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K Feb 01. 2016

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

 아침부터 눈이 내린다.

 하얗게 하얗게 무엇이 그리 부끄러웠던지 모든 것을 다 덥어 버렸다.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켜 움직인다. 아침부터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카락과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 거리들. 주방에서 냄새가 나는듯한 착각마저 든다. 아니, 냄새가 난다. 무슨 냄새인가 생각을 해봐도 알 수 없지만 냄새가 나는 것은 확실하다. 나의 코가 그렇다고 나에게 확신의 말을 해주고 있다. 


 청소기를 꺼내어  방구석구석의 먼지들을 수거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쌓일 것이 분명하지만 오늘은 수거하는 걸로 하였다. 다음은 세탁기이다. 빨래가 수북이 쌓여 있다. 추운 날씨에 빨래를 하면  안 될 거 같은 심리적 방어선이 작용하여 방치하였더니 지금은 산을 이루고 세탁기를 잠식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세탁기가 작동을  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제일 위에 몇 놈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위에서 ‘뱅그르 뱅그르’ 돌고 있다. 추운 물속에 들어가는 것이 싫은 것은 이해하겠지만, 이러면 서로 피곤해지지 않는가?! 손을 휘휘 저어 기어이 물속으로 입수를 시켰다. 물이 묻어 차가워진 손을 위해 싱크대로 향했다. 따뜻한 물로 설거지를 하면 손에게 위로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청소를 마치고 설거지를 마치고 샤워를 마치고 빨래를 마쳤다.

 모두 끝냈다. 이제야 나의 시간이 온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아른 아른하게 아직도 눈이 내린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하루.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날들. 축 쳐진 마음을 억지로 끌고 집 밖으로 나섰다. 여전히 눈이 내린다. 모자를 쓰지 않고 눈을 맞으면 걷다 불현듯 나도 모르게 혀를 내밀뻔했다. 눈의 맛을 보고 싶어서 이다. 여행을 다니며 눈이 오면 혀를 내밀어 그 나라의 눈의 맛을 보았다. 신기하게 나라마다 눈의 맛은 달랐다. 기분탓이겠지만 분명히 그 맛들은 달랐다. 그 습관이 남아 있어 나도 모르게 맛을 보려 혀가 나오려다 입술에 저지를 당했다.

“ 여긴, 대한민국 서울. 더 이상 여행자가 아니야. 그리고, 몸에 좋지 않아. “


 카페에 들어선다. 자주 오는 이곳이지만 오늘은 마음에 들지 않는 분위기이다. 아저씨들이 삼삼오오 모여 주택, 투자, 결국에는 자기과시로 이어지는 기승전 자기자랑 대화를 듣고 있자니 미간 사이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다 문득, ‘아! 여긴 도서관이 아니지. 카페야. 정신 차려.

이어폰을 귀에 넣고 나만의 음악을 듣는다. 훨씬 편해지는 기분. 이렇게 나만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보고 있자니, 예전 눈이 솟구치는 풍경이 생각난다. 직장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는 돈이 필요했고, 그곳은 나에게 돈을 주었기에 불만은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직장생활의 모든 것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날은 한 달에 한번 있는 임원 전체 회의를 위해 임원과 간부 모두가 안산공장으로 떠나고 본사에는 과장부터 사원까지만 남아 있는 날이었다. 우리끼린 ‘어린이 날’이라고 불렀다. 그 어린이날에 정시 퇴근을 준비하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그 광경을 처음으로 보았다. 눈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눈이 오르는 풍경을. 그 순간 내가 있는 이곳이, 사무공간이 다른 미지의 공간으로 옮겨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알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묘해지는 느낌. 왜 알지 못했을까? 몇 년간 같은 공간에서 겨울을 보냈음에도 난 왜 알지 못했을까?


 그 이후로 눈이 오면 커피 한잔을 들고 휴게실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었다. 오늘 눈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이 오르는 그곳의 풍경이 그립다. 떠나온 직장이 그리울 때가 있다니 참 무서운 일이다. 


 살다 보면 사소한 것 하나에 불현듯 마음속 안에  가라앉아 있는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지나간 유행가에, 폐부를 찌르는 차가운 공기에, 스쳐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의 뒷모습에,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에 그렇게 그리움과 기억은 떠오른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그립고 아련하게 미화되어서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아프고 힘들고 괴로움에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더라도, 시간에 퇴화되고 다듬어져 아름답게 정제되어 남아 있게 된다.

망각. 사람에게 가장 어리석게 만들고 실수를 반복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
매거진의 이전글 욕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