바뀌어서 'ㅍ 아이 ㄴ', 즉 '파인'이 된다는 법칙 등을 설명해 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비슷한 유형의 단어를 많이 접하면서 자동적으로 깨치게 되는 법칙들을 일일이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런 식으로 a, e, i, o, u 모음의 소리변화를 공부했다.


잘 읽는 단어들도 많았지만 어려워하는 단어는 유독 다시 반복이 되면 똑같이 힘들어했다. 신기하게 hike만 나오면 틀렸다. bike도 읽고, like도 읽고, Mike도 읽는데 hike만 힘들어하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첫날은 이처럼 그녀가 익숙하지 않은 음소의 조합을 찾아내고 읽는 연습을 했다.


첫날 수업을 마치면서 그녀는 '눈알이 빠질 것 같다'라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폰트 사이즈가 14 이상 되는 쉬운 단어들을 몇 십 개 읽었다고 눈알이 빠질 것처럼 힘들어하지 않는다. 그녀는 훈련을 하면 조금씩 더 쉽게 읽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읽고 나면 머리에 남는 게 없이 바로 사라져 버린다고 했다. 이것도 난독증의 흔한 증상 중 하나다. 두뇌가 온통 글자를 인식하는데 에너지를 다 소진해 버렸으니 그 단어를 잡고 있을 힘은 남아있지 않은 거다. 당연히 단어를 읽는 순간 다 휘발되어 날아가 버리고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게 어쩌면 당연한 거다.


둘째 날이 되어 나는 비슷한 훈련을 다시 했다. 그녀는 이제 어떤 훈련을 할지 이미 기대하고 있었으니 좀 더 마음이 편안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 번 막힌 글자는 계속 읽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훈련이 끝나지 않았지만 나는 이제는 어떤 식으로 음소를 나눠 읽어야 하는지 조금은 훈련이 되었으니 쉬운 문장들을 같이 읽어보기로 했다. 가끔 영어의 특성상 법칙 없이 그냥 묵음을 낸다거나 소리를 추측하기 어려운 것은 내가 음절을 잘라주고, 눈에 잘 들어오도록 음절 별로 형광펜으로 칠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특히 'b'가 묵음인 여러 경우들은 언어학자들이 일부러 라틴어의 어원을 밝혀주기 위해 더한 것이니 외우는 방법밖에 없다는 설명도 해 주었다. 그리고 'h'나 'k'가 단어 앞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경우도 외래어의 발음이 함께 들어와 그런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는 수 십 문장들을 한번 읽고 다시 두 번째 같이 읽었다. 너무나도 느리지만 정상 속도에 조금씩 가깝게 읽어내는 그녀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올라가고 춤이 덩실덩실 춰지는 것 같았다. 내가 그랬으니 그녀는 오죽 좋았을까. 수업을 마칠 때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영어 읽기가 너무 재밌어요!" 그렇게 그녀는 그 후로도 음소 인식 훈련을 계속하면서 조금씩 읽기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당연히 문장 외우기도 도전해 볼 만한 것이 되었다.


그랬다. 그녀는 너무나 전형적인 난독증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난독증이 있으세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단어'를 쓰지 않고도 고쳐주거나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나는 앞으로도 '그 단어'를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말이다. 나와 여러 번 만나다 보면 사람들의 난독증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데 그때는 스스로가 내게 묻는다. "혹시 저도 난독일까요?"하고.


어차피 현대인들의 상당수가 ADHD, 아스퍼거스, 난독증, 강박증, 불안장애 등등에 조금이라도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기도 하다. 그러니 굳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본인이 듣기 싫어할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그녀가 "제가 혹시 난독증인가요?"라고 물으면 "네, 우뇌가 정말 많이 발달하고 자잘한 거보다는 사물의 큰 그림을 잘 보시는 거 같네요. 역시 사업은 아무나 그렇게 잘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죠. 부러워요.. 저도 우뇌가 조금만 더 발달했으면 사업을 한 번쯤 생각해 봤을 텐데..ㅎㅎ 전 너무 평범할 수밖에 없네요."라고 할 거다. 즉, "네, 맞아요. 난독증이 있으세요...."라고 바로 말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아, 영어 읽기가 재밌어요!" 너무 행복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5명 중에 1명은 난독증이라는데 그들 중 몇 명만이라도 자신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의 전형적인 문자 학습 방법과 교육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고 덜 속이 상했으면 좋겠다.




#난독증 #신경다양성 #읽기 장애 #성인 읽기 #영어공부 #dyslexia #학습장애

이전 01화 *내 삶의 첫 (영어) 난독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