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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브던, 바다위 우아한 부두의 이야기

서미싯의 숨은 기억을 찾아 걷다.

by 봄이

8년 전, 모모와 함께 새로운 둥지를 찾아 영국 시골을 떠돌던 어느 날, 유난히 마음을 사로잡는 마을을 만났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부드러운 바람이 맞닿은 서머싯의 작은 해안 마을, 클리브던(Clevedon)이다.

그곳에 처음 발을 디뎠던 날, 가을 햇살은 바다 위의 짙은 암갈색 물결에 스며들며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해안가의 좁은 골목과 낡은 벽돌집, 그리고 부두 끝 작은 찻집은 마치 오래된 수채화 속 장면처럼 평화롭고 다정했다.

따뜻한 블랙티 한 잔이 바닷바람에 식은 마음을 천천히 덥혀주었고, 그날의 바다는 은빛의 찬란함 대신, 구름 사이로 비치는 빛과 그림자가 섞인 묵직한 색감으로 나를 오래 붙잡아 두었다.

세월이 흘러 다시 찾은 클리브던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느리게, 마을의 호흡에 맞춰 일어난 듯했다.

해안가에 늘어난 찻집과 레스토랑, 단장된 산책로가 오래된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마을 중심에서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마린 레이크(Clevedon Marine Lake)가 펼쳐진다. 조수(潮水) 차를 이용해 만든 인공 호수로, 여름이면 수영객들의 웃음소리가 잔잔한 수면 위를 반짝이게 한다.
맑은 날이면 하늘과 바다가 한 폭의 거울처럼 서로의 빛을 비추며,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난 이들에게 잠시 사유의 시간을 선물한다.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바람과 파도, 햇살이 마음을 차분히 어루만진다.
그 고요함 속에서 ‘여기서는 아무 일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가 들려오는 듯하다.


호수를 따라 절벽 쪽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Poet’s Walk가 있다.
이름처럼 수많은 시인과 화가들이 영감을 얻기 위해 걷던 길이다.
들꽃이 피어나는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세번강의 하구와 멀리 웨일즈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습기를 머금은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걸으면, 오래전 시인들의 발자국이 바람 속에 남아 있는 듯하다.

특히 일몰 무렵, 해가 바다 위로 천천히 잠길 때 이 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말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연의 깊은 숨결이 느껴진다.


시인들의 길 끝에서 언덕을 오르면,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작은 교회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이 세인트 앤드루 교회(St Andrew’s Church)다.
12세기부터 마을의 시간을 품어온 이 교회는 세월을 견뎌온 돌담과 오래된 묘지로 둘러싸여 있다. 언덕 위의 묘지는 놀라울 만큼 평화롭다.

노란 버터컵과 블루벨이 묘비 곁에 피어나고,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은 이곳에 잠든 이들의 숨결처럼 부드럽게 스쳐간다.

Clevedon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언덕을 향해 걸어왔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또 그리워하며. 그러나 오늘의 묘지는 슬픔보다는 평화로움과 생명의 빛으로 가득하다.
바다를 바라보는 자리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토록 따뜻한 풍경 속에서라면, 죽음조차도 어쩐지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교회 언덕의 고요함을 뒤로하고, 다시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는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고요히 서 있는 Clevedon Court가 모습을 드러낸다. 13세기 초에 세워진 이 저택은 지금도 원래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간직한 영국 귀족 가옥 중 하나로, 튼튼한 돌벽과 고풍스러운 지붕에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스며 있다.

돌담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정원과 어우러지며 고요한 빛을 만들어내고, 내부에는 정교한 도자기와 가족의 초상화가 세월을 품은 채 조용히 빛난다.

오랜 세월 이 저택은 엘튼(Elton) 가문의 중심지로 자리했고, 1709년 Sir Abraham Elton이 구입하며 가문의 거점이 되었다.
1960년, 엘튼 가문은 저택을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에 기증하며 이 아름다운 건축물이 영원히 보존되도록 했다.

오늘날에도 가문의 일부가 여전히 이곳에서 거주하며, 계절마다 색이 바뀌는 정원을 걷는 이들에게 고요함과 오래된 삶의 숨결을 느끼게 해 준다.


영국에서 'Court'는 일반적으로 '영주의 저택' 또는 '영지 내 주요 건물'을 뜻한다.

따라서 'Clevedon Court'는 'Clevedon 영주의 저택'이라는 뜻으로, 중세 시대 영주의 거주지였음.


⇲ 계절마다 다채롭게 변하는 Clevedon Court Garden


저택을 떠나 마을길을 따라 다시 해안가로 내려가면, 바다 한가운데로 길게 손을 뻗은 듯한 부두가 눈앞에 펼쳐진다. 클리브던 피어(Clevedon Pier)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세워진 이 부두는 섬세한 철제 구조와 목재 데크가 어우러진 우아한 형태로, 지금도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어로 꼽힌다.

한때 이곳은 부유층의 여름 휴양지였다.
그들은 긴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부두 위를 거닐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음악회를 열거나 차를 마셨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도 피어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로, 그 시절의 웃음과 노랫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는 듯하다. 부두 끝 카페에서 마시는 티 한 잔은 시간을 거슬러 그 시절의 향기를 조용히 되살려 준다.


⇲ 처음 이곳을 찿았을때 사진1.2, 지난 여름 사진 3


발길을 돌려 다시 마을로 향하면, 늦은 오후 햇살이 번지는 Hill Road가 펼쳐진다.
갤러리와 서점, 작은 카페들이 이어지고, 길 한켠에는 1912년에 문을 연 Curzon Cinema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영화관 중 하나로, 주민들과 영화 애호가들의 정성 덕분에 오늘도 커튼이 오르고 필름이 돌아간다.

그 순간, 이 마을의 역사와 오래된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함께 흐를것만 같다.

사진출처 : 위키토피아

세월이 흘러도 클리브던은 변화를 서두르지 않는듯 하다.
바람과 파도, 햇살과 들꽃 사이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조용히 걷고, 오래된 것과 자연을 지키며 살아간다.

영국인들에게 그것은 관광이 아니라 ‘삶의 예의’다.
그들의 신중한 손길과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어떤 존중의 형태를 보여준다.

나는 다시 처음 발을 디딘 그 길 위에 선다.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일, 자연을 아끼는 일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다.
그저 하루의 끝에 잠시 멈춰 서서, 이 세상을 더 부드럽게 대하려는 마음,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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