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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Mar 13. 2016

끝까지 가야만 할 때

<달콤한 인생>





1950년대 초반, 미국의 한 사이비 교주가 중대 발표를 한다. 지구의 종말을 예언한 것이다.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꼬집은 그 종말론의 핵심은 '진정한 믿음의 신도들만 비행접시로 구출된다'는 것이다. 참 대담도 무쌍하다.

신도들은 난리가 났다. 하나 같이 자신의 직장을 퇴직하고, 삶의 터전을 정리했다. 모든 재산을 이 종교 단체에 기부했다. '진정한 믿음'을 보여줬다. 그들은 몇 벌의 여벌 옷만 챙겨 정해진 건물로 모여들었다. 교주의 사기극이 자명한 상황이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가엽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구원의 날이 다가왔다. 신도들은 건물 내부에서 비행접시를 기다렸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 벌벌 떨고 있는 사람.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한 사람. 그 모습 가관이었지만 당사자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종말이 코앞인데 뭐가 중요하리.

드디어 교주가 예언한 종말의 시간이 됐다. 문틈으로 강렬한 불빛이 스며든다. 성질 급한 몇몇이 황급히 문을 연다.

종말은 없었다.

불빛은 건물 주위로 모여든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였다. 교주가 말한 대홍수나 비행접시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뻔스러운 교주, 도망치기는커녕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화끈하고 참신한 중대발표를 한다.

"신도 여러분들의 강한 믿음에 대한 보답으로 전 세계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신도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기뻐하며 축제를 벌였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합리화(rationalization)'는 방어기제의 유형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용어가 아닐까 합니다. '타인이 받아들이기 힘들 만한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유를 설명하는 것, 죄책감을 덜기 위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쉽게는 '변명'이라고도 할 수 있죠. 매번 금연에 실패하며 "내가 담배를 못 끊는 이유는 주변에서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면 우린 어렵지 않게 이 개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건 네가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이처럼 익숙한 합리화의 개념 속에는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하는 핵심 과정이 숨어있습니다. 인지부조화는 '개인의 태도나 신념 간에 또는 그 결과와의 불일치가 있을 때 그 태도나 신념을 변화시키는 현상'으로써, 합리화가 일어나는 일종의 과정을 설명하는 심리학 개념입니다. 오늘도 역시, 심리학은 말을 어렵게 하네요. 위의 '사이비 교주 사건'을 예로 좀 더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는 사이비 단체의 신도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비행접시만을 기다렸던 그들은 '예언이 틀렸다'는 분명하고 간결한 결론 대신 '내 믿음이 전 세계를 구원했다'는 불분명하고 복잡한 결론을 선택했으니까요. 그 순간을 위해 집과 일터, 심지어 가족까지 포기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주위의 지인들에게 결의에 찬 눈으로 확언도 했겠죠. 그렇게 냄새나는 음산한 건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언이 틀렸다'는 사실은 그들이 투자했던 모든 것들을 무가치하게 바꿔 놓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선택을 하면 결과는 달라집니다. 그들은 교주를 믿기로 합니다. 이로써 사이비 교주에게 놀아난 바보가 아닌, '독실한 믿음으로 지구를 구원한 위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페스팅거는 그들의 태도 변화 속에서 인지부조화를 발견했습니다.


쉽게 말해, 인지부조화는 '선택의 결과가 기대와 다를 때 일어나는 태도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소개팅남에게 차인 친구가 '사실 나도 상대가 맘에 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원치 않게 군대에 다녀온 후 '남자라면 군대는 다녀와야지'라고 하는 것, 금주한다던 아빠가 술을 마시며 그 장점들을 나열하는 것, 홈쇼핑에서 러닝머신을 구매한 엄마가 그것이 빨래걸이 역할을 톡톡히 한다고 좋아하시는 것 등, 인지부조화는 일상의 곳곳에 숨어있습니다.


내 연락을 피했다 이거지...



페스팅거의 인지부조화 실험


종말론 소동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페스팅거 박사는 인지부조화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기발한 실험을 계획했습니다. 매력적이던 소개팅남이 내 연락에 침묵으로 응수하는 순간부터 '천하의 쌍놈'으로 바뀌는 것처럼 공감 가능한 수준의 실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인지부조화 과정에서 얼마나 비상식적인 판단을 하는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박사의 괴상한 실험을 참가자의 관점에서 한번 볼까요?





"연구를 도울 사람이 필요하니, 지원할 학생은 교수 연구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보수도 있습니다."

