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7
퇴사, 그리고 끝이 정해지지 않은 여행의 시작이 점점 다가옴에 따라 설렘이 제마음에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자 드디어 떠날 시간이 다가왔어!!!!'라고 말이죠. 신나고 설레는 마음도 잠시 파도가 떠나간 자리에는 축축한 불안이 여기저기 스며들었습니다. '근데, 진짜 잘해나갈 수 있을까?' 30대중반의 부부가 출퇴근이 없는 삶, 집이 없는 삶, 월급이 없는 삶이 마냥 자유롭고 좋기만 할까.
설렘도, 불안도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감정일 뿐이었지만, 한 번쯤 이런 감정을 통해 나를 되돌아볼 필요는 있었습니다. 금전적인 건 계획이 어느 정도 있고 플랜 B도 짜여있었지만, 업데이트되지 않은 제 프로필에 대한 제일 문제였습니다. 제 손에 쥐어진 프로필이 '간호사' 뿐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간호사의 경력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만, 제가 원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고, 떠나고 나서는 '비공개'로 돌릴 예정이기 때문에 새로운 저의 프로필이 필요했습니다. 저에 대한, 제가 쓴 기록을 모아 조각을 맞춰 저의 히스토리를 엮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록이 쌓이면 정보가 되고 정보가 쌓이면 콘텐츠가 되는 거니까요. 그러다가 '앞장만 채운 노트들'과 '쓰다만 다이어리들'과 '내용이 텅텅 빈 노션 대시보드들'만 발견해서... 제 비공개 프로필에 추가되었습니다.
난 왜 꾸준히 기록하지 못하는 걸까. 습관이 되지 않아서. 그렇다면 왜 습관이 안될까? 게을러서? 나에게 맞는 기록법을 찾지 못해서? 기록한다고 해서 당장 나아질 것 없는 삶을 살아서? 당장의 큰 변화를 원해서 ! 그렇습니다. 결과를 바랐습니다. 당장 기록은 콘텐츠가 돼야 했고, 그건 제 삶을 바꿀 결정적 역할을 수행해야 했으며 돈을 벌어야 했죠. 이 모든 성취는 창의성과 더불어 절대적인 시간과 꾸준함이 들어가야 하는 것인데 말이죠. 거기다가 운까지 더해져야되지요.
사실 전, 쓰는 건 만으로 즐거운 사람이란 걸 잊고 살았습니다. 기록은 저에게 명상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쓰는 시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몰입하는 것이지요. 그 몰입 속에서 내 안의 것을 탈탈 털어놓거나 내 안의 것과 떠오르는 것을 적절히 조합해서 하나의 문장을 써 내려가는 게 너무나 즐겁습니다.
이를 다시금 알아차리게 해 준 건 뇌과학자 '앤드류 후버만' 교수의 한 영상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영상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그림을 실험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그림 그리는 것을 원래부터 좋아했습니다. 연구원들은 이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릴 때마다 보상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금색 스티커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무언가였습니다. 그 후, 어느 날 갑자기 스티커를 주지 않기 시작했더니,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경향이 훨씬 낮아졌다는 것을 알게 됐죠. 보상도 없어졌고요. 그림 그리기는 보상을 받기 시작하기 전부터 아이들이 본질적으로 즐거워하던 활동이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기록이 주는 효과는 누구보다 여실히 느끼면서도 습관이 들지 않는 건 않는 건, 그 뒤에 성취만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활동임에도 말입니다. 이 영상에서교수는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연습'을 하라는 조언으로 마무리됩니다. '과정을 즐겨라!'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기도, 뻔한 이야기 같기도, 예전에 그런 조언을 들었던 거 같기도 하지만, 제가 그걸 받아들일 시기였는지, 그 조언이 제 가슴에 단단히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면서 글쓰기를 통한 몰입, 나 자신을 정리하고 발견하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고 운이 좋게 한 번만에 합격하였지요. 아래는 그때 썼던 제 자기소개입니다.
퇴사와 동시에 한국을 떠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12년 차 간호사, 6번 이직을 거치고 결국 작가를 할 수밖에 없는 영혼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비슷한 고민의 가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6년간의 치열한 연애 끝에 결혼하여 둘이 쿵작이 잘 맞아 동반퇴사를 하고 함께 여행을 시작하려는 한 사람으로서 사람은 사람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작은 갈등만 생겨도 쉽게 놓아버리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조금은 늦은 방랑생활을 시작하려는 30대 부부의 이야기 속에 녹여내보려 합니다.
합격과 동시에 떠나기 전에 100일부터의 기록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매일 쓰기 위한 저만의 장치 중 하나입니다. 그 장치 덕에 뭔가 모를 막막함이 올라올 때도, 일단 침대사이 저만의 작은 공간에 앉습니다. 그리고 노트북을 켜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술술 써내려가는 저를 발견합니다. 아직까지 순항 중입니다. 타인에게 영향을 무조건 받던 저였습니다. 첫 게시물도 차마 올리지 못했던 SNS계정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정리 좀 해야겠네요). 그런 제가 공개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건, 라이킷 개수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건, 아마도 글을 쓰는 과정에 집중하고 그 즐거움을 되뇌이는 작업을 의식적으로 한 덕분인 듯 합니다.
사실, 동반퇴사와 신혼살림을 과감히 정리하고, 한국 떠나서 사는 삶이 참 특별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 브런치에서 다양한 삶을 사는 '작가'님들을 보다 보니 제가 살아갈 이야기는 마냥 '특별'해 보이지는 않더군요. 그 순간 마음이 쪼그라듭니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합니다.'후~하~후~하~' 한 열 번쯤 반복하다 보면 시기, 질투, 열등감은 사라지고 오롯한 저와 마주하게 됩니다. 누구보다 더 특별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님을, 누구에게 자랑하기 위해 쓰는 게 아님을 기억해냅니다.
우리 모두는 고유한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똑같은 나라를 여행하더라도 챙기는 준비물부터 비행시간, 머무는 숙소, 만나는 사람, 여행 루트, 즐기는 음식들이 다 다르듯이, 같은 건 하나도 없지요. 정답 또한 없지요. 그러다 다른 각자의 고유한 이야기 속에서 나와 같은 통찰을 한 사람들을 만날 때, 취향이 비슷한 사람, 결이 비슷한 사람을 발견할 때 참 반갑고 뭔가 든든합니다. 가끔은 울컥하기도 합니다.
한 단어, 한 문장으로 대표할 수 없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기에 ,계속 길고 길어지는 저의 프로필을 이 곳에 써내려가봅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저의 고유성을 기억하고 싶은 저입니다. 조금 욕심내보자면, 이 긴 이야기 속에서 어느 작은 한 부분이라도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