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지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것을 알고 있을까요?"
남자는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면 신이 나서 뛰노는 강아지처럼 기분이 좋다는 여자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 말을 들은 뒤로는 눈이 오는 날이면 여자 생각이 난다. 정확히는 눈을 보고 배시시 웃고 있을 여자의 표정이 떠오른다.
첫눈이 오던 날, 먼저 선톡을 잘하지 않던 여자는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여자는 지난번 만남에서 며칠 전 내렸던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숲길을 걸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도 참 듣기 좋아요. 그렇죠?"
여자는 자신의 목소리에 눈 밟는 소리가 묻힐까 소리를 조금 더 낮췄다.
따뜻한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여자에게 눈은 여전히 설레는 어떤 것이었다.
반면에 남자는 어려서부터 자주 봤기에, 그저 많이 내리면 출퇴근에 불편한 그 이상도 이하의 의미도 없었다.
여자는 그런 남자로 하여금 자꾸만 매년 보게 될 눈에 어떤 의미를 담게 만든다.
해가 지는 저녁 무렵 느닷없이 눈이 펑펑 내렸다. 순식간에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남자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내리는 눈을 보고 생각했다.
'펑펑 내리는 이 풍경을 본다면 좋아할 텐데...'
아직 일을 마치지 않은 여자는 눈이 오는지도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남자는 온통 새하얗게 변하고 있는 풍경을 사진에 담아 여자에게 전송했다.
업무를 마친 여자는 남자가 보낸 사진을 확인하고는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남자가 예상했던 바로 그 표정이다.
내리는 눈 때문인지, 그런 눈을 보고 여자를 떠올린 남자의 마음 때문인지
여자의 마음에 분홍빛 연기 같은 것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이내 창밖에서 갑작스레 쌓인 눈을 치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싸악~ 싸악~"
여자에겐 겨울에만 들을 수 있는 반가운 소리다.
여자는 겨울이면 간혹 알람도 울리지 않은 이른 아침 눈 치우는 소리에 눈을 뜰 때가 있다.
여자는 그런 아침을 좋아한다. 눈이 오면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걸 몇 해를 속고도, 또 속는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 좋은 일이 일어난다면, 사실이 되는 거니까.
그런 아침이면 따뜻한 이불속에서 잠깐이지만 늦장을 부려본다.
'눈이 많이 쌓였나 보다'
눈을 감고 온 동네가 하얗게 변해버린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잠깐 나갈까, 추울 텐데 나가지 말까'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간을 확인하고 여자는 잠시 고민한다.
그러다 문득,
'그래, 오늘 밤은 눈이 펑펑 오니 초코 쿠키를 먹으면 딱이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여자는 기어코 나갈만한 구실을 하나 찾았다. 이불 같은 패딩을 대충 걸쳐 입고, 현관문을 열였다.
아직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하얗게 변한 계단이 보인다. 시선을 돌리자 가로등 불빛 아래로 유난히 반짝거리는 눈송이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춤을 추고 있다. 여자는 신이 난 아이처럼 미끄러운 계단을 서둘러 총총거리며 내려갔다. 이제 막 쌓이기 시작한 눈은 우유 얼음을 갈아 만든 눈꽃빙수처럼 부드럽기 그지없다.
여자는 문득 떠오른 노래를 들으며 길지 않은 골목을 걸었다.
나무에 소복이 내려앉은 눈도, 파란 차를 하얗게 뒤덮은 눈도, 까만 밤을 하얗게 수놓은 눈도
여자의 눈에는 영화 속 한 장면만 같았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여자 혼자 듣기엔 너무 아까웠다.
여자는 남자에게 답장을 대신해 노래 링크를 전송했다.
남자도 분명 눈 오는 풍경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이 감성을 같이 공유하고 싶었다.
불이 환하게 켜진 편의점에 들어선 여자는 이 기분을 더 달달하게 만들어 줄 초코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
휑한 가지가지마다 하얗게 눈이 쌓인 나무를 배경으로 초코쿠키 사진을 찍어 남자에게 전송했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작은 냄비에 물을 데워 남자가 선물한 커피를 머그잔에 담았다.
따뜻한 김이 폴폴 올라오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남자에게 보낸 노래를 재생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커피 한 잔과 초코 과자 그리고 노래 한 곡으로 이 밤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건가?'
실은 지난 몇 달간 여자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일들로 복잡했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신에게도 내색하지 않았을 뿐, 때론 그 무게가 벅차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행복은 늘 찰나에, 아주 사소한 순간에 다녀간다.
우리는 그저 그 순간에 잠시 머무를 뿐이다.
마침 남자의 답장이 도착했다.
남자는 여자가 보낸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여자도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 있었다.
다른 공간이지만 같은 노래를 들으며 남자와 여자의 감정은 서로 닮아가고 있다.
여자는 주저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잔뜩 들떠 있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자 남자의 기분도 덩달아 들썩인다.
부정적 감정이 전염성이 있듯, 긍정적인 기운도 상대를 쉽게 물들인다.
"다들 눈을 치우느라 눈이 반갑지 않은 눈치였는데,
나는 너무 철없이 좋은 거예요~ 혼자 눈 밟으며 좋아했어요!
그래서 이 기분을 전하고 싶었어요."
남자는 눈이 반갑지 않은 이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여자에겐 눈이 영화였지만, 토박이들에겐 그저 생활의 일부였다.
특히 남자는 몇 해전 눈에 대한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 있었다.
당시 때아닌 눈은 남자를 막막하게 만든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얘기를 듣고는, 남자가 앞으로는 눈을 보면 좋은 일을 떠올리길 바랐다.
"이제는 눈 보면 기분이 좋아지겠네요~?"
남자가 대답했다.
"응, 이제는 좋네요!"
여자는 커피를 마시며 할까 말까 망설였던 마음의 소리를 장난스럽게 남자에게 전했다.
"커피 선물은 안 받아야겠어요. 이게 문제가 있더라구요."
무슨 문제가 있었냐며 의아해하는 남자에게 말했다.
"이걸 마실 때마다 생각이 나는 거예요. 이게 문제예요. 도통 뭔가 집중이 안되잖아요."
여자가 이렇듯 뻔뻔해질 수 있었던 것은 눈이 펑펑 왔기 때문이다.
여자가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들뜬 것은 눈이 소복이 쌓였기 때문이다.
겨울밤 난데없이 펑펑 내린 눈은
여자를 솔직하게 만들었고,
방심하고 있던 남자를 새하얗게 물들였다.
겨울밤, 난데없이 펑펑 내린 눈이 여자와 남자의 마음에 소복이 쌓였다.
* 꼭 한 번은 '소설'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그럴만한 역량이 된다면 말이죠.
그런데 문득 그 '언젠가'를 기다리기보다, 쓰면서 그 '언젠가'를 만들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이후, 누군가를 새롭게 만나는 일도, 진솔하게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한다는 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 지나면 봄은 반드시 오니까요. 글을 읽은 단 한 분이라도 마음에 봄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소 간질간질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 보려 합니다.
새해가 밝았으니까요, '서툴게 시작해서 세련되게 마무리하면 된다'는 누군가의 말에 힘을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