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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Sep 26. 2024

Château Comtal, 샤또 콩탈

2. 성은 고고학 박물관이다.

⇲ 세상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앙상블 성 '샤또 콩탈'로 들어가 보자.

들어가기 전  이 성의 역사를 짧게 이야기하고 길을 나서야 할 것 같다. 

최초의 마을 오피둠(철기시대 정착촌)으로 시작된 이곳 122년 로마에 정복당한다. 3,4세기에는 게르만제국 침략해 로마제국을 뒤흔들었고, 그 후  까까송은 1,200m 길이의 성벽을 쌓는다. 5세기에는 또 다른 침략으로 아키텐의 서고트 왕국(게르만 부족국가)이 건국된다. 다시 725년 우마이야 왕조(이슬람 제국 칼라파 시대 왕조)에 다시 공격을 받았고, 그리고 759년에는 프랑크족에게 공격을 받는다. 888년 샤를 더 뚱보(프랑크족 왕)의 죽음으로 카롤링거 제국의 종말과 동시에 지방 영주들이 급 부상한다.

1067년 프랑스 남동부 귀족인 트랑카벨 가문은 카르카손 자작 지위를 받는다. 레이몬드 베르나르 트랑카벨은 1096년  이곳에 생니제르 대성당을 건설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잠시 지배권을 잃었지만, 툴루즈 백작의 도움으로 다시 지배권을 찾는다. 1130년 그는 자신을 위한 궁전을 건설하고 갈로로만 요새를 복원한다.  

세월이 흘러 1208년 교황 이노센트 3세는 북부 영주들에게 알비파 십자군을 시작으로 남프랑스의 가톨릭에 반대하는 이단(카타리파)을 처단할 십자군을 일으켜 당시 이단으로 고발된 툴루즈 백작과 그의 가신인 트랑카벨 가문의 젊은 레이몬드 로저 트랑카벨이 공격 표적이 되어 까까송은 함락된다.  로저 레이몬드는 자신의 샤또 감옥에서 불과 24살의 나이로 독살당한다.

십자군에 끌려가는 시테 시민들

그 후 시테는 십자군을 이끈 북부 남작 시몬 드 몽포르와 프랑스 국왕 루이 8세에게 넘겨진다. 1240년 트랑카벨가에서 자신들의 땅을 되찾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보복으로 국왕은 반역자들의 집을 파괴하고 오드강 남쪽 강둑으로 이주시킨다. 이렇게 까까송이 두 지역으로 나뉘었고, 오드강 북쪽 언덕위에 중세도시가, 남쪽은 새로운 마을이 바스티드가 생겨난 것이다.

샤토콩탈의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3세기였고, 쇠퇴기를 거친 후 19세기에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이전의 트랑카벨 궁전이 샤또 콩탈이 된 것이다.


⇲ 샤또 콩탈은 시테 안에서 가장 가파른 언덕지어졌다. 성은 사각형으로 총 아홉 개의 탑이 있다. 수많은 침략에 맞서야 했던 이 성채는 세월이 흐를수록 진화하고 진화해 2개의 동심원 벽으로 완벽하게 무장된 요새 속 앙상 성으로 거듭났다.

현재 동쪽 성벽 입구에 매표소가 있고, 서쪽(오드강 쪽) 부분적으로 폐쇄되었지만 성벽은 모두 관광객들에게 산책로로 내주고 있다. 산책로에서 성안밖을 두두 두루 관망하며 돌 보면 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다.

시테 내 관광은 무료지만, 콩탈성은 유료다. 온라인을 사전 예매 가능하다.

https://tickets.monuments-nationaux.fr/en-GB/families?site=2005635190010400035


⇲  출입문에서 표룰 끊고 들어가면 첫 번째 방에서 짧은 다큐(성의 역사)를 상영한다. 거대한 스크린 아래 시테 조형물이 있다. 이 목조 모형을 통해 성채 구석구석 우리가 갈 수 없는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까까송 장인 루이 라콤(1856-1933)이 제작했으며, 그는 40년의 세월을 이 작품 제작에 헌신했다.

⇲ 중세에 그려진  까까송 모습

⇲ Rapidary Museum, 고대와 중세의 조각품 컬렉션과 전쟁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성벽이나  성채 내・외에 장식된 조각품들이 대부분이다.

