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윤 Jul 21. 2024

단기 행복 수집가

04. 여행의 시작


자고 일어나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비는 그쳤고 하늘은 놀랄 만큼 푸르르고 맑았다. 하루에 3만 원 주고 예약한 숙소에서는 창밖이 보이지 않았기에 거리로 나와 마주한 날씨는 나를 더욱 흥분케 했다.


분명 어제 교토역에서 걸어온 길을 되짚어 돌아가는 것인데도 처음 걷는 길 같았다. 아기자기한 선술집들이 여기저기 있었고, 요도바시 카메라 주차장 입구에 서있는 주차요원은 친절히 내가 건너가게끔 길을 만들어주었다. 공사 중 가림막에 그려진 그림마저 귀여웠다. 이런 건 어제는 본 기억이 없는데 말이다.



-

나는 날씨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 사람이다. 날씨가 좋은 날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떤 것을 해도 어지간하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그간 액땜을 아주 성실히 해낸 상으로 내게 이 해와 구름을 주셨구나. 믿는 신은 없지만 어찌 되었든 하늘에 감사하다고 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오늘처럼 날이 좋은 날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고 무작정 걷는 것이다. 눈을 마음껏 비비고 볕을 최대한 흠뻑 느낄 수 있도록 얼굴에 바른 것은 거의 없어야 하고, 나뭇잎 쓸리는 소리까지 들리도록 귀에는 아무것도 꽂지 않아야 하며, 바람이 불 때 몸 안까지 느껴질 정도로 얇고 부들거리는 통 큰 옷을 입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걷는 길에는 나무가 많을수록, 길이 좁고 사람이 없을수록 행복이 커진다.


행복의 정석같은 길


평소에 내가 있는 곳들은 좀이 쑤신다. 출퇴근 시간 줄 서서 타는 지하철,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이야기하는 사무실. 너무 많은 울림과 흔들림, 냄새들이 빽빽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그 밀도 높은 공간 속에서 늘 나는 짓눌리는 느낌이 든다.


도망 왔다고 해야 할까. 내가 이번 여행에 교토를 오고 싶었던 이유는 숨을 쉬고 싶어서였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고 말도 안 통했으면 좋겠고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차단당하고 싶었다. 모든 연결이 끊긴 나를 오롯이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다.


-

어젠 이 도시도 더 이상 숨 쉴 곳이 없는 건가 싶었지만 볕과 바람을 따라서 조금만 멋대로 걸어보니 여전히 행복해질 만한 길이 많았다. 작은 빵집에서 시나몬 빵을 사고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예뻐 보이는 카페 앞에서 무작정 내려봤다. 집집마다 소소하게 꾸며놓은 화단을 구경하러 다녔다.



소리가 나를 맴돌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 냄새도 공기도 제 갈길을 갈 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이 어느 빈 공간에 내 자리가 있었다.


눈에 빛이 가득 담겼다가 적어지곤 했다. 테이크아웃해 온 일본식 진한 아이스커피를 뜨겁게 달궈진 이마에 가져가보았다. 얼음이 달그락, 흔들리는 소리가 머리골을 타고 천둥소리만큼 크게 들렸다.


나는 이렇게 단기 행복을 수집하여 장기 행복을 얻는 사람이다.  


이전 03화 인터넷이 안 되는 곳에서 혼밥 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