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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

by 정안



1. 현이 끊어지던 순간


아득히 먼 곳에서 현이 핑,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포근한 이불속에서 한여름의 망원동을 걷는 꿈이었다. 친구가 내 이름을 연거푸 외치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땐 왼쪽 뺨을 시멘트 바닥에 대고 모로 누워있었다. 불법 주차를 막기 위해 놓인 화분도 덩달아 옆으로 누워있었다. 여름의 열기를 머금은 망원동의 길바닥도 더운 숨을 내뿜고 있었다.


망원동을 걷는 꿈이 아니라 망원동을 걷다가 까무룩, 쓰러진 것이었다. 생면 파스타에 화이트 와인을 고작 두 잔 곁들였을 뿐인데, 파스타집을 나서 더운 숨을 쉬자마자 취기가 나를 삼켰다. "나 취기가 훅- 올라오는데-" 하고 하품을 하다가 곧장 옆으로 스르륵 쓰러졌다고 한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전봇대에 기대 누워있는 취객들이 왜 그러고 있나, 했는데 막상 내가 주취자가 되어보니 어디라도 기대고 싶어졌다. 공사와 행사로 연일 야근을 이어가던 지난주들이었다. 불안을 누르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인데놀과 자나팜을 벗 삼은 탓도 있을까. 몸과 마음의 조율이 한참 어긋난 있던 틈새로 추락했다.


처음으로 쓰러져봤는데 아주 두툼하고 무겁지만, 따뜻한 솜이불을 덮고 아랫목에서 잠든 기분이었다. 언제까지라도 이 이불을 떨칠 수 없을 것 같아. 너무 아늑해, 하지만 너무 더워. 눕기 전이나 깨어난 후의 나 같은 건 없는 것처럼 아득하게 오래전부터 이 이불속에 있던 존재가 된 기분.


몸과 마음은 정말 가느다란 실로 연결되어 있고 끊어지는 건 찰나구나. 핑, 소리가 선명하다.



2.


스무한살, 생일 선물로 우쿨렐레와 닌텐도를 받았다.


언제나 잡기에 능한 남자에게 끌리는 편으로, 그때 만나던 애는 취미로 바이올린을 켜며 주식에 몰두해 있었다. 비슷한 취미를 즐기기 위해 미취학아동일 때 배우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지만 영 소질이 없었다. 대신 4현짜리 우쿨렐레를 켜보기로 했다. 우쿨렐레는 생긴 것도 소리도 악보표지도 하나같이 우스꽝스럽고 귀여웠다.


경희대 평화의 전당이 내려다 보이던 자취방에서 네 개의 현을 짚었다. 생전 써보지 않았던 손 근육들은 기괴하게 찌그러졌다. 현을 짚는다기 보다 현 위에 손이 뭉개져있는 꼴이었다. 며칠 동안 코드만 겨우 잡아보다 멜로디 비슷한 것은 연주하지도 못했다. 현 네 개로 뭘 하란 말이야, 하고 우쿨렐레를 살며시 내동댕이쳤다. 잘하지 못하는 걸 견디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한 때였다. 현 위를 내달리는 연주를 하고 싶은 마음과 현과 기묘한 스킨십만 하고 있는 실력 사이에서 우쿨렐레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다.


그 해 겨울, 런던으로 떠나기 위해 방을 정리하며 우쿨렐레도 자취방 앞 골목길에 버려졌다. 알록달록한 표지의 악보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허접한 나를 견디는 시간을 조율해야 원하는 곳에 겨우 닿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보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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