토너먼트 벽화, 두 기사가 말을 타고 싸우는 모습이다.

    한 명은 가톨릭 십자군이고, 한 명은 카타르파 기사다.



어느 박물관에 가도 하나씩은 있는 듯,

기사도 돼보고 성 재건에 힘쓴 역사학자로 변신해 보라니 모모는 그런 말은 잘 듣는다.

↓ 박물관을 빠져나와 성벽길을 따라 걸어보자.

5월의 포근한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바람 속에 오드강가에서 만난 아카시아 향도 묻어있다. 향기를 쫓다 보니 성안에도 여기저기 아카시아꽃이 향기롭게 피어있다.

⇲ 시테의 '리세스', 시테에는 방어벽이 두 개 있다. 이 두 벽 사이의 공간을 '리세스(Lices)라고 하며, 이 공간을 통해 성을 산책할 수 있다. 한 바퀴가 약 3km 정도다. 성문 어느 곳에서나 올라갈 수 있으며, 성안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쉽게 성을 둘러볼 수 있다.

↓ 3km의 성벽길, 짧지 않은 길이라 힘들긴 했지만, 성밖 풍경과 성안 쪽 풍경을 감상하느라 피로감은 저 멀리 피레네 산맥으로 날려 보내 버린 듯하다. 투덜이 모모도 흥얼거리며 잘도 걷는다.

↓ 성의 방어벽에 정사각형 모양의 구멍이 뚫려있다. 이 구멍을 통해  전쟁 시 무거운 돌덩이나 불타는 물건을 성아래 침략자에게 떨어뜨렸단다.

공격용 돌덩이들

⇲ 시테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곳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아니,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듯한 느낌이랄까? 첫 방문이지만 첫 번째가 아닌 듯한 왠지 익숙한 느낌, 이곳이 그랬다. 해서 모모에게 성벽을 걸으며 농담 삼아 말했다. '나 정말 이곳이 낯설지 않아. 아마도 전생에 내가 이 성이나 이 도시에 살았던 모양이야. 공주였을까? ㅎ~'

그저 웃자고 한 이야기였는 모모는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냉큼 말한다. 

'공주는 무슨 공주, 저기 저 정원에 풀 뽑는 정원사 부인이었겠지.'

'응, 그랬을까? 그랬나 보네......'

오랜만에 장시간 걸어 그런지 유난히 헥헥 거리며 성벽에 기대서있던 모모 앞을 찬바람 쌩쌩 일으키며 지나가 버리는 나..., 넌 대체 뭔 말을 듣고 싶었던 거니?


↓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구경하고 감상할 것들이 넘친다. 발밑에 거대한 오디토리움이 있다. 이곳에서 매년 여름 20만 명 이상이 모여 까까송 페스티벌에 참가한단다. 뒤편에 생나제르 대성당이 보인다.


↓Basilique Saint Naxaire(성 나제르 대성당),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양식이 나란히 공존하는 시테의 보석 나제르 성당, 남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14세기와 16세기)이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 이렇게 얇고 수직으로 난 틈 일부는 궁수가 화살을 쏘는 곳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런 작은 틈새를 통해 매번 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 작은 틈새로 본 성밖 풍경들, 남프랑스 특유의 주홍빛 지붕이 오월의 따스한 햇살 같다.

↓ 성안 풍경이든, 성밖풍경이 든 모든 풍경이 아름답다. 성냥개비처럼 길쭉한 싸이프러스가 유난히 예쁘다.

↓ 콩탈 성은 연중무휴다. 계절에 상관없이 축제나 중세행사,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보통은 관광객이 많은 주말에 주로 열리지만, 휴가시즌엔 주중에도 많은 행사가 열린다.

우리가 방문하던 날도 성안은 들썩들썩 흥이 넘쳤다.

↓ 갈로로만 성벽, 고대부터 존재했던 성벽이다. 로마제국이 건설한 이 성벽은 탑이 30개가 넘는다. 큰 돌과 벽돌 층을 사용하여 말굽모양으로 지어졌다. 갈로로만 성벽이 가장  보존된 곳은 북쪽 구역이다. 이곳을 걸으며 성밖 드넓은 평원에 크고 작은 포도원이 펼쳐진다. 성채를 벗어나 근처 와이너리에 들러 와인 생산과정과 다양한 품종의 와인 샘플을 맛보는 재미도 있다. 와인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투어도 있다.


