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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보고 Dec 16. 2023

마지막 회식을 마치며

D-77

여기 유명하고 맛있는 곳이야~


    연말 모임 시즌입니다. 저의 간절한 기도와 다르게, 회사에서 연말 회식이 잡혔습니다. 바로 어제였습니다. 매년 하던 건데 코로나도 아닌 지금 안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헛된 희망이었습니다.


회식 장소를 말하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오오~ 엄청 맛있겠다. 좋은 데 가네~잘 다녀와~"

      "......"

     "왜~왜 그래~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와. 여긴 엄청 좋은 곳이네~"

       "...... 자기 내가 그랬지. 뭘 먹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먹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현 직장에서 회식을 하며 꽤 좋은 곳에 갑니다. 호텔 스카이라운지라던가, 값비싼 소고기집이라던가, 룸 오마카세라던가, 호텔 디너라던가... 살면서 제 돈 주고는 절대 안 갈만한 곳이지요 (가고 싶지만, 못 가는 곳이라고 해야 할까요?) 10월 초에 예약해 놓았다던 오늘의 연말 회식 장소는 여의도에 아주 좋은 룸 오마카세집이었습니다. 역시나 분위기도 좋고 맛도 좋았지요.


    "여기 유명하고 맛있는 곳이야~ 어때? 맛있지?"

    "아유~ 맛있습니다. 제가 언제 이런 걸 먹어보겠어요~"


    이 대화를 시작으로 보스의 말과 에피소드에 많이 웃고 맞장구 치고, '음~너무 맛있어요'하다 보면 3시간이 지나갑니다.


    "그럼 다음 신년회는 어디서 할까? 내가 한국에서 제일 맛있는 스테이크집을 어제 갔었거든? 거기 최고야 진짜~"

    "워크숍 홍콩으로 가는 건 어때?"


    "오오 좋습니다~"


    사실, 좀 혹하긴 했습니다. 알딸딸한 술기운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 내 돈 안 내고 여기저기 좋은 데 갈 수 있다는 게 아주 매력적이긴 했습니다.


    현 직장에서 누린 것도 많습니다. 해외 미팅으로 로마, 싱가포르, 방콕도 다녀왔고,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퍼스트클래스와 비즈니스클래스를 경험했고, 늘 좋은 호텔, 좋은 음식들을 먹었습니다. 그 순간의 쾌락으로 직업만족도가 급상승하기도 했죠. 그러다 서서히 깎아먹어 가지만, 짧지만 강력하고 달콤한 보상이었습니다. 고맙고 소중한 경험이지만, 온전한 제 힘으로 이룬 것들이 아니라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면서 잠깐의 호사를 누린 거지요. 오롯이 제 것일 수도, 영원히 제 것일 수도 없는 것들을 바라면서 그 하나에 위안을 삼으면서 일을 하는 게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일까, 나중에 정말 후회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퇴사까지 결심하게 되었는데 스테이크 맛집 하나에 홍콩워크숍 하나에 무너지면 안 됩니다. 암요.


    아무리 유명하고 맛있는 집이더라도 내 사람들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과 편안히 함께 먹는 게 더 맛있고 만족스러운걸요.


우리가 직장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11년 동안 6번의 이직을 하면서 여러 직장을 거쳐오면서 많은 회식을 경험했습니다.  떠올려보니, 회식 자체가 싫었다기보다는 '강제성'이 깔린 '회식'이 싫었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회식의 의미가 아래와 같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음식을 먹음. 또는 그런 모임.

    이렇게 수수한 뜻이었다니요. 여기에 신입은 필참해야 되며, 자기소개와 장기자랑을 할 수도 있으며, 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고, 1차, 2차, 3차, 4차 나보다 윗사람이 간다면 '여긴 어디 난, 누구?' 하며 영혼 없이 끌려다녀야 하고, 새벽에 귀가하더라도 다음날 정시출근을 해야 하며, 술 먹을 때 언니-동생이고, 술 깨면 더 어려워진 선배-후배 갭 차이에 현타가 오기도 하며, '일이 있어서 일찍 일어나겠습니다~' 하는 순간, 분위기 깨는 주요 인물이 되어 눈초리 받고, 험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그런 뜻은 없나 봅니다.


    현 직장은 진정한 회식의 의미에 가깝긴 합니다. 이전 회식 때, 보스와 상사들과 떨어져 사원들끼리만 테이블이 떨어져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맛있는 음식에 와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데 참 '좋은' 사람들이구나, 나와 결이 맞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더 가까워지고 함께 하고픈 마음이 들다가도 '직장'이라는 특성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맞다고 여겼었죠.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이라고 느꼈다면 서로에게 거리를 두는 게 더 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도 무언가 아쉬운 마음에 '우리가 직장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상상도 해봤습니다. 동호회나 남편끼리 친구여서 만난 부부 모임 나, 잠깐 상상해도 절친으로 지냈을 사람은 있을 듯합니다.


    어제 모임에서 내년 계획, 내년 워크숍 등등 이야기하는데 계속 이 직장에 머물 것처럼 하니 괜히 미안해지더라고요. 알딸딸한 술기운에 '저 내년 2월이면 그만둡니다. 샘들~' 이렇게 말할 뻔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정직하고픈 마음이 드는데, 아무래도 꽤 많이 좋아하나 보구나, 이렇게 깨닫습니다.

 


마지막 회식


     7년 동안 머무른 회사는 처음이었습니다. 결혼 때문에 생계 때문에 버텨야 해서 머물렀다고만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제 성격상 버틸만한 달달한 보상을 많이 받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좋은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니었나,싶습니다. 외관상으로 봤을 때는 불평할 거 없고, 부족할 거 없는 이 직장을 그만둔다는 게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이 수조 안에서 행복하고 만족하는 물고기가 되기보다 거센 물살을 만나더라도 강으로 바다로 나가고 싶습니다. 지금 제 마음은 그러합니다.


    한참 이 직장에서도 불만과 분노가 가득 차서 그만두고 싶어서 욱하던 순간이 많았는데, 아마 그때 그만두었으면 그 날 것의 상태로 나왔으면 그저 물밖에서 팔딱이다가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안정된 상태에서 그만 둘 결심을 하는 게 더 어렵기에 더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지요.


    그렇게 어제 저만이 알고 있는 마지막 회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갈 준비를 합니다. 다음번 회식이 있다면, 창작자들 사이의 회식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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