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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도 좋아

by 정안


"그러면...'과도한 업무로 인한...', 음 몇 월부터 그랬다고 했죠? 4월? '3개월 간의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우울과....' 이렇게 적어드릴게요."


항공우주학을 전공하고 정신과 의사가 된 특이한 이력을 소유한, 박찬대 의원을 조금 닮은 나의 의사는 천천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회사에 1분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다고, 병가를 쓸 수 있도록 진단서를 내어달라 요청한 참이었다.


진단서를 받고 나온 금요일부터 주말 내내 의기양양했다. 선빵필승이라 했다.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진단서를 던지며, 노새처럼 짊어진 업무를 던지고 떠나리라. 수많은 업무카톡방에서 모두 나가버리리라. 그 상상만으로도 실내 습도가 10% 정도 내려가는 산뜻함이었다. 그간 연중무휴로 돌아가는 공간을 관리하는 업무를 하며, 팀원 두 명을 병가로 보내고, 인사이동으로 팀원의 절반이 빠진 상황이었다. 시간마다 인데놀과 자나팜을 꺼내어 먹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진단서를 받은 주의 일요일에도 출근해서 콘퍼런스를 진행했다.


일요일 근무 대신 받은 하루 휴가로 쉬고서 출근한 화요일 아침이었다. 빨간 에코백을 자리에 던져두고 팀장 자리 옆의 스툴을 끌어당겨 앉으며 동시에 말했다.


"저는 한 달간 좀 쉬겠습니다."라고 내가 가진 패를 선공개했다. 그리고 본부장에게 가서 통보를 하고, 수요일부터 이곳에 나는 없다,라는 시나리오였다.





선공개한 시나리오는 빠르게 선명함을 잃었다. 나 자신마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팀장이 연차를 내고 생각을 정리해 보라고 한 이틀간,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게 되었다. "정말 그만큼 힘든가? 정말, 진실로?"


사실 맡은 업무가 싫은 것도 아니었고, 약을 먹고 있긴 했지만 당장 공황으로 빠져들 정도는 아니었다. 짐짓 하반기의 뉴욕 출장이나 파트너들과의 기획을 실현하는 일을 기대하고 있기도 했다.


부끄럽게도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우울하고 불안한게 아니라 분했다. 과도한 업무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내가 빛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회사생활을 하며 우쭈쭈, 받고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사실늘 한 것보다 더 칭찬받고 인정받으며 11년 간 사회인으로 살았다. (얼마나 기적이었던 건가.) 나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는 게 무지하게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병가를 만류하는 팀장의 조언에 못 이기는 척, '생각해 볼게요.'라고 했다. 진단서에 적힌 이유가 아니라, 다른 이유라는 걸 내 마음속 깊이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빛나야 하는 만큼 남이 빛나지 않아야 한다는 오만과 아상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병가는 티저에서 마무리되었다. 핀조명이 나에게만 떨어지는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늘진 곳에서도 무대 자체를 빛나게 하는 조연도 될 줄 아는 법을 배울 때가 왔다. 내가 주인공이 아닌 시나리오도 소화하는 사회인이 되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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