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6
퇴사날까지 46일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시부모님께 저희의 계획을 말씀드리기로 한 날이 24일 남았습니다. 설날에 찾아뵙고 말씀드릴 예정입니다. 모든 걸 계획하면서 이 날도 미리 정해놨었습니다. 호기롭게 결정했지만, 막상 말씀드린다고 생각하니 남편과 저, 둘 다 긴장이 많이 됩니다. 오늘 이전에도 이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 여보, 여보는 어머님, 아버님이 반대하시면 안 갈 거야? "
" 반대는 안 하실 거야. 이전에 밑밥도 좀 깔아놨잖아. 베트남에 대한 이미지도 좋으신 거 같고"
" 아니, 그래도 반대하시면?"
" 그래도 가야지. 그건 변함없어. "
남편과 저는 확고합니다. 이미 비행기표예매도 숙소예약도 다 끝냈습니다. 저는 새해 되자마자 퇴사하겠다고 회사에 말했고, 남편은 2월이면 그렇게 할 겁니다. 지금 기분이 뭐랄까? 결혼하기 전, 상견례하기 전 기분 같습니다. 저희는 이미 결혼하기로 결정했고, 만약 부모님들께서 반대하셔도 헤쳐나갈 마음은 있지만 그래도 부모님들의 지지와 축복 속에 결혼하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지난 금요일, 집 앞 이자카야에서 술 한잔 기울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금 위의 주제가 나왔습니다. 바로 그 전날에 시댁으로 가는 설날 기차표를 예약을 했고, 그러자마자 '진짜 얼마 안 남았구나' 실감이 나고 긴장도 되었습니다. 뭔가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사실, 뭐 준비할 건 없습니다;)
" 여보, 진짜 얼마 안 남았다~ 어머님, 아버님께 뭐라고 말씀드릴지 생각해 놨어?"
" 응. "
" 에? 아니야. 철저히 준비해서 가야지. 긴장 안 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지~"
" 내가 알아서 할게. 다 준비해 놨어. "
남편은 자신의 부모님께 이야기하는 것 이기도 하고, 부모님이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알기에 너무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습니다.
" 사라는 일 안 하나???? "
" 에? 뭔 소리야? 갑자기? "
" 사라는 거기 가서 노나???"
" 뭐라는 거야??????????? "
갑작스레 제가 던진 상황극에 남편은 황당하다 못해 어이없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저희 시아버님 말투를 따라 한 것이었지요. 가끔 아버님이 장난치듯이 말씀하실 때 어투를 따라 했습니다.
" 아버님 따라 한 거잖아~"
" 알아, 근데 아빠가 그렇게 말할 리가 없잖아?"
" 아니, 혹시 모르지.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아버님 나 간호사라고 좋아하신 것도 있고, 일 안 한다면... 별로 안 좋아하실 수도 있고......"
" 그런 소리를 왜 해. 그런 말 하시지도 않아. 내가 예전부터 이야기했어. 아이 낳고 애기는 남의 손에 안 맡긴다고 그러면 자기는 일 그만둬야 할 수밖에 없다고."
" 아니, 그래도... 여하튼 좋게 잘 말씀드려. 뭔가 사지 멀쩡한데 그만두고 타지 간다고 하면 부모님들은 말은 안 해도 섭섭해하거나 속상해하실 수도 있잖아."
한참을 토론을 빙자한 다툼을 벌였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부모님들 반응으로 우리가 왈가왈부할 건 없지요. 다만,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간에 감정적이지 않게 조곤조곤 잘 설명드려야 된다고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얼추 마무리 짓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을 안 하는 며느리'가 주는 인상이 왜 이렇게 부정적인 걸까. 시부모님은 어떤 말씀을 하실지 모르는데, 저는 왜 제가 '일 안 하는 며느리'가 되는 것이 제일 걱정인 걸까.
퇴사하고 마냥 자유로울 것만 같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음을 느낍니다.
'일 안 하는 며느리'가 걱정이 되는 것도 있지만, 더 파고들면 '일 안 하는 나 자신', '직업이 없는 나 자신'이 걱정이 됩니다. 먹고살 걱정이 아니라 그런 상태를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정말 새로운 업을 하고 살아가길 희망합니다. 하지만, 그게 나의 일부가 되기에는 절대적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에 당장 백수가 된다면 그럼 나는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일도 많지 않은 30대 중반의 여자이지만, 누군가에게 나를 알리는 목적이 없더라도 그냥 숨만 쉬고 있더라도 내가 '간호사'일 때와 내가 '백수' 일 때의 느낌은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저의 이전 글 중 나의 또 다른 프로필 남기기 이 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때는 브런치 작가로서 나의 프로필을 채워나가 보겠다는 의지를 다졌었군요. 숙취에 절어서 또는 당근 하느라 글을 안 쓴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예전의 저'입니다. 저를 부끄럽게만 할 뿐, 저의 걱정을 해결해주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유튜브에서 한 영상을 발견했습니다. 세바시 인생질문 채널의 '끊임없이 실패하고 흔들리는 나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제목의 영상이었습니다. 그 영상 속 [라틴어 수업]을 집필하신 한동일 작가님이 말씀해 주신 그 한 마디, 한 문장이 흔들리는 저를 잡아주었습니다.
" 지금 내 모습이 내 전부는 아니야. "
제가 지금 '간호사'라고 해서 그게 제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지금 '간호사'가 아니라고 해서 그게 제 전부는 아닙니다. 제가 곧 '백수'가 된다고 해서 그게 제 전부는 아닙니다. 저 자신이 끊임없이 고뇌하고 있음을 기억해 봅니다. 아직 발현되지 않는 나의 가능성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건 저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문장 하나로 계속 제가 원하는 바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제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백수 생활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내가 나를 어떻게 정의할지가 아니라 지금 이 모습을 견디지 못해, 나를 믿지 못해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것, 그대로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수없이 흔들릴 겁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1분의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가지고 저 문장을 되뇌어보기로 합니다.
지금 내 모습이 내 전부는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