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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19. 2024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거기까지?

새로운 소통의 시대가 도래했다 III


벽으로 들어간 전화선은 나에게 많은 대화를 만들어줬다. 시현이와의 잡담부터 시아와의 밀담까지. 언젠가 벽 속의 전화선들이 실뭉치처럼 꼬여 전화를 못하게 될 거라는 걱정도 했더랬다. 그런데 내 우려와 달리, 그 선의 끝은 어느 날 컴퓨터 속의 모뎀에 도달했다. 컴퓨터에서 전화를 걸 수 있게 된 것이다.


응? 겪어본 적이 없으니 당시엔 그게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컴퓨터에서 뭣하러 전화를 걸지? 전원을 켤 필요도 없고 심지어 무선 기능도 있는 전화기가 더 편한 거 아닌가?


그런데 직접 경험해 보니 이건, 이건 전화 통화가 아니었다.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의 이동이었던 것이다. 그곳엔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


익명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시대


진한 파란색 화면에서 정해진 번호를 입력 후 접속을 시도하면 전화가 걸린다. '걸린다'라고 적은 이유는 내가 직접 번호를 넣는 게 아니고, 컴퓨터가 알아서 전화를 걸기 때문이다. 참고로 당시의 전화기들은 전화번호를 누를 때 각 번호들의 고유한 음들이 들렸는데 컴퓨터에서 걸 때는 그렇지 않았다.


다만 전화가 제대로 걸리면 컴퓨터는 '삐-'라며 자신만의 단단한 발성을 뽐내며 3단 고음을 시전 한다. 그것을 성공하고 나면 주파수가 안 맞는 라디오 같은 소리가 난 후 비로소 컴퓨터 화면이 바뀐다. 접속에 성공한 것이다. 이것들은 차원 이동을 위해 늘 반복되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마치 외계인과 조우하는 것처럼 낯설면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면 저 파란 화면 너머의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안녕하세요'라고 답한다. 나는 상대방이 어디에 있는지 목소리가 어떤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 혹은 진짜 외계인인지, 아무것도 모른다. 오로지 문자의 나열에만 의지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다. 아니, 꼭 서로를 알아갈 필요도 없다. 모르는 사람과 오목을 둘 수 있다. 그러니까 오늘 처음 본, 익명의 사람과 말이다!


심지어 그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내가 머무는 공간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나이, 생김새, 차림새, 성별 등, 기존의 소통 방식으로는 반드시 먼저 알게 되는 것들을 알리지 않아도 됐고, 관계를 맺고 끊는 것이 무척 간편했다.


낯을 많이 가렸던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도 상관없는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끝없이 파란 세상을 떠다녔다. 그것은 일종의 새로운 자유였다.



문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나는 파란 세상에 '전화를 걸어서' 접속했다. 오랜 시간을 머물렀고, 그것은 매일 반복됐다. 당시의 전화는 비용이 실시간으로 발생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PC통신의 경우 '정보이용료'라는 텍스트 분량 기반의 추가 요금이 붙는다.


어느 날 집으로 전화요금 청구서가 도착했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잠시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으셨다. 눈앞에 그려진 숫자를 부인하시는 듯했다. 잠시 후 그것의 의미를 깨닫고는 이쪽을 바라보신다. 다가오신다. 거의, 거의 다 오셨다!


그날 나는 파란색이 되었다.



PC통신, 디지털 시대의 서막


1990년대 초반 등장한 PC통신은 아날로그 선으로 도달한, 최초의 디지털 세계였다. 지금의 웹서비스는 이때 최초의 형상을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시판, 대화방, 자료실, 게임 등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의 커뮤니티를 제공됐으며, 이는 대중에게, 특히 10~20대의 젊은 층에게 ‘디지털에서만 가능한’ 확실한 경험을 선사했다.


여담으로 PC통신의 전성기에는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이렇게 세 가지 서비스가 주축을 이루었다. 그런데 어떤 서비스를 사용하는 가에 따라 그 성향을 나타내는 농담이 있었다. '하이텔 사용자는 늙었고, 나우누리 사용자는 철이 없으며, 천리안 사용자는 돈이 많다'는 것이다.


이유는 별 게 없다. 하이텔은 가장 최초의 서비스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거나 고인물이 주를 이루었고, 반대로 나우누리는 가장 후발주자여서 젊은 층의 뉴비들이 유입되었다. 천리안은, 요금이 비쌌다. 인프라에 투자를 많이 하여 빠른 속도와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했지만 그만큼 비쌌던 것이다. 뭐랄까. 마치 지금의 아이폰, 갤럭시처럼, 비교에서 파생되는 얘깃거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듯하다.



수년간 전성기를 구가하던 PC통신은 1990년대 후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의 보급으로 쇠퇴했다. 전화선에서 LAN선으로 변경되면서 접속 방식도 디지털로 변경되었다. 이는 마치 하나의 돛단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던 개천에 거대한 다리가 생긴 것과 같았다. 나를 수 있는 개수는 물론 그 종류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렇게 다리를 만들기 위한 재료들이 개천 주변에 쌓여갈 때쯤, 나에겐 또 다른 신문물이 찾아왔다.


작고 옹골찬 그 녀석은,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허리춤에 달라붙어서는 다른 잡음과는 섞이지 않는 소리를 냈다. 단조롭지만, 또렷하게 귀에 때려 박히는, 삐삐라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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