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덕질을 시작했다. 롤린롤린롤린~!
남편이 요즘 꽂힌다는 노래를 알려줬다. 군부대에서 유명했다가 이번에 역주행으로 수면 위로 올라온 브레이브걸스의 '롤린'이다. 한번 들었던 음악은 막귀인 나에게도 뇌리에 남아 흥얼거릴 정도로 중독성이 강했다. 하지만, 이 곡이 뜨게 된 것은 찰진 댓글들 덕분도 있다.
갑자기 어젯밤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서
"큰일이네"
라고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들어 보니 롤린이 좋아 찾아보다가 디씨 갤러리까지 가게 된 것이다. 덕질을 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덕질해도 괜찮아?"
라고 묻는 말에 "why not~?"이라고 대답하고서는 나는 스쳐 지나갔던 20대의 기억이 떠올랐다. 20대 때 남편은 아이유의 팬이었다. 아이유가 왜 좋냐고 내가 묻자 남편은 음악이 좋다고 했다. 본인은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 거짓말을 찰떡같이 믿었다.
남편의 학교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나는 뜨악할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와 핸드폰 그리고 노트북까지 모두 아이유의 사진으로 도배되어있었다. 그런데, 아이유의 목소리가 좋아 아이유 노래가 좋다던 남편의 배경화면은 하나같이 아이유가 다리를 벌린 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손으로 끌어올린 사진이었다. 그야말로 섹시포즈였다.
나는 갑자기 급격한 배신감을 느꼈다.
아이유의 노래가 좋다더니.. 목소리가 좋다더니!!!
남자는 남자다. 남편이 당황했다.
나의 배신감은 나의 착각에서 나왔음을 나는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남편을 내가 내 상상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나의 남자는 다를 것이다. 그래서 더 특별하다."
나는 솔직히 남편이 야동을 본다고 해서 배신감을 느끼진 않는다. 야한 것을 찾아본다고 해서 나와의 관계가 조정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적용시키지만 않는다면.)
하지만, 여느 걸그룹이 아닌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아이유를 좋아한다는 남편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의 음악성을 높이 샀다. (사실 그것부터가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남편은 음악을 하다가 포기하고 전향을 한 사례다. 어릴 때 함께 음악 한 친구 중에 아직 음악을 하는 친구들도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음악과 미술 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동경이 있었다. 힘들고 고난의 길이기에 특별해 보였다.
주변인들로부터 받는 "글 쓰는 사람"에 대한 동경과 시선들(어쩌면 편견)들을 싫어했는데 나도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보고 있던 것이다.
어쩌면 남편이 처음부터 아이유가 섹시해서 좋다고 했다면 나는 그냥 이해했을 것이다. 물론, 섹시함만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남편이 아니라고 한다) 음악성이 기반이 되어서 좋아지다 보니 여러 사진 중에 픽을 했을 뿐이란다. (그렇다고 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딱히 야한 사진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만들어놓은 허상에 내가 뒤통수 당했을 뿐.
그래서 30대가 된 나는 남편이 말하는 "좋다"라는 말에 포함된 수많은 이유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작점의 이유와 진행형의 이유 나타나는 이유가 모두 다를 수 있음을 나는 이제는 안다.
남편의 덕질이 어떻게 끝날지는 아니면 계속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나는, 20대 때 아이유 배경화면을 보고 그렇게 난리를 쳐놓고 35살의 나는 "돈도 쓸 거야?"라고 물어본다.
재력이 뒷받침해주는 덕질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고 있는 나는
돈만 안 쓴다면야 상관없어진 내가 너무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인 걸까.
아무래도 나는 내 코가 석자라 남편이 덕질을 하든말든 내 일이 우선순위에 올라있다는 것을
아량이 넓은 와이프로 포장되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면서도 딱히 정정하지 않는다.
35살, 어쩌면 거짓말들이 익숙해져 가는 나이인 걸까.
그냥 속 편하게 거짓말이 편할 때도 있다는 게 참 서글프다.
뭐, 덕질하지 말란다고 안 하던가. (하지 말라면 숨어서도 한다)
10대의 나도 H.O.T에 미쳐서 클럽 HOT에 가입하고 팬픽도 쓰고, 테이프에 녹화하는데 아빠가 야구 본다고 돌려서 녹화가 어그러졌다고 짜증을 내고는 했는데, 지금은 다 지나가버린 나이가 되어버렸다.
당시에도 오빠라고도 부르며 찾아다닌 친구들에 비하면 굉장히 미미하다고 생각했지만, TV에 나온다고 하면 나도 모르게 채널을 돌리고 있는 나. 그리고 '언제 결혼하려나.' '누가 데려가려나. '알고는 있지만 안 만나는 친척오빠 대하듯이 보는 나.
그리고 자기 전에 누워서 덕질을 하는 남편.
롤린 롤린 롤린 롤린~!
에이, 그래도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
(뭐가 아니란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