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을 뿐, 엄마의 자기소개는 이미 충분했다
“딸, 표에 증명사진은 어떻게 넣는 거야?”
엄마가 요즘 바쁘다. 밝은 오후에는 친구 가게 일을 돕고 저녁에는 두세 시 간씩 거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지난 3월 퇴사 이후 주경야독 중이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구직활동을 한다.
“탁, 탁, 탁, 탁” 매일 밤이면 독수리타법으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거실에 퍼진다. 엄마가 완성한 글자의 자음과 모음 사이 간격은 ‘타다닥’이 아닌 ‘탁, 탁, 탁’이다. 한/영 키를 누르지 않고 무작정 키보드를 두드리던 엄마는 한결 같이 백스페이스(backspace)를 누른다.
엄마가 쓰는 자기소개서와 내가 쓰는 자기소개서의 문항이 크게 다르지 않다. 성장과정, 성격의 장단점, 지원동기, 입사 후 포부 등 수십 번을 봐왔던 그 질문들이 엄마의 자기소개서에도 굵은 글씨로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얼마 전 쉰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엄마의 성장과정에는 어떤 내용이 있을까. 대학을 갓 졸업한 취준생이 아닌 내일모레 예순이 되는 어른의 성장과정을 읽어볼 기회가 왔다.
“엄마, 이렇게 짧게 쓰면 어떡해!”
공백이 많다. 아니, 공백은 둘째 치고. 인사담당자들이 말하는 성장과정의 안 좋은 예 1번인 ‘어느 지역에서 태어나 엄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밑에서 자라... 어느 학교를 졸업하고...’ 그 자체다. 다음 문항을 보자. 지원동기나 성격의 장단점은 다르지 않을까.
지원동기 : 구직 글을 보고 지원함
장점 : 책임감이 강하다, 손이 빠르다
단점 : 고집이 세다
전 직장(지금은 첫 직장이 되어버린 곳)에서 인사업무를 담당하며 수많은 자기소개서를 보고 평가했다. 그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서류도 많이 보았다. 지원자격이 안 되는 건 기본이고 정해진 양식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도 태반이었다. ‘홈페이지는 제대로 둘러본 건가?’, ‘채용공고를 정독한 건 맞을까?’ 갖가지 의문이 생겨났지만 딱히 풀고 싶지도 않은 의문이었다.
묻어두었던 지난 의문들이 엄마의 자기소개서를 보며 자연스레 풀렸다. 엄마는 다른 사람의 자기소개서를 본 적도 없을뿐더러, 어떻게 써야 하는지 들은 적도 없었다. 반면 나는 졸업 전에 취업캠프도 가고 특강도 듣고 스터디도 했다. ‘이상적인’ 자기소개서의 예가 머릿속에 박혀있는 상태였다. 엄마와 달리, 요즘 시대 취업준비의 최전선에 있던 사람이었다.
구직사이트에서 적합한 채용공고를 찾아 읽어보고 기업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력서 양식을 다운 받고. 그 모든 과정을 엄마 혼자 해냈다. 이 사실만으로도 엄마는 충분히 대단하다. 이제 내가 방법을 알려줄 차례다. 엄마의 입모양을 따라 ‘엄마’라는 단어를 처음 말했을 때처럼 말이다.
엄마가 지원하는 곳들은 자기소개서만 수백수천 개를 보는 인사팀이 있는 곳이 아니다. 엄마 또래의 분이 서류를 보고 면접을 진행한다. 내가 아닌 엄마가 그 분야를 경험해왔다. 그렇다면 엄마식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57세 엄마의 자기소개서니까.
그래서 딸내미의 솔루션은 간단했다. ‘단답형을 문장형으로 통일하여 서술하는 것’,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장점을 서술할 것’, ‘선택이유를 명확히 서술할 것’. 솔루션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만큼 당연한 피드백이지만, 엄마의 자기소개서에 꼭 필요했던 것들이다.
“엄마, 전 직장에서 기관 평가등급 잘 받았잖아. 아참 우수직원상도 받았지? 그래서 제주도로 연수 다녀왔잖아.”
"엄마가 맡은 일은 어떻게든 시간 내에 끝내왔잖아. 일처리도 꼼꼼하고. 리더 역할도 잘하고."
엄마가 늘 내게 말해왔던 것처럼, 내 눈에 우리 엄마는 어디에 내놔도 결코 뒤처지지 않을 사람이다. 어디에 있든, 자기만족을 위해 누구보다 최선을 다 할 사람이 우리 엄마란 걸 잘 안다. 어쩌면 나는 그런 엄마에 대한 자랑을 자기소개서에 늘어놓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젊은이들의 자기소개서와 모양이 달라서가 아니라, 내가 아는 엄마의 모습이 다 담겨있지 않아서 아쉬웠나보다.
사실, 57세라는 나이만으로도, 두 명의 아들 딸을 건강한 성인으로 잘 키워낸 것만으로도, 평생을 쉬지 않고 일해온 것만으로도, 엄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자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엄마의 자기소개는 충분하다.
이 글은 지난 2016년에 올린 ‘엄마의 마지막 출근일, 나는 키다리 꼬맹이가 되었다’의 늦은 후속 글입니다. 엄마는 올해 60세가 되었고 오늘도 열심히 일하는 중입니다.
엄마의 카카오톡으로 종종 무료 이모티콘을 받곤 한다. 뭘 그런 걸 받냐며 손사래를 치다가도 이모티콘을 하나하나 눌러보면서 “이건 무슨 의미야?” 물어본다. 그러고 다음 날이면, “까똑” 알림소리 뒤에 무심한 듯 툭- 보내온 이모티콘이 있다.
호기심 많은 우리 엄마는 궁금하면서도 '물어봐야 하기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럴 때면 눈치껏 먼저 알려드리거나 “엄마, 이거 알려줄까?”, “엄마 이거 해봤어?” 하고 물어본다. 오래전,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로 온종일 엄마를 괴롭히고 말문이 트이면서는 쉴 새 없이 질문했던 나날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이제라도 보답해보려는 시도다. 물론, 생각만큼 상냥하지 못해서 늘 고민이지만.
얼마 전, 새로 산 리모컨 작동법을 일곱 번쯤 알려드리며 “어제도 말했잖아”라고 살짝 짜증을 냈다. 앞으로는 백번 천 번 물어봐도 상냥하게 대답해야지. 그러려고 이 글을 썼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