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떠난 후 집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스러져갔다. 화장실문의 경첩이 녹슬어서 여닫을 때면 구슬프게 흐느꼈다. 주방 수전은 기요틴에 매달린 죄수처럼 축 늘어져있었다. 세면대 방향을 온수로 돌리면 공허한 공기소리만 났다. 동생과 내가 고칠 수 있는 부분은 띄엄띄엄 수리했다. 등기구를 LED로 바꾸고 수건걸이를 스테인리스로 갈았다. 문고리를 바꾸려다 화장실에 갇히기도 했다. '남자가 없는 집'이 낡아가는 속도는 손재주 없는 딸 둘이 수리하는 정도로는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 집은 우리의 첫 집이다. 전세와 월세를 전전하던 우리 가족은 조선업이 호황이던 20년 전쯤, 마침내 이 낡은 아파트를 샀다. 낡고 작은 집에 엄마의 취향을 가득 담아 리모델링해서 이사를 왔다. 베르사유 궁 같은 와인색의 실크벽지, 황금빛 현관타일, 커다란 장미가 그려진 욕실벽. 곰팡이가 피던 집, 화장실이 밖에 있던 집, 집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살던 집들을 지나 마침내 우리의 집. 모든 것이 윤이 났다. 새로 깐 마룻바닥도, 커다란 텔레비전도, 시원한 물도 뜨거운 물도 콸콸 쏟아지던 정수기도.
집을 둘러보던 남자친구의 눈이 가느다래졌다가 동그래졌다가, 세모지게 변한다. 뭔가 고칠 것을 찾았을 때의 표정이다. 쿠팡에서 수전과 실리콘, 방수테이프를 주문한다. 화장실 문을 여닫다 끼리릭 우는 소리에 '흐익?!' 하더니 차로 달려간다. 유려한 유턴으로 도착한 건재상. 어릴 적 아빠와 할머니집을 고치며 종종 다녀간 곳이다. 기다란 배관이나 합판이 잔뜩 쌓여있고 갖가지 공구와 못이 있는 랙이 가득한 건재상이 이상하게 좋았다. 여기를 남자친구와 함께 다시 오다니, 기묘한 노스탤지어에 휩싸인다.
"이지경첩.. 이지경첩.."
미로 같은 랙 사이로 경첩코너를 찾아 우리 집 문에 맞는 경첩을 고른다. 그의 애착 디월트 전동드릴과 함께 돌아오자 엄마는 미심쩍다는 눈빛을 보낸다.
"머.. 업자가..?"
드르륵드르륵, 5분 정도 지나자 몇 년을 구슬피 울던 경첩의 울음이 멈췄다.
"신통하네."
다음은 주방수전. 거위목 수전에서 목을 담당하고 있는 호스 부분이 고장 나서 수전의 헤드는 되는대로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예전에 아빠가 한 번, 내가 한 번 시도해서 교체에 실패하고 다시 원래대로 조립해 놓은 이력이 있다. 싱크대 배관은 세면대 배관보다 복잡한 것이다. 남자친구는 익숙한 듯 배관을 요리조리 끼우더니 우아한 거위수전을 새로 달아준다. 처형 현장 같던 싱크가 고상하게 변한다.
그것이 지난밤의 일이다. 새 수전으로 요리하고 설거지를 하고 아침을 차린 엄마는 혈압을 잰다. 혈압관리를 위해 아침저녁으로 혈압을 재기 때문이다.
"저거 가니까, 속이 다 시원해~ 혈압도 쫌 내리갔네." 하며 깔깔 웃는다. 나도 깔깔 웃는다. 늦잠을 자고 한쪽이 찌그러진 머리로 일어난 남자친구에게도 알려준다. 우리 셋은 깔깔 웃으며 아침을 먹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풍경, 아주 오랜만에 집에서 윤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