페스팅거는 심리학계에서 저명한 학자다. 그의 연구를 지원한다는 것은 심리학 전공자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연구 경험도 쌓고, 심지어 용돈 벌이도 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기회를 쟁취한 행운의 학생이 설레는 마음으로 페스팅거 박사의 연구실을 찾았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폐기 필름을 처분하는 단순 노동이었다. 폐기할 필름을 상자에 담아서 쓰레기장으로 옮기는, 기대와 전혀 다를뿐더러 재미도 보람도 없는 지루한 일이었다. 왠지 불편한 기분에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는 꾹 참고 할당된 업무를 진행했다.


일이 끝나자 조교가 다가와서는 조금 난해한 부탁을 한다.

“이제 곧 다음 학생이 같은 업무를 하기 위해서 오는데, 그 학생에게 이 일이 재미있었다고 얘기해 주시겠어요?”

뻥을 쳐달란다! 교수님도 바라신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음 학생이 들어온다.

“무슨 연구해요? 어려워요? 재밌어요?”

그가 설레는 맘 숨기지 못하고 초롱 거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답한다.

“뭐, 할만해요~ 나름 재미도 있고.”

젠장. 거짓말을 했다. 찝찝한 기분이 든다. 조교는 그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수금만 주고는 사라진다. 연구실을 나와 집을 향해 몇 발자국 뻗었을까. 누군가가 다가온다. 잠시 인터뷰를 하겠다는 그가 질문한다.

"방금 했던 연구 지원일 어떠셨어요?"






페스팅거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위의 사건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단을 둘로 나누어 보수를 달리 지급했습니다. A집단에는 1달러를, B집단에게는 20달러를 지급했죠. 그리고 자신이 했던 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비교해봤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돈을 많이 받은($20) 학생들이 일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할 것 같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돈을 적게 받은($1) 학생들의 대부분이 ‘일이 참 보람찼다’고 대답했고, 돈을 많이 받은($20) 학생들은 ‘일이 지루하고 재미없었다’고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그들의 반응 속에 페스팅거 박사가 증명하고자 했던 인지부조화가 숨어있습니다.


학생들은 연구지원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연구경험과 물질적 보상'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예상 밖의 지루한 업무와 더불어 원치 않던 거짓말까지 했죠.


넉넉한 보수를 받은 학생들은 돈을 벌기 위해 '원치 않는' 업무를 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때문에 그 일을 지원하며 기대했던 경험이나 보람에 대한 가치는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합니다. 분명 그 경험 자체도 어떤 보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납득 가능한, 상식적인 수준의 인지부조화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거짓말했다는 사실도 쿨하게 인정합니다. 거짓말 행위에 대해서도 '별 일 아닌 것'으로 그 가치를 낮게 조정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거짓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이지만 20달러를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적은 보수를 받은 학생들은 보다 비상식적이고 강력한 인지부조화를 경험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고작 1달러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 심지어 거짓말까지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일이 정말 보람찼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나는 거짓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인데 거짓말을 했다. 고작 1달러 때문에? 그럴 리 없다. 나는 1달러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나는 사실 그 일이 정말 재미있고 보람찼다."


그들은 결과에 따라 자신의 경험에 대한 태도를 바꿨습니다. 같은 경험을 했음에도 서로 상반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는 이상 모르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이처럼 인지부조화는 인간의 탄력적인 사고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글로 풀어놓고 보면 저 어딘가에 껴들어서 '너 사실 그 일이 보람차지 않았잖아ㅋ'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상 그 모든 판단은 몇 초 안에 일어나는 셈입니다. 즉, 나 역시도 B집단($1)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면 동일한 판단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도 모르게 '인지부조화의 늪'에 빠지고 있습니다.


드루와


자, 인지부조화는 그것이 중요한 선택이나 결과와 연결될 때 일어날 확률이 더 높다고 하는데요.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는 찰나의 선택으로 인해 목숨을 걸고 서로를 파멸시키는 두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그 이유는 잘 모르는 것 같네요. 같은 행위, 상이한 판단, 그 판단을 믿고 끝까지 가고야 마는 두 남자의 모습에서 인지부조화의 사례를 찾아보겠습니다.



달콤한 인생



영화 <달콤한 인생>은 한국 누아르 물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남자라면 한 번쯤 극 중 김선우(이병헌 분)를 본 후 장롱 속에서 숙성되고 있던 검은 정장을 꺼내 입었을 것입니다. 거울 속에서 미간도 구겨보고 그렇게 잠자고 있던 수컷의 참멋을 확인하려 했겠죠. 집을 나서면 듣게 되는 소리는 빤합니다. "오늘 상집 가요?"



순박한 남정네들 홀려 '상집 가는 남자'로 만들었던 김선우, 그는 소위 '김실장'으로 불리며, 보스인 강 사장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2인자입니다.


