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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우 Apr 01. 2024

유유무적(悠悠無籍)

적이 없어서 외로웠던 적이 있는가?




단 두 개의 조선소의 노동자로 이뤄진 섬, 신선한 은빛에 야광띠를 두른 작업복에 있는 ‘삼성’ ‘대우’ 로고로 더 많은 설명은 필요하지 않은 섬에서 자랐다. 모두 같은 날 월급을 받고 휴가를 떠나며 커다란 회사의 이름이 양산처럼 만든 그늘, 나는 그 밖의 뙤약볕에 서있었다. 우리 가족은 누구도 그곳에 적을 둔 적이 없어서 많은 설명이 필요한 이방인이었다. 불야성의 테마파크처럼 빛나는 조선소의 골리앗 크레인들, 물에 떠 있는 것이 신비로울 정도로 큰 배가 정박해 있던 도크들. 그 거대한 배가 뿌우, 뱃고동 소리를 떠날 때면 야자를 하다가도 ‘어떤 거대한 곳에 소속되고 싶다.’ 라는 갈증을 느꼈다.


등록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정체성을 얻기 위해 늘 까치발을 했다. 수능 1등급, 토익 970점, 학점 4점 이상, 연봉 4천 이상. 누군가가 만들어둔 그늘에 들어가기 위해, 발끝이 얼얼해지도록 까치발을 들었다. 학생과 직장인 사이 잠깐의 미등록자로 사는 공포는 신새벽에도 번뜩 눈을 뜨게 만들었다. 불법체류자처럼 언제든 이 사회에서 감쪽같이 지워질 것 같았다. 등록이 없는 진공상태가 얼마나 혹독하고 두려운지 알아서 숨이 가빠도 멈출 수 없었다. 어떤 지표로도 나를 설명할 수 없는 미등록 상태는 서서히 공기가 줄어드는 잠수함에 갇힌 것 같았다.


처음 빳빳한 명함을 받아서 들었을 때, 모서리가 꼬질꼬질해지도록 만지작거렸다. 하늘색 로고가 새겨진 회사 배지를 받아서 들었을 때 그게 꼭 산소통 같았다. ‘살았다.’ 소속이 있는 인간이 되었단 것, 산소 한 모금을 얻은 안도감이었다. 나도 거대한 이름의 그늘 아래 들어왔다. 이거면 안전하겠지?

등록이 있다는 게 나를 살게 했다. ‘공노비’라며 자조를 섞어 나를 소개할 수 있는 여유, 넉넉한 대출을 일으킬 원천징수 영수증, 나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부모님. 등록된 자가 되어서 느낀 안도감은 얼마나 컸던가.


9년 6개월. 나의 근속 기록이다. 2014년부터 지금까지 한 직장에 등록되어 일했다. 등록된 곳에서 자리를 받고, 평가를 받고, 급여를 받았다. 등록된다는 것은 취소될 수도 있다는 것, 회사라는 이름의 그늘 아래가 밖에서 보던 것처럼 마냥 쾌적하지만은 않다는 것, 이 안온한 그늘에는 자릿세가 제법 붙는다는 걸 알게 될 만큼 10년은 긴 시간이었다.


타인에 의해 기록되고 등록될 수 없는 ‘적’은 의미가 없을까? 등록되는 자 말고 스스로 등록하는 자, 만드는 자가 될 순 없을까. 적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사실 어디든 뿌리내릴 수 있다는 건지도 모른다. 다양한 삶의 형태, 스스로 등록하는 삶을 자꾸 꿈꾸게 된다. 자꾸 스스로 등록을 만들어 본다. 글을 쓰기도 하고, 영상을 만들기도 하고. 누구도 없앨 수 없는 나의 적을 만들기 위해 매일 조금씩 작은 일가를 일으킨다.

이제 내가 꿈꾸는 건 유유무적(悠悠無籍)하는 삶이다. 아무도 취소할 수 없는 나의 적을 조금씩 일구고, 나에게 쾌적한 그늘은 스스로 드리울 줄 아는 두 다리 쭉 뻗고 자는 무적자가 되기를.



 *유유무적(悠悠無籍): 어디에도 등록되지 않고 속박없이 자유로운 삶, 이라는 말로 내가 방금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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