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어느덧 육아 7년차 대디가 되었다.
그 사이 첫째는 유치원에 입학하였고, 둘째는 아장아장 걷는 것을 넘어 뛰어다니고 조금 더 있으면 공도 찰 기세다.
아가들만 자라는 게 아니다. 그만큼 아빠 엄마의 나이도 먹어간다. 어느새 이 철없는 애비는 인생에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마흔 줄에 입성하고 말았다. 나름 동안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얼굴은 거스를 수 없는 중력의 힘에 이끌려 축 처지고 유분이 떠나간 피부는 퍼석해졌다.
아기를 키우면서 그나마 정신의 나이는 유지가 되고 있다. 아기들과 정신연령이 별반 차이가 없는 까닭이다. 특히 첫째는 아빠와 기질과 성향이 꼭 닮았다. 실외보다는 실내를 좋아하며(쉽게 말해 집순이다), 어릴 적 아빠를 보듯 그림과 만들기를 좋아한다. 그러다 예술 쪽으로 빠질까 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지만, 닮은 쪽이 이쁜 건 부인하기 어렵다.
아기들을 키운 건 팔 할이 애엄마라는 생각이다. 어디 팔 할뿐이랴. 팔쩜오, 아니 구 할은 될 듯하다.
삼십 대 초중반에 처음 아빠가 되고 나서는 '암, 이 정도면 공동 육아지' 하는 오만함(?)도 가졌다. 실제로 지금보다 더 육아에 노력했던 것 같기도 하고.
돌이켜 보면 역시나 오만이었다. 당시 육아라고 해봤자(요즘도 그렇지만) 아기와 놀아주는 것 따위가 전부였다. 물론 놀아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보통 힘든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 행위가 육아의 대부분이라고 여겼던 착각에 있다.
그렇다고 놀아만 준 것은 전연 아니다. 아기 분유를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거나, 달래거나, 재우거나 등등 많은 육아의 부분들을 수행했다.
다만 그것조차 지나 보니 엄마가 하는 육아에 비해서는 아주 미미한 부분이더라. 예를 들어 나는 아기 목욕을 잘 못 시키는 편이다. 몸은 어떻게든 하겠는데, 머리 감기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샴푸가 아기 눈을 따갑게 할까 봐 매번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엄마에게 맡기기로 했다. 애엄마와 부부싸움을 할 때면 단골로 듣는 레퍼토리는 "아기 목욕도 제대로 못 시키면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노력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니, 그런 핀잔을 들을 때면 일면 서러움도 든다.
남편들이 육아에 갖는 흔한 착각은 아기와 놀아주는 게 육아의 전부인 양 구는 태도다. 성급한 일반화는 아니나, 여기서 말하고픈 핵심 대목은 육아를 바라보는 어레인지의 차이가 엄마와 대단히 크다는 점이다.
엄마의 육아는 포괄적이다. 하나의 우주다. 반면 아빠의 육아는 국소적이다. 우주를 떠도는 행성 몇 개, 조금 더 쳐주자면 블랙홀에 지나지 않는다. 대다수의 엄마들은 일거수일투족을 아기들과 함께한다. 설령 아빠에게 아기들을 맡기더라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떠나보낼 길이 없다.
아빠들은 육아를 바라보는 관점이 엄마와는 다르다. 태초에 아기들과 24시간 붙어 있는 존재가 아니었거니와, 아기 출산 이후로도 그럴 만한 후천적 환경 속에 놓여 있지가 않다. 극단적으로 말해 엄마가 아기를 버리고 떠나지 않는 이상, 아빠가 아기를 100% 볼 수 있는 환경적 토대는 현실적으로 마련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그런 상황이나 현실을 당연시 여기는 태도로 육아를 한다면, 그 뻔뻔함에 아내에게 한소리 듣기 십상이니, 육아에 대한 상기 인식 차이 자체는 알고 행동하기를 권한다.
아기의 머리에 장비를 채우고 샴푸를 씻겨내면서, 도무지 넘기려 하지 않는 아침밥을 한 달 중에 하루 정도 차리고 수 차례 떠먹여 보면서, 애 둘을 데리고 병원에서 두세 시간을 보내 보면서, 이 철부지 아빠는 남편들이 경험하는 육아의 유니버스가 엄마들이 클리어하는 무수한 육아 미션 중에 일부분에 불과함을 느낀다. 아가들 깨기 두 시간 전이니 얼른 글을 마무리하고 뭐라도 거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