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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인은 공감할 수밖에 없다

by 왕고래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피부가 더 얇은 상태로 살았다.
타인의 고난에 더 아파했고, 삶의 기쁨을 대할 때도 그는 더 크게 느꼈다.”

- 에릭 말퍼스, 《길고 긴 춤 Long Long Dance》 中


오랜 벗이 있다.


그와 처음 마주친 건 학창 시절 수업 시간이었다. 중학교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고, 남성으로만 구성된 그곳은 이전과는 다른 다소 거친 느낌의 사회였다. 미묘한 전운이 감도는 공간에서 짧은 머리의 아이들이 저마다의 영역을 구축했다.


어색하게 친해지는 아이들, 종횡무진 교실을 누비며 존재를 알리는 아이들, 서둘러 이빨을 드러내며 위아래를 가르려는 아이들이 보였다. 나 역시 쾌활한 척하며 여물지 않은 초기 분위기에 편승해 봤지만, 여전히 그 사회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내 옆자리의 짝꿍 녀석이 착한 아이이길 바랐다.


그런데 그 녀석이 착한지, 나쁜지, 혹은 무서운지 아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이란 걸 안 했기 때문이다. 어색하게 몇 마디 걸어봤지만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 응 정도로 반응하는 게 전부였다. 아이들은 그를 ‘침묵’이라고 불렀고, 그는 자신의 별명에 응하기라도 하듯 한 학기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와 친해지고 싶었다. 같이 농구를 하기 위해 반나절을 기다린 적도 있다. 나 역시 친구를 만드는 것에 익숙지 않아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가 나를 처음으로 집에 초대했을 때의 감동이 남아 있다. 그렇게 그 녀석은 내 오랜 벗이 되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대단한 이야기든 변변찮은 소리든, 서로의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고 묵묵히 들어줄 수 있는 내 소심한 벗.



# 관계 속에서 더 빛나는 초능력


소심인의 초능력은 관계 속에서 더 빛난다. 자극 민감성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기쁨과 고통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이 장치 덕에, 소심인은 타인에 대해 좀 더 잘 공감할 수밖에 없다.


관계에서 나타나는 소심인의 초능력은 총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가까운 지인 중에 소심인으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대입하며 읽어봐도 좋겠다. 혹 내가 소심인이라면 나의 초능력 수준을 확인해 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1. 상대방의 얘기를 '듣는다'

소심인은 상대방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다. 특히 상대가 ‘내 사람이다’ 싶을 때는 그 집중이 무한히 증가하는데, 내가 뭔가 힘든 일이 있거나 혹은 그저 말이 많이 나와서 끊임없이 단어를 나열하고 있을 때 별다른 트집이나 반응 없이 묵묵히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소심인일 확률이 매우 높다. 묵묵한 모습과 달리, 그는 흘러가는 이야기의 조각조각에 온전히 마음을 쓰고 있는 중이다.


이런 태도는 '타인에 대한 집중과 수용'이 있기에 가능하다. 성인이 된 소심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 윤리관, 의견, 가치, 혹은 외양 등의 면에서 자신과 매우 다르더라도 그들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성장 과정에서 그런 능력을 높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자주 놓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기질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먼저’ 접근이나 노출을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원하든, 원치 않든) 다른 가치나 행동을 일단 듣거나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만큼 타인에 대한 집중과 수용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계기가 늘어난다.


이것을 과연 초능력이라 할 만한지에 대한 의문은 이 능력이 낮은 이들과 대화를 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은 자신과 다른 가치나 생각을 들으면 견디지 못하고 말을 끊는다. 대체로 ‘하고 싶은 말’ 자체를 참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일뿐더러 그것이 상반된 의견일 경우엔 더 그런 것이다. 꼭 반박이 아니더라도, 자신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주제가 들리면 길에서 스쳤던 가게의 간판이라도 연결하며 입을 연다. 자신의 다른 얘기들과 함께.


"아! 나 그거 알아. 내가 어제 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때 좀 배가 고팠거든? 아니다. 간식을 먹은 뒤였나? 아무튼. 날씨가 추워서 감기 기운이 있는데 그래도 운동은 쉬면 안 되지 생각하면서 헬스장으로 가고 있었는데 네가 방금 말했던 그 햄버거 가게가 보이는 거야. 어? 아~ 햄버거 가게 얘기가 아니었어? 근데 거기 줄을 꽤 서있더라고. 운동 끝나고 포장해서 먹어봐야겠다. 포장도 똑같이 줄 서야겠지? 그건 좀 귀찮은데."



2. 공감한다

공감은 소심인의 가장 대표적이고 일반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타인의 고통이나 즐거움에 대해 내 몸이 체감하고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의 반복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성향이 발달한다.


