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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Feb 12. 2024

둘이서, 은밀하고 위대하게

새로운 소통의 시대가 도래했다 II


그녀는 예뻤다.

이름은 박시아. 도시적인 이름이다. 하얀 피부와 동그란 이마, 그리고 뭉툭한 듯 그 끝이 오뚝한 코를 가졌다. 천 소재의 단아한 머리띠를 자주 했는데, 그 뒤로 갈색 빛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 어깨에 닿을 듯 떨어져 있었다. 웃을 땐 눈동자에 은은한 푸른빛이 감돈다. 머리띠만큼 담백하고 깔끔한 옷들을 자주 입었는데, 그 모습이 ‘시아’라는 도시적인 이름과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분위기가 뭐랄까, 서울 사람 중에서도 더 서울 사람 같았달까.


평소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한 편인데, 친한 친구들과 장난치고 대화를 나눌 때는 비음이 섞인 높은 톤의 웃음소리를 내곤 했다. 그 소리는 밝은 햇살 아래 지저귀는 새소리처럼 나의 귀를 사로잡았다. 웃을 때 그녀의 눈에 맴도는 푸른빛만큼이나 매혹적이다.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와 처음 통화를 하게 된 계기는,

그룹 과제의 역할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필요한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초등학생 중 가장 성숙했다는 6학년의 품격에 맞게 끝인사를 던졌다.


"시, 심심하, 할 때 또, 또 전화해도 대? 돼?"


전화선 너머에서 별빛하나 없는 우주의 침묵이 이어졌다. 얼마 후 그녀는 답했다. "응, 좋아." 그 목소리엔 기쁨과 반가움 같은 게 담겨있었다. 그렇게 내 인생의 첫 썸이 시작되었다!




어렵사리 통화의 기회를 얻었지만...

대단히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전화기의 위치다. 집에는 두 개의 전화기가 있었는데 그 위치가 각각 안방과 거실이었다. 콧물 날리며 뛰놀던 친구와 통화할 때는 위치가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이제 상황이 다르다. 명의 화타도 못 고치는 '중2병 초기'에 '첫사랑의 열병'까지 더해진 합병증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공적인 공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랴.


그래서 금쪽같은 통화의 순간이 왔을 때마다 나의 모든 세포는 극도로 민감해졌다. 마치 국가의 존패가 달린 질문에 답하듯 말 한마디 단어 하나를 고르고 골랐다. 그러면서도 내 목소리를 가족들이 아닌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미세하게 볼륨을 조절했다. 이따금 온 가족이 이 통화에 참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조금이라도 민감한 주제가 나오면 '나도 그래'가 '난 도르래'로, '내일 슈퍼 앞에서 보자'가 '넬라 판타지아'로 들릴 정도로 말을 흘리곤 했다.


“이 밤에 누구랑 통화하는 거야?”


한 번은 야밤에 몰래 통화를 하는데 방에서 주무시는 줄 알았던 어머니께서 거실로 나오셨다. 나는 온몸이 감전된 설치류처럼 깜짝 놀라서 어부버버 하다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참고로 당시엔 밤에 전화가 끊기면 어느 누구도 다시 걸 수 없었다) 나는 갑자기 전화가 끊겨서 그녀가 당황하지는 않았을지, 내일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고민하면서 이불을 몇 번이나 고쳐 덮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말도 안 되는 신문물이 우리 집 거실로 찾아왔다. 전화기인데, 그러니까 전화기인 건데, 그런데 선이 없다. 왜, 어떻게, 어떤 마법으로 이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것은 실재하며 내 눈앞에 있었다. 그 ‘무선 전화기’라는 녀석은 마치 조종 기지에서 대기 중인 로봇처럼 본체에 꽂힌 채 서 있었다. 본체를 끌어안 듯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기존의 유선전화기와는 바이브부터가 다른, 완전히 당당한 느낌으로.


