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좋은 말로 할 때 건강하라고

by 정안



알파 메일 아니고 ‘아파 매일’인 남자친구는 잔병치레가 잦다. 엄마의 긴 투병생활로 가까운 가족이 아픈 것은 나의 발작버튼이다. 사람이 아프면 얼마나 약해지고 외로워지고 추해지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걸 보는 고통이 너무 커서 그냥 내가 아프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다. 어린 시절 한약으로 잔뜩 도핑한 탓에 감기도 걸리지 않는 어른으로 자랐기 때문에 아픈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도 못한다. 가까운 사람이 아프다는 건 손에 잡히고 마음이 아린 실재적 고통이 된다. 아픈 거 정말 싫다.


며칠 동안 의문의 복통을 앓던 남자친구는 병원에서 ‘게실염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들었다. 퇴근길 3호선에서 그 말을 듣자 누군가 마음의 돌무더미에서 작은 돌을 굴러 떨어졌다. 마음 어디선가 우르르 돌무더미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음의 낙석주의보.


쿵.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다들 아픈가.

쿵. 왜 다들 아프기만 하고 나는 늘 괜찮아야 하는가.

쿵. 나는 왜 안 아픈가. 차라리 나도 아프고 싶다.

쿵. 그러니까 마라탕 먹지 말라니까.


이런 마음들이 바위처럼 쿵쿵 떨어졌다. 몸은 3호선의 철제 의자 위에 얌전히 앉아있었지만 마음의 갱도는 빠르게 붕괴하고 있었다. 말이 없어진 나를 데리러 역으로 달려 나온 남자친구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웠다.


“내가 아파서.. 미안해. “


마지막 다이너마이트다. 아픈 사람에게 사과까지 하게 만드는 상황, 난 정말 쓰레기다. 이제 자폭버튼을 누른다. 소리도 없이 콧물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집으로 걸어갔다. 인생 시나리오의 최종장인 ‘아, 역시 내 인생은 안 돼….’ 트랙이 무한 재생되었다. 남자친구는 넋이 나간 나를 서재에 앉히고 에어컨을 틀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고 들려오는 샤워기의 물소리. 지금 내 억장이 이렇게 와르르 맨션인데에에에에, 샤워를 하다니이 이이 이. 갈색 빈백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아, 역시 내 인생은 안 돼….’


뽀송해진 남자친구가 도도도 집을 걸어 다니니 산뜻한 유칼립투스향이 퍼졌다. 와중에 개운하겠구나, 으어어어 엉. 부엌에서 남자친구가 뭔가 씻고 썰고 뚜껑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와중에 밥을 먹나 봐, 으어어어엉. 아르르,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컵에 꾸덕한 액체를 붓고 블렌더를 탈탈 터는 듯했다. 야무지게 해 먹네, 으어어엉. 눈물이 범람하는 바람에 얼굴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자, 이거 마시자. 좀 달게 했어.”


그가 내민 건 수박주스다. 왕년에 방배동에서 과일주스로 날렸던 그의 수박주스는 진짜 맛있다. 수박과 파인애플을 함께 갈고 설탕으로 당도를 맞춘다. 시럽에 비할 수 없는 깔끔한 단맛이 난다. 그의 수박주스의 킥은 라임즙. 파인애플과 라임즙이 들어간 주스를 먹으면 그간 내가 사마신 것들은 수박주스 호소인이었구나, 하고 눈이 번쩍 한다. 바로 그 수박주스. 시뻘게진 얼굴로 끅끅 거리며 못 이기는 척 수박주스를 한 모음 들이켰다.


“마딛다…”

“자기는 마음을 정리해서 말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잖아. 그래서 샤워하고 달달한 거 만들어 왔지.”


코가 꽉 막혔지만 달고 상큼한 수박주스는 전두엽을 흔들어 깨운다. 내가 지금 이럴 것까진 없지 않나, 하고 머쓱하게 전두엽이 뗑깡부리기를 멈춘다. 가동을 멈췄던 이성이 하고 싶은 말들을 꿰어가 본다.


“끅, 좋은 말로 할 때 건강하라고. 아프지 말라고. 건강하게 살다가 한날한시에 자다가 가자고. 나는 왜 안 아프냐고. 나도 아프고 싶다고!!”

“응… 그게 무슨 말이니…”


그다지 이성적인 말은 아니지만, 남자친구가 아픈 게 속상하고 무서웠다.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지만 아픈 사람 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보게 될까 봐, 누군가 떠난 자리에 혼자 남겨질까 봐 공포에 질렸다. 수박주스는 정신이 번쩍 들만큼 달고 시원해서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 무섭다고. 좋은 말로 할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분홍빛 수박주스를 탈탈 털어 넣고 나니 웃기기 시작했다. 둘이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웃지 마, 내가 먼저 죽으면 순장할 거야!”라고 빽 소리도 질러보며 남자친구에게 엄포를 놓았다. 앞으로 다가오는 많은 여름마다 수박주스 셔틀이 되어줘.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17화현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