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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e Jun 09. 2016

‘우리’라 부를 수 없는 지난 그대들에게

지난 관계의 모양에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로 남는다

우리말에서 ‘우리’는 영어의 ‘our’가 아닌 ‘my’의 뜻으로 쓰이곤 한다. ‘우리집’은 너와 내가 함께 공유하는 집이 아닌 ‘나의 집’이고 ‘우리가족’ 또한 나의 엄마, 나의 아빠, 나의 오빠로 구성된 ‘나의 가족’을 의미한다(참고로 나는 오빠가 있다).


나에게 '우리'라는 수식어는 친밀한 관계이면서 교류가 있고 '내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는 사이에만 붙이고 싶은 특별한 수식어였다.

출처 : 다음 국어사전

전직장이자 첫 직장의 동기들이 모여 있는 단체 채팅방에서 한 동기가 팀 대리님 이야기를 꺼냈다. 그 동기는 내가 퇴사하기 두 달 전에 팀을 옮겨 우리팀으로 들어왔다. 대리님과의 에피소드가 전송된 채팅방에 나도 모르게 ‘역시 우리 대리님이야’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잠시 뒤 아차 싶었다. 그분은 더 이상 ‘우리 대리님’이 아니었다.


지난해 가을 행사때 대리님이 찍어주셨던 사진. 메모리카드를 정리하다가  발견했던 기억이 난다.


팀의 막내였던 나는 대리님과 꽤 가까운 사이였다. 입맛도 비슷해서 함께 출장을 갈 때면 꼭 맛집을 찾아 들렀고 음악 취향도 비슷해서 내가 선곡한 음악을 들으며 이천, 강화도 등 많은 곳을 다녔다. 생전 처음으로 소개팅을 할 때에도, 연애를 하며 고민에 빠져있을 때도 항상 제일 먼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 대리님이었다. 그만큼 입과 귀의 취향이 비슷했고 맞선임보다 더 마음을 열고 의지했었다(일을 잘하지 못했던 나는 일적으로는 여러 번 크게 혼났다).


언제부터였을까. 동기가 ‘우리 대리님’이라고 부르자 질투 아닌 질투가 생겨났다. 유치한 생각이지만 내 사람을 뺏긴 것만 같았다. 나는 더 이상 ‘우리’라 부를 수가 없는데. 이제는 아무 사이가 아닌데. 어쩌면 퇴사를 말했던 날부터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사이가 된 걸지도 모르지만, 그저 동기가 부러웠다. 대리님뿐만이 아니다. 가끔 무의식 중에 전직장을 ‘우리회사’라고 부를 때도 있다. 더 이상 ‘나의 직장’이 아닌 그곳을 ‘우리’라 부를 이유도, 부를 수 있는 자격도 남아있지 않지만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내가 전직장을 ‘우리 회사’라고 부른다고 해서, 전직장의 상사를 ‘우리 대리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나한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의식 중에 불렀다는 걸 의식하는 사람도 나뿐이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로 남겨가며 의식화하는 이유는 여전히 지난 관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리님과 사무실로 들어가던 중, 파랗고 하얀 하늘과 샛노랗게 물든 단풍이 예뻐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헤어진 연인을 이야기하며 그와 나를 ‘우리’라 묶어 이야기하는 것처럼, 애증이 깊을수록 ‘나의 것’을 떨쳐내기란 쉽지가 않다. 첫 면접, 첫 직장, 첫 동기와 같이 전 직장은 나에게 ‘처음’이란 수식어가 붙는 날의 연속이었다. 깊은 감정을 처음으로 느꼈던 사람이 첫사랑이라면 첫 직장은 내가 처음으로 깊은 소속감을 가졌던 곳이 아닐까 싶다. 퇴사를 하고 맞이하는 두 번째 계절이 시작되었지만 그 여운이 아직 가시질 않고 있다. 더 이상 명명할 수 없을 때 비로소 관계가 끝나는 것이라면, 아마도 나는 지난 관계를 꽤 오랫동안 ‘우리’라 부르지 않을까 싶다.




이십 대의 끝자락으로 다가갈수록 스쳐간 지난 관계들이 떠오르는 날이 잦다. 아쉬움일까 그리움일까. 그저 한번쯤 떠올려보는 추억거리일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새로운 관계에서 깊이와 길이를 기대하기가 어려워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 계절이 바뀔 때면 종종 ‘우리’라 불렀던 지난 그대들이 나를 찾아오나 보다. 


더 이상 '우리'라 부를 수 없다고 해서 지난 관계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의 한켠에 남아있는 지난 관계의 모양에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로 남아있다. 나도 누군가에겐 '한때' 우리라 불렸던 사람일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우리라 불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의 기억 속에도 내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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