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에서 회사로
나는 더 자유로워지기 위한 수단으로써 개발자가 되기를 선택했다.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외국어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운 좋게도 무역 상사에서 해외 영업직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첫 회사에서 느꼈던 것은 나만의 실력이나 능력이 없다면, 회사에서 나의 가치는 결국 언제나 대체될 수 있는 하나의 부품에 머문다는 사실이었다. “요즘 애들 취업하기 어려워서, 막 대해도 쉽게 못 그만둬요.”라고 했던 선배의 말을 들으며 퇴사를 결심했고, 나만의 능력을 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퇴사를 하고 잠깐의 고민 후에 나는 IT 산업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인문학도였던 나에게 선택지는 영업직 밖에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한국에서 영업을 경험한 나에게 다른 산업 분야라고 하더라도 다시 영업직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더 전문성을 쌓는 길을 선택하고 싶었다. 내 전문성이 있어야 회사에서도 당당할 수 있고, 특히 개발자가 된다면 세상 어디든지 일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개발자가 되었다. 나는 개발자가 되기 전부터 다양한 비즈니스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너무 큰 조직보다는 비즈니스의 최전선에서 실제로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볼 수 있는 스타트업에 훨씬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스타트업 개발자로 방향을 정했고, 한 개발자가 다양한 업무 분야를 맡아야 하는 스타트업의 특성상 정말 다양한 업무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비즈니스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개발뿐만 아니라, 마케팅, PR, 기획 등 다양한 업무를 어깨너머로 배웠다. 첫 회사에서 받던 연봉은 개발자로 취업하고 반토막이 났지만, 수평적인 문화에서 누구보다 개발 업무 전반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정말 신나게 일했다.
하지만 내가 개발을 선택했던 이유는 ‘자유’롭고 싶다는 이유가 아니었던가. 국내에서 3개의 스타트업을 다니면서 나는 내 실력을 테스트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커져갔다. 그렇게 나는 세 번째 회사를 그만두면서 프리랜싱을 시작했다. 클라이언트를 직접 만났고, 그전까지는 누군가 대신하던 기획부터 디자인까지 직접 하거나 사람을 고용해야 했다. 회사를 다닐 때보다는 훨씬 더 많은 돈을 벌면서, 대신 더 높은 책임감을 느끼며 일해야 했다. 프리랜싱과 중간중간의 휴식을 반복하다가, 똑똑한 팀원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때쯤 싱가폴로 넘어왔다.
싱가폴에서도 프리랜싱을 계속할 수도 있었겠지만, 부인님과 내가 함께 무직인 상태로 싱가폴로 넘어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리 부부의 안정적인 싱가폴 생활을 위해서라도 좋은 회사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년 정도 이어진 프리랜싱 이후에 좋은 팀에서 좋은 팀원들과 함께 같은 목표를 달려가는 회사 생활에도 목말라 있었다.
그런데 프리랜싱이라는 경력은 꾸준히 회사를 통해서 경력을 쌓아온 채용 담당자가 보기에는 양날의 검이다. 수많은 클라이언트를 통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온 베테랑을 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실력이 없는 프리랜서라면 일 없이 보내던 기간을 프리랜싱 기간으로 잡아놓았을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경력을 아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란 정말 깐깐한 채용 프로세스를 갖고 있는 회사에서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좋은 실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회사 문화와 맞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리고 프리랜서로 자유롭게 지낸 사람이라면 조직의 규칙을 불편해하기도 쉬울 테고.
그렇다면 프리랜서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회사를 안심시킬 수 있을까?