공감 능력이 잘 발달한 사람은 타인의 감정에 대해 진지하고 섬세하게 고려한다. 이는 ‘잘 반응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상대의 경험이나 감정을 나의 일처럼 잘 흡수하는 것을 뜻한다.


이따금 공감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짜?”, “말도 안 돼”, “그 인간 완전 엉망이네” 등과 같은 리액션만 하는 경우가 있는데 화자의 입장에선 이야기가 헛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다. 화자가 소심인이라면 더더욱, 상대의 반응을 오히려 과장되게 느낀다. 더 이상의 얘기를 고민하게 된다.



3. 신중하게 표현한다

소심인은 상처와 고통에 민감하다. 그런 경험을 싫어하므로 타인에게도 상처가 될 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상대를 잘 격려하고 위로하고자 한다. 자신 역시 그런 관계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따금 타인의 취향에 대해 “나는 그거 싫더라”라고 습관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있는데, 소심인의 입장에서는 관계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다. 혹 누군가 자신과는 다른 생각을 말하더라도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반대 의견을 꺼내지 않는다.


이처럼 소심인은 내가 돋보이는 것보다 관계가 더 잘 정립되거나 원활하게 유지되는 것을 위해 애쓴다. 소심인 중엔 유독 얼굴이 빨개지거나 잘 당황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관계에 대한 신중함을 담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상대의 입장이나 판단을 배려하고 원활한 관계를 고려하는 과정의 일부인 셈이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당황할 일도 없다. 스스로에겐 당황스러운 그 경험이 아이러니하게 그 관계의 화합을 증진해주기도 한다.



4. 정성을 다한다

친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반면에 한번 마음을 연 상대에게는 정성을 다한다.


관계라는 게 서로 좋게만 대한다고 유지되는 건 아니듯, 갈등이나 부정적인 상황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숙제도 남는다. 이 역시 소심인은 자비심이 높고 관대하여 관계에서의 갈등을 소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소심인은 상대가 날 안 좋게 대하거나 상처를 주었다 고 해서 그것을 갚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즉, 복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그것을 극복하거나 위로하며 좀 더 나은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경향을 보인다. 소심인이 누군가와의 관계를 끝냈다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5. 비밀을 지킨다

기질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어려운 소심인은 누군가의 비밀을 들었을 때 그것이 굉장히 어렵게 꺼낸 얘기라고 생각하며, 비밀로 유지하는 것을 인생의 업처럼 중요하게 여긴다.


단순히 입이 무겁다기보다는 모든 경우에 ‘공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려는 태도의 일환이다. 그 비밀은 내가 아닌 ‘소유자’의 것이고, 내가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건 타인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행동인 셈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나에 대한 비밀뿐이다.


반대의 성향으로,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거나 목적을 달성해야 할 때 유연하고 편파적으로 접근하곤 한다. 누군가의 치명적인 이야기를 상황에 따라 폭로하기도 하며, 관계가 틀어지면 새로운 관계 속에서 이 전 상대의 비밀을 공유하기도 한다.


소심인의 귀로 들어간 비밀은 입으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오히려 굳게 지키고 있던 비밀을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어 당황하는 일이 더 많다. 혹은 ‘이거 김 대리가 나한테만 해준 얘긴데’라며 이미 알고 있는 비밀을 제삼자가 다시 알려줄 때도 있다. 그럴 땐 또 처음 듣는 척, 그 비밀을 온전히 받아낸다.



#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이유


오랜 벗이 있다.


그와 처음 마주친 건 학창 시절 수업 시간이었다. 수십 년에 걸쳐 천천히, 가장 가까운 벗이 되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대단한 이야기든 변변찮은 소리든 서로의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고 묵묵히 들어줄 수 있는, 내 소심한 벗.


자주 통화하거나 만나지 않는다. 하지만 만나고자 할 땐 어떤 마음의 준비도 필요 없다. 그저 만나서 무언가 먹으며 대화를 한다. 아무 말이 없을 때도 있다.


괜찮다. 내가 뭔가 얘기하면 그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준다. 나 역시 그렇다. 시원하게 반응하지 않지만 이어지는 얘기엔 깊은 공감과 고민이 담겨 있다. 그 시간이 휴식과 위로를 준다. 언젠가 삶에 지쳐서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모든 고통과 감정을 그에게 쏟아냈다. 그런데 섭섭할 정도로 담담하게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십수 년이 지나서야 그가 당시의 얘기를 한다. 그때 너무 힘들어 보여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고.


난 그에 비해 좀 더 가볍고 미숙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몇 차례 그에게 실수를 했다.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 것처럼, 적어도 내가 그렇게 받아들이길 원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 배려가 날 더 부끄럽게 했다.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친구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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