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기 중독에 걸리는지 알겠다
2017년에 첫째를 낳았고, 2021년에는 둘째가 생겼다.
첫째인 딸을 키우면서 '딸바보'라는 말이 왜 생긴 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첫째가 아들이었다면 이보다 예뻤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반문하자 그렇다라고 하지 못하겠더라.
그리고 4년 뒤 둘째를 낳았다. 첫째가 딸이어서 둘째는 부담이 덜했다. 아들이면 자녀 성별이 각기 달라 소위 말하는 이상적인 딸-아들 조합이 형성될 터였고, 딸이라도 어여쁜 딸이 둘씩이나 생기게 되므로 큰 상관은 없었다. 다만 내심 같은 성별이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아들 쪽에 마음이 더 쏠리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아들을 갖게 되었는데, 솔직히 딸인 첫째 사랑에 당최 따라가지 못할 줄 알았다. 아들은 그냥 아들일 뿐이겠지,라는 무덤덤하고 막연한 생각만 갖고 살아왔었다.
그런데 왠 걸. 이 아들놈이 내뿜는 애교와 귀여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첫째 아이는 예민하고 까칠한 구석이 있다. 어린이집 적응은 훌륭하게 잘 해냈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낯을 많이 가린다. 지금도 매일 저녁만 되면 어린이집 안 간다고 지 엄마한테 떼를 쓴다. 동성끼리의 신경전(?) 누그러 뜨리기 위해 아빠인 내가 나서서 엄마와 딸을 강제 격리(?)시켜 놓고 딸아이에게 포옹해주고는 한다.
둘째는 이제 돌 하고도 반년 정도를 향해가는 만 1세짜리 세 살 배기인데, 위 같은 사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기 걸음마로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생글방글 웃기만 한다. 지 엄마아빠 닮아서 이따금씩 부모도 깜짝 놀라게 하는 성질을 부리는 데 대체적으로 잠도 잘 자고 온순한 편이다.
이 두 아가가 주는 사랑의 충만감은 살면서 전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다. 아가의 사랑은 이성과의 사랑이나 가족과의 사랑과는 또 다른 차원의 느낌이다.
초저녁 어스름 고된 육신을 이끌고 현관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를 때면, 아직 제 대소변도 잘 못 가리는(물론 첫째는 아니다) 두 똥강아지들이 그 작은 삑삑 소리들을 어떻게들 들었는지 철문 안에서부터 "아빠~!"라고 외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온다.
이럴 때면 어깨를 짓누르는 가장의 책임감과 심신의 피로란 십리도 못 가 녹아내리는 눈처럼 구차해진 것이 된다. 두 팔 벌려 첫째를 안아주고 뒤이어 달려온 둘째까지 안아주고 나면 직장에서 구겨졌던 존재의 가치는 비로소 되살아난다.
아기가 부모에게 주는 사랑은 하늘에서 갓 형성되어 떨어지기 시작한 초결정체의 눈 같다. 이 사랑엔 조건이 없다. 그저 자기를 끌어당기는 중력에 인도에 따라 부모 마음속 소복이 내려 쌓인다.
오늘도 두 아이를 안았다. 저그 엄마와 아침부터 팽팽한 기싸움을 펼친 예민한 감수성의 첫째는 더 애틋하게 안아준다. 엄마가 잔소리를 하거나 눈살을 보낼 때는 부녀 간에 눈빛이 빠르게 교환되어 서로의 두 손가락으로 악마의 뿔 모양을 만든다. 우리 부녀의 마음속 엄마는 마녀와 천사 두 종류가 있다.
아직 멋모를 둘째는 솜털같이 가벼운 탓에 힘껏 안아 들어 올린다. 그리고 고 앙증맞은 우윳빛 볼을 마치 빨아 마시기라도 할 태세로 뽀뽀해 준다. 그럴 때면 녀석은 귤 크기나 될까 말까 한 두 주먹으로 자기의 볼을 방어한다.
하루 두 번 시작되는 아기들과의 만남은 매일 같이 설렌다. 아침에는 인형들이 뽈뽈거리며 걸어 다니는 모습이 아빠 미소를 절로 지어지게 하고, 오후에는 아빠라는 존재와 가치를 누구보다도 더 알아봐 주는 두 어린것들의 원초적 행위로 인해,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어설픈 아빠 노릇을 해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