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살이 10킬로 가까이 불어났다. 연초부터 야심 차게 땀 흘리는 운동은 모두 끊어낸 탓이다. 출퇴근 거리가 멀어졌고 팀은 불안정했고, 업무 강도는 가혹했다. 노동의 시간도 고통스러운데 운동으로 자발적 고통을 불러오고 싶지 않았다.
생존본능은 고통을 최소화하는 일로 집중되었다. 하루 두 시간씩 즐기던 산책도, 옹골찬 열매를 맺는 맛이 있었던 애플워치의 활동링도, 아침저녁으로 식물들과 눈인사를 나누는 일도 멈췄다. 점심은 사무실을 걸어 나가기 귀찮아서 걸렀다. 저녁과 주말은 무엇이든 한집배달로 때웠다. 노력을 요하는 일은 모조리 회피하겠다, 는 일념이었다.
고통을 피하는 일에 집중하면 삶이 흐릿하고 뭉뚝해진다. 이 회피해피본능이 낯설지 않다. 고등학생 때는 공부한다는 핑계로 그 외의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아직 배달의 민족 같은 게 없던 시절, 외출하는 동생이 컵라면을 사서 엘리베이터에 실어 보내주곤 했다. 달리기를 취미로 하고 싶었지만 늘 실패했다.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데 마음속에서 '노력을 안 하는 선택지도 있는데 왜 노력해야 하는데? 내가 왜 노력해야 하는데?'라고 뗑깡 부리는 녀석이 있어서. 숨이 차고 땀이 흐르는 고통이 싫었다. 기본적으로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부가적으로 고통을 더하는 것이 있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덕분에 고통에 대한 회피기동이 민첩한 어른이 되었다. 안 힘들 수 있다면 최대한 안 힘들 수 있는 길을 택하리. 5분도 걷지 않고 택시를 타고 못하는 요리는 배달음식으로 대신했고, 뭐든 노력이 필요하다면 최대한 멀리하는 반노력적인 삶을 살았다. 게으른 천성에 딱이었다.
고통을 최소화하면 그게 행복일까? 그래서 과연 나는 행복했나? 고통스럽지 않으면 그건 좋은 걸까?
사실은 더 괴로웠다. 손끝 까딱하지 않고 사는데도 불안했다. 고통을 회피하는 동안 고통은 피할 수 있으나, 고통이 오면 내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는 피할 수 없다. 몇 년간 나의 상담을 맡아 주신 선생님은 말했다.
"고통 속에서도 사랑이, 배움이 있어요. 사람은 그래서 아름다워요."
고통 대신 공포를 택하는 일을 멈출 때가 되었다. 삶의 어떤 장면도 또렷하게 바라보며 사랑과 배움을 발견하고 싶다. 굳이 이 날씨에 10킬로를 뚜벅뚜벅 걷고 왔는데 어쩐지 개운해진 것처럼, 내가 찾는 것은 내가 피하는 것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