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youfivethousand
D-31.10K, 스물여덟
처음이 주는 설렘이 있다. 고등학생 시절 카페에서 커피를 처음 주문하며 가장 싼 걸 시키겠다고 에스프레소를 받아 들며 마주한 설렘, 혹은 제대 후 웨스트엔드를 경험하겠다며 혼자 캐리어를 끌고 런던 히드로 공항 입국장에 발 디딘 설렘.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는 익숙한 것보단 처음인 것이 많았기에 설렘의 역치도 낮았지만 이젠 어지간하지 않으면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지금, 러닝은 끊임없이 잔잔한 설렘을 주는 처음의 연속이었다.
3년 전 가을, 생애 첫 하프마라톤을 앞둔 첫 15K 대회. 처음 뛰는 거리에 처음 마주하는 코스로 온 신경이 예민해졌다. 발뒤꿈치에 닿는 길의 생김새부터 자갈의 거친 표면과 미세하게 파인 흙길까지, 모든 감각이 그 두터운 러닝화의 밑창을 뚫고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눈과 귀로 향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레이스의 중후반부터는 처음 달리는 길이 주는 매력을 매력이라 느끼지 못하고 경계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기 시작한 결승선에 나는 신체의 리듬을 잊은 채 마지막 스퍼트를 위한 힘을 주었다.
설렘의 이면에 두려움이 있다는 것이 그제야 느껴졌다. 결승선까지 다섯 걸음을 앞두고 왼쪽 종아리에 쥐가 났다. 어? 하는 순간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따라오는 러너들을 위해 가장자리로 피하랴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근육통에 의료진을 부르랴 판단력은 이미 날아간 지 오래다. 종아리에 괴생물체가 들어간 마냥 미친 듯이 경련을 일으키는 근육을 두 눈으로 마주한 건 어마어마한 공포이자 두려움이었다. 5시간 같은 5분이 지나고 마지막 다섯 발자국을 기어가다시피 걸으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때 느낀 감정은 해냈다는 성취감을 가볍게 짓누르는, 나를 다스리지 못했다는 패배감과 허무함이었다. 그렇게 러닝에서의 '처음'은 설렘의 존재감을 압도하는 두려움이라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후의 러닝에서도 '처음'은 여전히 내게 서늘했다. 작년 늦가을 강원도 춘천, 무슨 자신감으로 저지른 건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무작정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했다. 그다지 오래가지 못한 설렘이 지난 후 4 시간 하고도 몇 분. 이미 피는 피대로 흐르고 물집은 물집대로 잡혔는데 허벅지 근육에 관성이 붙어버렸다. 머리로는 멈추기를 원하지만 그 판단보다 무릎이 앞서 나가는, 생애 처음 경험하는 내 몸뚱이의 생경한 반응에 예민함이 극에 달했다. 결승선을 몇십 미터 앞두고 지난가을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왼쪽 종아리에 잠들어있던 괴물새X 한 마리가 깨어나기 시작했고, 다섯 걸음을 앞둔 채 나는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이 고꾸라졌다. 2년 만에 깨어나 쾌재를 부르는 듯한 종아리 근육의 경련을 다시 눈 앞에서 목격했다. 그때와 달랐던 것은, 상상조차 못 할 속도로 빠르게 꿈틀거리는 종아리 근육과 핏줄의 경련을 이번에는 의료진 호출 없이 덤덤하게 바라보았다는 정도였다.
그렇게 러닝은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마주하기 힘든 감정의 찰나들을 안겨주었지만, 아마 나는 이미 원초적인 설렘과 본능적인 두려움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았을 거다. 에스프레소가 혀에 처음 닿았을 때 목 넘김 자체를 거부했던 두려움부터 분명히 여기에 영국 통신사 유심칩 자판기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아찔함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확실한 건, 러닝으로 인해 나는 매 순간 감정의 자기 객관화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5,000K를 마주하는 지금의 감정은 어떤가 돌아보게 된다. 분명히 성취감에서 마냥 기인한 설렘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칠지 감이 1도 잡히지 않는 태풍의 눈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이제 31.10K만큼의 고요함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