선이 없다는 건 통화 공간의 제약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전화선의 족쇄를 벗고 집 안 어디에서든 통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얘기를 듣고 ‘정말 편해졌군’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면 당신은 T일 것이다. 박시아. 이제 프라이빗한 내 방에서 프라이버시를 보장받으며 그녀와 통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이서, 은밀하게 위대하게! 바야흐로 ‘일대일 통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무선전화기 덕에 그녀와의 대화는 점차 깊어졌다. 고백하건대 학교에서는 그녀의 곁에 다가가지 못했다. 마치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사이처럼 그랬다. 몇 차례 그녀가 웃으며 다가왔지만 나는 제리의 함정에 빠져 쇠망치에 맞은 톰처럼 온몸이 굳은 채 덜컥거렸다.


하지만 무선전화기가 선사한 세계에서는 달랐다. 지켜보는 시선도 방해하는 이도 없는 나만의 공간.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낮은 목소리는 나를 편안하게 했다. 어렵사리 기역과 니은을 뱉을 수 있었다.



심야통화는 무선전화기로 인해 가능해진 또 하나의 혜택이었다. 다만 007 수준의 첩보 작전이 필요하다. 미리 전화할 시간을 정해둔다. 해당 시간이 될 때쯤 날아오는 총알도 잡아낼 것 같은 집중력으로 무선전화기를 잡고 있는다. 통화 버튼에 엄지를 붙여두고 온몸의 신경을 모은다. 전화가 울리는 즉시 통화 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아무리 무선전화기를 빨리 받아도 안방에 있는 유선전화기의 첫 번째 벨소리는 멈추지 않고 쩌렁쩌렁 울리고야 만다.


그래서 성공적으로 전화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바로 대화를 시작해서는 안된다. 숨을 죽이고 안방으로부터의 발소리에 집중한다. 발소리가 안 들린다고 방심해서는 안된다 부모님께서 안방 유선전화기의 수화기를 드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즉시 우리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 통화 중 집안의 다른 수화기가 들렸을 때는 소리의 공간감이 더 생기면서 미세하게 공기의 흐름이 바뀌게 되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이를 놓칠 수 있다. 놓치면 “밤늦게 무슨 통화냐. 얼른 자라.” 와 같은 서늘한 꾸지람이 들리고, 그날 통화는 종 치게 된다. 이처럼 심야의 통화는 난이도가 높고 마음도 졸여야 했다. 그럼에도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렇게 몇 차례 우리는 심야 통화를 했고, 숨을 고르며 밀담을 속삭였다. 내 어설픈 농담에도 그녀는 웃어주었다. 그녀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수화기로부터 멀어지는 소리는 나에게 완벽한 행복감을 주었다.


시간이 흘러, 썸인 줄 알았던 그것은 사랑이 되었다.

첫사랑이라 여겼던 그것은, 짝사랑이었다.


꾸.. 꿈이었나.


일대일 통화의 시대


유선전화기가 한국의 가정집에 대체로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그것이 무선전화기로 대부분 업그레이드된 90년대 초반까지, 80년생은 유년기와 초등학생을 거쳐 청소년기 일부를 보냈다. 사실상 어느 정도 자의식이 생긴 시점에 이미 전화기가 일상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소통 방식에 있어서 최초의 혁신은 무선전화기였다. 대화의 장소를 공유 공간에서 사유의 영역으로 옮겨준 계기. 이로써 그것이 내 방이든 공중전화박스든, 상대방과 내가 온전히 서로에게 집중하여 대화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진 셈이다.


당시의 다른 80년생들도 나처럼 심야 통화를 하거나 007 작전을 펼치진 않았을지 모르지만, 무선전화기를 계기로 누군가와 더 솔직하고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비록 그녀는 무선전화기의 추억과 함께 떠나갔지만, 당시의 경험은 지금의 삶 어딘가에 녹아있다. 새롭게 맞이했던 놀라운 세상으로. 어쩌면 그 시절만 가능했던 추억으로.




덧. '박시아'는 가상의 인물이다. 이야기의 몰입도를 위해 창조했음을 밝힌다. 오늘도 앞으로도 현세를 잘 살아가야 하기에, 꼭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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