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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 Aug 12. 2020

결혼이라는 숙제를 끝마친 어른

homework는 죽기 전에 끝이 날까?


"그래서 공주와 왕자는 그 뒤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어릴 땐 우린 그렇게 배운다. 시련을 극복하고 사랑을 되찾은 공주와 왕자는 결혼이라는 숙제를 해결한 뒤 그저 행복하게 살았다고.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나는 서른둘에 결혼을 했다. 아니다. 서른 하나였나? 아무튼 그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고 결혼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서른이 넘어 서른 하나가 되니 엄마는 점점 더 조급해 보였다.


사실 주변만 봐도 그렇다. 서울에 사는 친구들은 아직 결혼 얘기는 먼 얘기처럼 해댔지만, 고향인 부산이나 포항에 사는 친구들은 삼 분의 이가 결혼을 한 상태였다. 게다가 엄마 친구 자식들은 왜 그렇게 빨리 취업을 하고, 왜 그렇게 빨리 결혼을 하는지.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는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그쯤 나는 퇴사를 하고 짐을 바리바리 싸서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던 시기였다.

그러니깐 서른은 넘었고, 회사는 그만뒀고, 집에서 내내 컴퓨터 하며 번역을 해댔던 그런 시기.


프리랜서라고 이야기하면 고개를 갸우뚱. 그래서 그게 뭔데?


구체적으로는 번역을 하고 그 외 잡다한 일을 한다고 하면 또 고개를 갸우뚱. 그래서 그건 또 뭔데?


어른들이 알만하게 소개하기까지가 참 구차한 과정을 거친다. 예전엔 '회사원' 하나면 그만이었는데.




일이 많을수록 집에 있는 날이 늘었다. 그리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타자기만 두들겨댔다.

엄마는 그런 나를 늘 응원해주셨지만, 또 젊은 나이에 집에만 박혀 있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회사에 가도 똑같아, 엄마. 회사에 가도 내내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어.

그게 사무실에서 집으로 바뀐 것뿐이야."


"연애는 하니?"



다행히도 나에겐 오래 사귄 남자 친구가 있었다.

고속열차를 타면 두 시간 반 거리에 있는 남자 친구였지만, 뭐 아무튼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나보다 세 살 많은 남자 친구는 몇 년을 사귀어도 결혼의 '결'자를 꺼내는 법이 없었다.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만나 서른을 넘고 서른 하나, 서른둘.  그렇게  나이를 먹어 갔지만 우린 결혼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건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난 번역으로 큰 꿈을 꾸고 있었으니깐.


뭐 어떤 꿈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그 일로 인정받고 자리도 잡고 돈도 많이 벌고 싶었다.

결혼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중요했다.


그런데 문제는 주변 사람들.

"너넨 오래 사귀었는데 결혼 안 해?

남자 친구가 결혼하자고 안 해?"


그 질문들이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것이 날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뭐 그렇다고 당장 결혼할 것인가? 그러기엔 아무것도 이뤄낸 게 없었다. 나조차도 결혼의 결자를 꺼내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 당시 남자 친구는 어땠을까?

대학원을 졸업하고, 3개월 만에 대기업에 취업을 하고 학자금을 갚아가면서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있던 상태였다. 돈 좀 모이면 예전에 못했던 걸 하나둘씩 해보고도 싶다는 말을 줄곧 해왔었다.


어느새 후루룩 흘러버린 시간이 한탄스러웠다.

시간이 얼마 안 지난 거 같은데,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뭔가 이뤄놓은 게 없었다.


그러면 또 주변에서 말한다.

"꼭 이뤄놓고 결혼을 해야 하니?

같이 쌓아가면 되는 거지."

 




그렇게 우린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 얼떨결에 상견례를 하고, 그날 바로 날짜를 잡고 몇 개월 뒤 결혼을 했다.


물론 사랑해서 결혼을 한 건 맞다.

그때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

결혼을 한다면 이 남자와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맞다.


다만 6년을 사귀었지만 아직도 적당한 시기가 언제인지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결혼? 그것이 당장 꼭 필요한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우린 결혼을 했고 결국 난, 그리고 결국 그는 그간 모아둔 돈을 모두 결혼하고 전셋집 마련하는데 다 쓰고 말았다.




그러니깐 퇴사하고 프리랜서가 되어서 돈 좀 모이면 세계여행이나 하다 못해 유럽 한 달 살기 같은 거라도 하고 싶었던 나도,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어서 돈 좀 모이면

차도 사고 시계도 사고 하고 싶었던 거 하나 둘 하겠노라고 다짐했던 그도


다시 제로 상태가  것이다.


뭐 결혼한다고 해서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우린 여전히 각자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저축하고, 열심히 살고 있다. 숙제 하나를 끝 마쳤으니 이젠 열심히 모아서 둘이서 행복하게 살면 그만인 것이다.


아니... 그러면 되는 건 줄 알았다.




'아이'라는 숙제.. 그러니깐 이젠 내가 '노산'이 된다는 숙제를 불쑥 꺼내기 전까지. 점점 의문이 든다. 이놈의 숙제는 끝이라는 게 있는 걸까? 나는 그리고 그는 하고 싶은 걸 언제쯤 하면 살 수 있는 것일까?나만 이렇게 느린 것일까?


아이를 낳으면 그 숙제는 끝이 날까? 나는 나의 뚜렷한 생각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뒤로 한채 이 숙제를 풀어야 하는가?


"아이가 생기면 아이에게서 얻는 기쁨이 아주 커."

알고 있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렇게 될 거라 것도 뭐 알겠다.


뭐 그런데 그거와는 별개의 문제로, 결혼의 숙제처럼 어른들의 재촉, 주변의 재촉에 의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언제나 우린 기로에 서있다.


아이를 낳으면 이젠 아이를 어떻게 하면 잘 키울 것인가에 대한 숙제가 남아 있을 것이고, 또 그렇게 잘 키우고 나면 또 다른 숙제가 분명 불쑥 튀어나올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산다고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면서


정해진 인생의 순리대로.


-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사실이 ...

그것이 나를 설득하지 못할 뿐이.

이번에 나는 물리적인 나이, 혹은 주변 재촉 때문에 서둘러 숙제를 풀고 싶지 않다.

결국 어떤 결정을 내리든 결국 내가 선택할 것이고 그 뒤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그래서....

그렇다고....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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