어느 날 강 사장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민을 선우에게 털어놓습니다. 그의 젊은 애인인 희수에게 다른 애인이 생겼는지 의심된다는 것이었죠. "둘이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면 통 견딜 수가 없단 말이지." 보스는 자신이 상하이 출장을 다녀오는 3일간 선우에게 희수를 보살펴달라고 합니다. 혹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있을 경우 둘 다 처단하라는 명령과 함께.


그러나 선우는 보스의 지시사항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합니다. 희수와 남친이 함께 있는 현장을 급습했지만 그들을 살려주기로 하죠. 냉철한 완벽주의자 선우, 짧은 사이에 희수와 정이 든 걸까요. 그 사건을 계기로 선우와 강 사장은 끝을 알 수 없는 자존심 대결을 하며 서로를 파멸시킵니다.


인지부조화는 다음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요.

1. 바라는 어떤 것을 이루기 어려울 때 그것의 가치를 낮추는 것 (소개팅 후 "나도 걔 별로였어.")

2.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인정해야만 할 때 그것의 가치를 높이는 것 (.$1 학생 "그 일 보람찼어.")


자신의 오른팔을 무자비하게 떼어버린 강 사장은 1번 케이스에 해당하고, 목숨을 걸고 그에게 복수하는 선우는 2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 사장과 김선우의 이야기를 통해 두 가지 유형의 인지부조화를 대조해보겠습니다.



자신의 오른팔을 떼어버린 남자, 강 사장


그는 자신의 명령을 어긴 선우를 철저하게 짓밟았다. 전국구 조직의 보스인 강 사장이기에 가능했다. 평소 선우에게 앙금을 품고 있던 타 조직을 활용하여 그를 손쉽게 제압했다. 강 사장은 자신의 충신이었던 선우에게 왜 명령을 어겼는지 물었다.


"뭐야, 뭣 때문에 그런 실수를 한 거야."


선우는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답했다. 강 사장이 원하는 답이 아니다.


"너, 그 애 때문이냐?"


결국 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나 자신이 왜 그런 일을 당하는지 알 길 없던 선우는 예상 밖의 질문에 오히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선우는 자신의 어떤 실수든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그가 보고 느꼈던 진실을 강 사장의 속이 시원해지도록 들려줘야 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애인 한 번 사귄 적 없는 냉혈한 선우다. 고작 외도녀 때문에 자신을 그 꼴로 만든 강 사장의 병든 순정을 이해할리 없다. 한 가지 생각만 머리에 맴돌 뿐이다. ‘살아 돌아가야 한다.’



선우의 탈출 소식을 접한 강 사장은 혼란에 빠졌다. 거대 조직의 수장 자리에 앉기까지 수많은 고비를 넘어왔다. 자신의 판단력이 매섭고 노련하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의 판단이 틀렸다. 알고 싶었던 진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7년간 몸 바친 충신을 잃었다. 오히려 그 충신은 이제 강 사장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먼저 처단해야 한다. 그런데 왠지 불편한 기분이 든다. 집에 있는 아내와 자식들도 아닌, 젊은 애인과의 해프닝 때문에 이런 사단을 벌이게 됐단 말인가.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강 사장은 그의 오른팔이었던 선우가 원래부터 배신 가능성이 있었던 천하의 쌍놈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다른 조직의 우두머리들을 소집하여 선우를 배신자로 몰았다. 무게를 잔뜩 잡고는 조직의 존속성과 대의명분까지 들먹이며 배신자의 처단을 요구한다. "그 친구 평판이 되게 좋던데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회의가 끝난 후 우두머리 중 한 명이 물었다. 강 사장은 대답은 간결하다.


"제가 사람을 잘못 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이젠 그 이유가 중요하지 않아요."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 남자, 선우


조직의 2인자, 김선우. 불과 얼마 전까지 그는 최고급 호텔의 스카이라운지 매니저였다. 도심의 야경을 바닥에 두고 달콤한 케이크를 떠먹었다. 일과가 끝나면 자신의 정돈된 오피스텔로 돌아와 단잠을 청한다. 그는 규칙적이고 냉철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잃었다.


그것이 땅거미인지 몸에 감겨있는 칠흑 색의 양복인지 알 수 없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심야, 선우는 수십 명의 조직원들에게 둘러싸였다. 끔찍한 시간이 이어진다. 살고 싶은지조차 느끼기 어려울 만큼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보스인 강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선우의 반응에 별 소득이 없자, 강 사장은 그곳의 조직원들에게 무덤 자리를 파라고 명했다. 선우는 그 자리가 자신의 것이라고 직감했다. 사신의 차가운 그림자가 발바닥을 적셨다. 선우는 천천히 생각을 고르며 수화기 너머 강 사장의 말을 곱씹었다. 그 의미를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여자 때문이었다.


