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했다.
요즘 화제의 프로그램 '체험! 회사 현장'을 아시는가? 얼떨결에 회사 생활을 시작한 주인공이 겪는 좌충우돌 회사 스토리다.
처음 들어본다고? 그렇다. 사실 내가 지어낸 프로다. 어쨌든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마인드로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벌써 일 년이 됐다.
예상보다 길어진 회사 체험에 출퇴근 왕복 다섯 시간은 몸이 버티지 못할 거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삐리 삐리 체력에 한계가 온다 삐리 삐리
독립을 하자.
판교는 회사와 가깝지만 왠지 인간미가 없는 느낌, 강남은 너무 사람 많아, 홍대도 사람 많고 신촌은 뭔가 부족해서
이태원 프리덤!
급히 빈 방을 찾았고 맘에 드는 곳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팅커벨의 친구에서 보고 연락드립니다. 아직 방 있나요?"
"네 있습니다"
그렇게 방을 보러 갔다. 주소는 이태원역 뒤편, 이슬람 사원이 있는 우사단로 몇 번지였다. 이슬람 사원 근처는 예전에 몇 번 와봤던 곳이었지만 걸을수록 낯선 곳들이 이어졌다. 이런 곳이 있었구나. 가뜩 춥고 해도 빨리 지는 겨울밤.
계단과 골목이 바톤터치를 하듯 계속 이어졌다. 이 동네 골목은 왠지 무서워. 골목 속의 골목으로 자꾸 나를 인도하는 지도 어플이 미웠다. 트랜스젠더 바를 지나 낯선 얼굴들을 스쳤다. 끝없는 골목을 한참 걷다 보니 다행히도 주소 속 그 집이 있다.
완전한 독립이라기엔 2% 부족하다. 2층짜리 주택에서 1층의 방 한 칸. 나 포함 세 명이서 거실, 부엌 같은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셰어하우스다.
셰어하우스에 산다고 말하면 남자 셋 여자 셋 청춘시대 괜찮아 사랑이야 와 같은 드라마 이름을 열거하며 눈을 반짝이지만 응 아니야~
아직도 나는 낯을 가리는 중이다. 어쨌든 게을러서 부엌에 들어가는 일은 고작 차를 끓여마시는 일 뿐이지만, 집도 산뜻하고 방도 꽤 넓어 첫 번째 보금자리론 딱이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개좋잖아!
이사하던 날은 방을 보러 갔을 때보다 더 추웠다. 아빠 차는 꾸역꾸역 내 짐을 실었다. 필요한 것만 챙기자고 했지만 한가득이었다. 집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길은 점점 좁아졌다. 아빠도 아빠 차도 당황했다. "뭐 이런 길이 다 있어?"
주차할 만한 공간도 없어서 겨우 차를 세워두곤, 우리는 짐을 하나씩 맡아 걷기 시작했다. 커다란 캐리어와 박스 여러 개. 가로등 불빛이 유독 더 밝아 보이는 어둠 사이로 걸었다. 짐이 무거워서 엄마는 세 걸음에 한 번씩 멈췄다를 반복하셨다.
이쯤 되면 집이 나와야 하는데. 분명 여기 어디였던 거 같은데. 집 옆에 집, 또 그 옆에 집이었지만 한참을 내려가도 내가 가야 할 그 번지의 대문은 보이지 않았다.
맞다, 나 길치....
지도를 켜보니 완. 전. 다.른.곳.으로 와 있었다. 그 무거운 짐을 들고 생뚱맞은 곳으로 와버린 게 너무 미안해서 나는 연신 사과에 웃음을 보탰다. 괜히 멋쩍어 "아니 여기 집들은 왜 다 똑같이 생겼어?"라는 말도 했다. (하지만 진짜 다 똑같이 생기긴 했다.)
알고 보니 아빠 차를 세워둔 곳에서 거짓말 안 보태고 1분 정도 거리였다. 그 가까운 거리를 두고 우리는 30분 넘게 경사진 길을 걸었다. 엄마와 아빠의 얼굴은 아스팔트보다 더 굳어있었지만 차마 딸의 이삿날에 화를 내고 싶진 않으셨던지 말을 아끼셨다. 차라리 화를 내주세요......
그렇게 다시 언덕을, 계단을 넘어 그 추운 겨울날 땀을 잔뜩 뺐다. 엄마는 하우스메이트 언니들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잘 부탁드려요. 하고 아빠와 함께 사라졌다. 기분이 묘했다.
야심차게 챙겨 온 조명을 조립했다. 불을 켰다. 누웠다. 낯설었다. 주변엔 미처 풀지 못한 짐들이 쌓여있었다. 주황색 불빛을 보며 뒤척였다. 한참 동안 헤맸던 길들을 떠올렸다. 박스처럼 차곡차곡 쌓인 집들과 그 속에 누워있는 날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집들이 모여있을 줄이야.
세 명이 나란히 낑낑대며 오르내리던 언덕길.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던 엄마. 아빠 차의 뒷모습을 보며 낯설게 손을 흔들던 나와, 좁은 길 양쪽이며 위아래로 주욱 늘어져있는 집들. 하나도 빠짐없이 생경했던 것들과 함께 독립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