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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박선영 Oct 25. 2018

페미니즘의 경력을 잇는다는 것

왜 나는 다시 페미니스트가 되었을까?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면서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결정했다는 건, 싸움꾼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는 뜻이다. 딱 그 뜻이다. 거기에서 시작할 수 있다. 분노는 이미 내재화되었고 슬픔과 우울의 파도타기에서 멘탈을 부여잡으며 세상과 싸운다. 그렇게 싸워대며 내 인생의 한 시절을 건너왔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기자로 활약하며 '첫'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여성인사들을 인터뷰했고, 한 지역에서 수년간 지속되어온 성폭력사건을 집중취재하기도 했으며, 일부 지역을 떠도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 루머를 기획취재했다. 

세상과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도 작은 승리를 거머쥐고 자존감을 지켜내는 여성들을 발견하는 일들이 무척 즐거웠던 것 같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또한 지나간 모든 것은 그저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으므로 '즐거웠다'라는 단어에 다 담아버렸지만,,,어찌 마냥 즐거웠으랴. 무척 강도높은 노동을 해야했고 그 고된 노동의 댓가를 바라기보다 '열정'의 이름으로 지속해야했다. 


아마 지쳤을 것이고 '반짝이는 분홍빛 로맨스'에서 자유롭지 못했기에 '결혼'을 선택했다. 임신, 출산, 육아, 부모님의 장례까지 치르면서 무시무시한 경력단절을 겪는동안, 난 다시 페미니스트로 살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에 다소 안심했던 것 같다.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그 때=페미니스트로 활동하며 살던 지난 시절'도 겪었는데 이게 뭐 힘들다고 징징대냐, 며 자신을 괴롭혔다. 사실 고된 노동의 댓가를 바라지 않고 열정과 애정의 이름으로 그 고된 노동을 기꺼이 감수하도록 만드는 구조는 같은 것일진데...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이 깨진 건  "세월호 사건"때문이었다. "세월호 사건"은 같은 시공간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고 나 역시도 영향을 받은 것에 불과하지만 나는  특히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던 그 방송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그럼에도 가만히 있었던 아이들은 대체 생존에 대한 공포와 위협을 얼마나 느꼈다는 말이 되는가.

워낙에 감정을 중시하고 매사 감정부터 느끼고 상황파악을 하는 감정쟁이다 보니 그 감정이 느껴져 너무 괴로웠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계속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내 삶의 구조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내가 하고 있는 것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되지만 생애 처음으로 온 에너지를 이미 쏟아붓고 있는 육아와 내 나이듦에 대해 의미를 부여했고 누구에게 보이고 팔리기 위한 글이 아니어도 괜찮을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성과는 크지 않았지만 다시 '나'로 돌아오는 느낌은 짜릿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다보니 결국 페미니즘에 접속했다. 아 맞다, 나 페미니스트였지? 그게 잊는다고 잊혀지는 게 아닌데 말이지...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는 요즘 덕후들의 말처럼...


다시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여자들,  페미니스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나 자신과 싸워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갈등상황에서 자꾸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망갈 곳은 현실적으로 아무데도 없다),

옳다 그르다는 잣대로 상대방을 쉽게 단죄하려는 사고방식(나의 답이 그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사람들에게 사랑 혹은 인정받겠다는 터무니 없는 욕심(그 사람을 나는 인정했는가? 그 사람이 나를 왜 인정해야하는가? 그를 내버려둘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이기심(나는 나의 중심만 될 수 있다, 누구에게도 나를 내세워 그를 주변인으로 만드는 상황은 피하자), 과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이제는 나 자신을 조금 더 성숙한 모습으로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돌아온 페미니스트로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것은 담론을 주도하기보다 담론을 수집하고 기록하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받아들인다. 그것은 현재 나의 목표이자 지향점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다시 돌아온 페미니스트로 살고 있다.


다시 돌아온 페미니스트로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한참 고민하면서 만든 첫 책이 바로 [대한민국 페미니스트의 고백]이었다. 무려 스물 여섯명의 대한민국 페미니스트들을 한 책에 담았다. 연령대도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까지 모두 있다. 10대와 70대(한국 1세대 페미니스트의 최고령일...)의 이야기는 담지 못했지만 아쉽지는 않다. 그 이야기는 사실 각 한권의 책에 따로 담을 이야기일 만큼 다른 상황, 다른 이야기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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