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P. PPT 라구요?
나는 그저 스타트업일 뿐인데요...
파워포인트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파워포인트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인 사고를 가진 꼰대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효율적인 도구tool라는 이유에서이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현대카드의 정태영 부회장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 나서서 반反 파워포인트 대열에 섰다. 그 외에도 많은 기업과 조직들이 파워포인트 공격에 가담했다. 스타트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용도와 목적은 중요치 않다. 그저 옳고 그름의 문제가 되어버린듯 하다. 파워포인트는 마녀가 되었다.
그럼 무엇이 시대를 풍미했던 왕좌를 대체할까? 위의 기업들이 말하는 대체 수단은 매우 복고적이다. 바로 문장이다. 간결하고 함축적인 문장으로 불필요한 장표들을 대체함으로써, 구성원과 조직 전체의 효율과 경쟁력을 높이자는 것이다. 얼핏, 그럴 듯 해보인다. 취지도 알겠다.
아이러니다. 문장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만들어진 도구의 한계를 극복하는 문장이라니...
아쉽게도 시류에 합류하지 못한 나는 여전히 문서작업에 있어 시각화 도구를 즐겨 사용한다. 숫자를 다뤄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문서를 시각화 도구를 통해 만든다. 대표적으로 애플이 만든 Keynote(그냥 애플 버전의 파워포인트다)와 The Omni Group이 만든 OmniGraffle을 사용하는데,
▪︎Keynote는 피치덱pitchdeck이나 각종 덱deck을 만들 때에 주로 사용하고,
▪︎OmniGraffle은 업무 흐름도나, 시간 흐름에 따른 일정표 따위를 만들 때에 주로 사용한다.
OmniGraffle로 만든 흐름도파워포인트의 명복을 비는 것이 밈meme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나는 어째서 문장이 아닌 차트와 도형, 그림을 이용해 문서를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큰 조직과는 다른, 스타트업이라는 내가 일하고 있는 환경 때문일 것이다.
1️⃣ 스타트업의 소통은 보고서가 아닌 메세지화 되어있다.
슬랙, 카카오톡과 whatsapp, 이메일 등 내부 구성원들 간의 소통 뿐 아니라 클라이언트와의 소통도 이미 인스턴트instant화 되어 있다. 짧고 간결하며, 즉각적이다. 정례적인 보고서를 만드는 일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미 구성원들이 보고서라는 익숙하지 않은 속도와 형태를 버티지 못한다.
2️⃣ 이로 인해, 업무의 맥락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즉각적인 대응에 익숙하고 그것에 자원을 집중하다 보니, 위계hierachy가 무너지기 쉽다. 위계는 미시micro와 거시macro를 연결하는 데에 매우 효과적인 체계이다. 때문에 스타트업의 경우는 C-레벨에서 주기적이고 반복적으로 맥락context을 짚어줘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레고 조립 설명서와 같아서 문장을 통한 메세지의 전달로는 부족한 경우가 많다.
3️⃣ 때문에 내가 만드는 문서의 종류들은 왜why와 언제when가 담긴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당연히 구성원 내부가 서로 공유하고 인지하고 있어야 할 회람circulation용이다. 나는 이런 자료들을 문장만으로 만들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며, 그다지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문장이 갖고 힘과 문장을 쓰기 위한 과정이 주는 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글쓰기를 좋아하고 장려하며, 많은 문장들을 읽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동시에, 업무를 위한 소통 수단으로써의 장표 만들기가 업무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상황도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작용을 막기 위해, 주작용의 길까지 끊어버리는 극단적인 행위를, 적어도 스타트업이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스타트업은 (대게는)조직의 물리적 크기 덕분에 직접적이고 기민한 피드백이 구체적으로 가능하다. 규칙의 예외를 두기 힘든 큰 조직과는 완전히 다르다. 때문에 그들의 시스템과 제도가 왜 발생하였는지를 면밀히 따져 적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주 잘나가는 대기업들의 문화를 수용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도입에 앞서 그것이 나의 환경과 얼마나 잘 맞을 수 있는 지를 한번쯤 고려해 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