↓중세성벽, 1000년 후인 13세기 생루이와 그의 후계자들은 지붕이 없는 둥글고 낮은 탑으로 이루어진 두 번째 성벽을 세운다. 그 후 유적을 복원한 '비올레 르 튀크'는 탑에 슬레이트 타일을 얹어 남프랑스 타일로 덮은 평평한 지붕과 조 되게 탑지붕을 개조했다. 이문제로 인해 까까송주민들의 반발도 있었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탑이다.

**아래 사진은 남프랑스 특유의 지붕과 대조적인 세성벽 지붕이 한눈에 보인다.

⇲ 성벽 산책로를 거닐다 보면 일부 탑과 벽에 나무 비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로 인해 공간이 넓어졌다.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설치된 거란다.

.⇲ 콩달성은 내 전생의 고향이 맞나 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아카시아 꽃길이다. 전생과 이생이 동화줄로 연결된 듯, 내 유년시절의 고향 뒷산으로 오르던 길과 우리 집 밭 바로옆 과수원 울타리가 온통 아카시아 나무였다. 그 아름답고 향기로운 나무는 진즉부터 쓸모없는 나무로 치부되어 다 베어지고, 그곳에 높은 아파트들이 줄줄이 서있는 풍경, 마지막으로 보고 나온 고향의 모습이다.


⇲ 까까송 이름에 따른 몇 가지 전설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초기 로마 정착민의 파생어라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전설에 등장하는 한 여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는 이도 있다.

↑ 성문에 있는 카르카스 부인  흉상과 박물관에 있는 흉상(박물관에 전시된 흉상이 진품이다.

시테는 여러 번 소유자가 바뀌었는데, 725년 우마이야 왕족(우마이야 칼리파국)이 점령했을 때의 일이다. 무슬림 왕 발락이 전쟁으로 죽자 그의 아내 카르카스 부인이 프랑크족 샤를 마뉴와 전쟁을 계속 이어 나간다. 샤롤 마뉴는 5년간 까까송 성벽을 포위하고 있었고, 카르카스 부인이 그녀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5년간의 포위 공격으로  마지막 수비군이 굶어 죽자 카르카스 부인은 짚으로 만든 인형들을 여기저기에 세우고, 직접 포위군에게 석궁 화살을 쏘아 아직 수비군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성이 포위된 지 6년째 접어들던 어느 날, 성 안 비축식량과 물은 바닥이 난다. 그러던 중 마을 사람들이 작은 돼지 한 마리와 밀 한 자루를 그녀에게 가져온다.  그녀는 밀을 돼지에게 강제로 먹여 성벽 아래로 던진다. 돼지가 땅에 떨어지자 배가 터지고 찢겨 밀이 쏟아져 나오자, 시테가 앞으로의 포위 공격을 견뎌낼 만큼 충분한 식량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샤를 마뉴와 부하들은 포위 공격을 해제하고 시테를 떠난다.

그 모습을 확인한 카르카스 부인은 승리의 기쁨을 나누고자 시테 안의 모든 종을 울리게 한다. 종소리를 들은 샤를마뉴의 부하중 한 명이 '카르카스 손네'라 외쳤단다.

이렇게 '카르카스 손네'라는 이름으로 마을이름이 유래했다지만 설화다.  

'sonner'은 프랑스어로 '울리다.'는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인 725년에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이야기다.

다른 이야기지만 시공간을 초월해 조선시대로 넘어가 보자.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 목포 유달산 꼭대기와 주변 바위를 짚과 섶으로 둘러 씌워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해 왜적을 물리쳤다는 노적봉 이야기가 이 여인의 설화를 읽던 순간 떠 올랐다.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 다르지만 비슷한 전술을 썼던 두 先人은 후대에서는 난세영웅으로 기억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다소 험하지만 굳이 난세영웅 까지는 필요치 않다.

그저 전쟁이나 빨리 종식되고, 병원 찾아다니는 어려움 없고, 먹거리 걱정 않고,  다가올 겨울 난방비 걱정 않고,  김장철 배추값, 고추값 걱정 없는 그런 넉넉하고 따스한 세상으로만 가준다면 난세영웅이 왜 필요하겠느냐 이 말이다.

도대체 내가 뭔 말을 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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