지난 7년 간 강 사장을 위해 헌신했다. 다른 조직에서 수많은 위기와 기회를 보냈다. 위기가 왔을 때는 강 사장을 내 목숨처럼 지켰다. 기회가 왔을 때는 눈을 감고 물렀다. 단 한 번도 보스인 강 사장에 대한 배신을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런 자신이 아주 작은, 단 한 번의 실수로 이 지경이 되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선우의 몸에 있는 수많은 흉터는 험난했던 조직생활의 대변자이다. 그는 지난 시간 동안 쌓았던 모든 경험을 동원하여 자신의 무덤이 될 수도 있었던 곳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남아있는 모든 감각과 인맥을 동원하여 강 사장에 대한 복수를 시도했다. 쉽지 않았다. 총에 맞을 뻔했다. 수어 번 칼에 찔렸다. 사신이 마른 입맛을 다시며 따라왔다. 지난번엔 실패했지만 오늘은 데려가겠다고. 선우가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꼭 확인할 게 있다고.


결국 선우는 강 사장을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이 속내를 알기 어려운 얼굴로 마주 선다. 망치질을 해도 깨지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질문은 던졌지만 그 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차분한 기분이 든다. 모든 것을 걸고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돌아갈 곳은 없다. 선우는 강 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자신도 누군가의 총알을 받아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마지막 순간, 선우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이토록이나 지켜내려 했던 건 그녀와의 따뜻했던 찰나 일지 모른다. 진심으로 좋아했던 걸까. 그렇게 마지막 백일몽을 꾼다.




마치며 - 포기하는 용기


선우의 망설임은 나비효과처럼 거대한 파멸을 몰고 왔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비추었지만, 어쩌면 그 시작은 자신의 비밀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아야겠다고 생각한 강 사장으로부터 였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선택을 했습니다. 강 사장은 선우에게 자신의 비밀을 얘기했고 선우는 희수를 살려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선택이 어떤 의미인지 확인하기 위해 꽤 멀고 거친 길을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화를 합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꽤 오랫동안 유행어처럼 회자되었던 이들의 대화에는 어딘가 알맹이가 없어 보입니다. 서로에게 뱉었지만 마치 상대방의 어깨너머 어딘가로 던져버린 듯하죠. 선우는 강 사장이 자신을 파멸시킨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사실을 고하며 사과할 리 없다는 것도 말이죠. 강 사장 역시 모욕감을 준 대상이 선우가 아닌 희수였다는 것, 그리고 선우가 강 사장의 오판을 덮어주며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그들은 진실을 택하지 않습니다. 강 사장은 조직의 배신자를 처단하는 리더가 되었고, 선우는 백일몽 속 여인을 위해 목숨 바친 기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최후를 맞이합니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지부조화는 그것이 중요한 선택이나 결과와 연결될 때 일어날 확률이 높으며 자연스러운 사고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정신을 번쩍 차릴 필요도 있어 보입니다.


"끝까지 가보는 거야." 선우와 강 사장이 공통적으로 뱉은 말입니다. 두 사람은 자신만의 중요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인지부조화를 겪었으며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항상 끝장을 보는 것만이 능사일까요. 강 사장과 선우가 잠시라도 숨을 골랐다면 그들의 최후는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도전'의 중요성이 강조 혹은 강요되는 요즘입니다. 특히나 청년들은 그런 나이가 마치 하나의 직책인 것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도전에 대한 압박을 받습니다. "일단 시작한 일은 고통이 따르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내야 한다." 도전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데 있어서 '끈기'가 중요한 가치라고도 합니다.


계속 가!


도전을 하고 그 길을 걸어가다 보면, 길을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끈기가 필요한 순간이겠죠. 그런데 끈기와 오기는 다릅니다. 때에 따라서는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끈기 있게 걷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혹은 지나온 끈기의 시간이 아까워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오기에 가깝습니다.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전만큼 포기하는 용기도 중요합니다. 학교 교육이나 자기계발 서적에서는 도전의 가치를 강조하는데 비해 포기의 중요성은 짧고 사소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도전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죠. 잘 버려본 사람만이 잘 사는 방법을 알 듯, 포기를 잘해본 사람이 잘 도전하고 정확한 끈기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닐까요. 도전하는 것만큼 포기하는 것도 연습과 학습이 필요합니다. 포기는 완전한 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포기하는 능력은 '더 나은 도전을 선별하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내가 도전했으니 포기할 권리도 나에게 있습니다. 도전과 성공만으로 다루기엔 인생이 더 많은 것들을 담고 있으니까요. 돌무더기처럼 쌓여있는 도전과제들이 있다면, 오늘 한 두 개쯤 멀리 던져보는 게 어떨까요. 그것과 거리를 두었을 때 비로소 '아, 저랬구나.' 깨닫게 될지 모릅니다. 인지부조화의 늪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다시 도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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