첫 번째 방법은 프리랜서를 통해서 기를 수 있는 기획, 영업 능력 등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포지션에 지원하는 것이다. 프리랜싱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프리랜싱은 단순히 특정 분야의 기술만으로 잘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주어진 업무뿐만 아니라, 여러 이해 관계자들과 수많은 커뮤니케이션 관련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의사소통 능력이 극적으로 향상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경우 클라이언트가 비전문가인데, 이런 비전문가와 일할 때는 특히 힘들다. 같은 업계 사람이라면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이 외부 사람들에게는 하나하나 납득시켜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프로젝트의 사이즈에 따라서 혼자서 처리하기 힘든 프로젝트의 경우 디자이너나 동료 개발자를 추가로 고용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한 프로젝트를 위해서 직접 팀을 꾸리고, 클라이언트와의 미팅 내용을 팀원들에게 전달하고, 심지어 결과물을 직접 확인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기도 한다. 따라서 프로덕트 매니저 등 조직원을 관리하고, 프로젝트를 이끄는 포지션이라면 회사에서 개발만 해온 개발자들보다 분명히 더 강점이 있는 분야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방법은 프리랜싱로 진행한 다양한 프로젝트 중 지원하는 포지션에 맞는 내용만 잘 요약해서 사용하는 방법있다. 개발자들이 경력을 정리할 때 많이 하는 실수 중에 하나가 내가 했던 프로젝트를 줄줄이 늘여서 쓴다는 점이다. 그런데 대게 회사에서 채용을 담당하는 사람은 개발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개발자를 채용하기 위해 기본적인 내용들은 알고 있겠지만, 사실상 기술을 늘여 써놓는다면 전혀 어필하기 힘들다. 그런데 거기다가 프리랜싱 과정을 통해서 포트폴리오나 사용해온 기술에 일관성이 없다면? 채용 담당자 입장에서는 정말 이력서가 혼란스럽기만 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왔던 일이 훨씬 많다고 하더라도 지원하는 포지션에 맞게 이력서를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싱가폴에서 첫 구직을 하면서 내가 선택했던 방식은 두 번째 방법이었다. 나는 워낙 다양한 회사,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던 터라 모바일, 백엔드, 프런트엔드 등 일관성 되지 않은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싱가폴에 넘어오면서는 금융권 백엔드 개발자로 일하기로 결심했고, 백엔드 개발 분야의 경험만 추려서 이력서를 작성해서, 서류도 통과하고 면접도 볼 수 있었다. 만약 할 수 있는 분야가 다양하고, 다양한 포지션에 지원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력서는 지원하는 포지션에 맞춰서 다시 정리해야 한다. 지금껏 해온 프로젝트를 모두 늘어놓는 이력서는 읽히지 않는다.
물론 아직은 회사 다니는 분들에 비해서는 훨씬 적은 숫자이겠지만, 국내에도 생각보다 많은 프리랜서분들이 일하고 있다. 내 주위에도 프리랜싱으로 시작해서, 자기 회사까지 차리고 업계의 인정받으며 일하는 분들도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회사를 다니다가 프리랜서가 되거나, 프리랜서에서 회사로 전향하는 경험은 흔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에는 이번 싱가폴에서 해외취업을 통해 양방향 모두를 경험해 보게 되었다. 내가 프리랜싱을 시작하면서 지난 회사 생활에서 쌓아온 실력을 증명하는 시간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이번 싱가폴 취업은 그동안 프리랜싱으로 쌓아온 실무 경험을 다시 회사에서 증명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 이제 5년 차 개발자가 되었고, 나에게는 이제 ‘선택해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은 개발이라는 넓은 분야 마음껏 뛰어노는 여행자 같은 상태였다면, 앞으로는 개발자로 더 경력을 쌓고 싶다면 이제는 내 전문 분야를 정하고 그 깊이를 쌓아 나가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혹은 개발뿐만 아니라, 나의 열정에 계속 비즈니스에도 있다면 조금 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포지션과 관련된 전문성을 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나에게 계속 던지고 있다.
특히 개발자들에게 높은 연봉과 동시에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싱가폴에서는 개발자들에게 연차가 아니라 연봉에 합당한 수준의 실력을 기대하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연봉을 받으며 경력을 쌓아나가고 싶다면 ‘내 분야’라고 말할 수 있는 전문성을 쌓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각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 만들어 가는 싱가폴 스타트업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만든다는 만족감으로 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프리랜싱이 줬던 높은 자유도와 사업가 정신이 그립기도 한 싱가폴 생활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