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 데이터가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 모르겠네. 아니, 진짜."
한 달 내내 수정과 확인을 거듭하며 취합한 사업계획서였다. 열 번도 넘게 검토하라고 말했는데 본인 파트에 버젓이 틀린 수치를 넣어두고, 팀 회의 때 앵무새처럼 '이 숫자가 여기 왜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반복했다. 열여섯 살이나 차이나는 동료지만 반으로 접어버리고 싶었다. 짜증이 뾰루지처럼 솟았다.
죽은 사체를 좇는 독수리처럼, 타인의 문서를 취합하는 나의 업무 분장은 주무다.
주무는 주요 업무를 줄인 표현인데 보통 총괄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에게 주무라는 말을 앞에 붙인다. 예를 들어 주무 과장, 주무 사무관, 주무 주사 등으로 이야기하는데 이 경우 동일한 직급 또는 직위에서 근평 서열이 높은 사람을 의미한다.
십이 년 차에 접어든 조직 생활, 입사했을 때 세상 무료하고 냉담한 표정으로 책임님들이 하던 그 주무업무를 나도 맡게 되었다. '26년도 사업계획서-수정-예산수정-최종.hwp 같은 파일을 그러모으며 다 타버린 장작처럼 냉담하고 건조해진다.
[금일, 13시] 2월 2주 차 주간업무를 요청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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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업무 작성규칙 안내]
물결표(~) 앞뒤 공백 제거 (예: 1.5.~1.9.)
쌍점(:): 앞은 붙이고 뒤는 띄움 (대상: 실무자)
- 추진일정, - 추진대상, - 주요 내용, - 향후일정, - 협의내용 등 4글자 소제목 우선 사용
매주 기계적으로 뭔가를 요청하는 메일을 쓰고 취합한다. 예닐곱 명이 보낸 각각의 파일은 자간, 장평, 문단간격도 제멋대로다. 과거의 내가 주무님께 보낸 문서들이 얼마나 몹쓸 짓이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책임님, 죄송해요. 제가 디지털 쓰레기를 보냈었군요.
나 몰라라 하고 엉망진창인 문서를 던지는 동료들을 보며 마음의 가시가 돋아나려 했다. 그러나, 이 것은 일이다. 일에는 기분이 좋고 나쁨이 없다. 이쯤에서 생각을 멈추자. 기분 나쁨은 그 자리에 두고 다음으로 가자.
화려한 한글 편집 기술로 문서를 마무리한다. 십여 년 전 책임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계산기를 도로록 도로록 두드려 가며 수치를 더하고 뺀다. 삐죽빼죽하게 나래비 선 문단들을 가지런히 정렬하고 표에 집어넣는다. 귀신같이 자간이 다른 부분을 찾아내 맞춘다. 제법 말쑥해진 기안문을 인쇄해 놓고 퀭해진 눈으로 퇴근한다.
거북목으로 오늘의 피로도 고단함도 지고 가지만, 기분 나쁨은 지고 가지 않는다. 겉으로 은은하게, 속으로 선명해진다. 표창을 받고 승진을 하고 그랬던 시절보다 지금의 내가, 일하는 모습이 더 마음에 든다. 회사에서 두고 갈 것과 가져갈 것을 아는 주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