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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강 Mar 30. 2016

엄마 딸이어서 고마워!-35

##  내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 경배합니다.

  "내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게 경배합니다"

아침 강가로 나서는 길이 더뎠다. 약간의 두통이 있었고 몸도 무거웠다. 바라나시에서 참새들은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숙소에서 가트까지 100m 도 안 되는 거리를 마음이 허락할 때마다 나가 앉아있었다. 시장으로 통하는 골목길을 크게 벗어날 일이 없어 동선은 짧았고 옆집으로 마실 가듯 편안한 맘으로 외출을 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숙소를 나서면 자연스럽게 익숙한 방향으로 몸을 돌리게 된다. 그러면 같은 곳을 지나고 같은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어디가?"

"나마스떼"

"우리 집에 프라이드치킨 있어. 먹어봐 맛있어!"


 골목을 지날 때마다 듣는 익숙한 인사들이다. 가장 많이 듣는 말 나마스떼(Namaste)! 산스크리트어 "Namaste"는 존중하다란 뜻의  "Namah"와 당신에게 란 뜻의 "Aste"가 합쳐진 말로 "당신을 존중합니다."  "내 안의 신이 당신의 신께 경배합니다""나는 당신에게 마음과 사랑을 다해 예배합니다""내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게 경배합니다" 란 뜻을 담고 있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나마스떼" 인사를 하면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고 너그러워진다.

"나마스떼!" 

힌두대학 내의 비슈와 나트

 늦잠을 자고 일어나 오토릭샤를 타고 바나라스 힌두대학 BHU(Banaras Hindu University)로 향했다. 바나라스 힌두대학은 인도의 민족문화를 종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대학이지만 캠퍼스 안에 있는 단과 대학과 별개로 시내 곳곳에 독립 단과 대학이 있다.

 정문 앞에는 독립운동가이자 바나라스 힌두대학의 설립자인 말라비야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설립자의 이름을 딴 "말라비야 바반"이라는 건물에서는 요가 수업이 정기적으로 개설된다고 한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많은 젊음이 자유로워 보였다. 학교가 워낙 넓어서 캠퍼스 안까지 들어오는 사이클 릭샤왈라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낯선 이방인을 바라보는 젊음이 낯설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또 다른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


 

바가바드 기타  경구일부

정문에서 들어오면 왼편에 여대생 단과대학이 있고 남쪽 끝에 광대한 농장이 있고 다양한 종류의 기숙사 시설이 있다. 결혼한 외국인을 위한 "플랫"이라는 기숙사와 멀리서 오는 세미나 참석자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 태국 스님들을 위한 단독 기숙사가 있는데 학교에 머무는 이를 위한 세심한 배려와 혜택이 인상 깊었다. 또 교수와 교직원이 살 수 있는 단독 혹은 연립 형태의 사택이 대학 건물 주위에 위치한다고 한다. 교수실은 책상 위에 낡은 컴퓨터가 전부였다. 소박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했는데 권위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라마야나 저자 발미끼

전체 대학이 시험 일정이 같은데 시험 당일에는 캠퍼스 내 경비를 맡은 경찰들이 정문을 지키며 출입을 통제하고 시험을 위해 따로 배정된 강의실에는 수험표가 붙은 책상이 있고 필기 구외에 가방이나 책을 소지하면 입장이 불가하다고 한다. 감독관은 5~10명 정도가 한 교실에 들어오고 우리나라의 수능을 방불케 할 만큼 삼엄한 가운데 시험이 치러진다고 한다.


 캠퍼스 안에는 짜이와 분식점, 자전거 수리를 하 수 있는 가게들이 카페테리아와 별도로 위치해 있다. 어디까지가 대학 캠퍼스 인지  모를 만큼 넓은 구내

에는 인도 미술관 바랏트 깔라 바반 (Bharat Kala Bhawan)과  비슈와나트 사원이 있다.  소지품을 맡기고 좁은 골목에서 길게 줄을 서야 하는 강가의 비슈와나트 사원과 달리 출입이 자유롭다.


삼사라(윤회)

 입구에서 신발을 맡기고 맨발로 들어가면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시바 링감이 있다. 시바신의 상징인 링감에 꽃과 스윗 그리고 돈을 받치며 고개를 조아리는 힌두교도들의 모습은 몇 번을 봐도 낯설게 다가온다.

 하얀 대리석 바닥은 링감에서 흘러나온 물과 떨어진 꽃잎들로 축축하고 지저분하다. 찝찝함을 덜 느끼려고 발가락을 오므리고 발을 디뎌도 사원 밖으로 나오면 발바닥은 새까맣다. 링감 앞에 앉은 사제는 재빠르게 제물들을 거둬들이고 청소부는 부지런히 비질을 한다. 내가 받친 제물이 눈 앞에서 순식간에 쓸려 나가는 것을 보는 기분은 어떨까? 쓰레기로 전락해 버리는 화려한 꽃은 영혼을 잃은 듯했다. 사람들은 오직 제물을 바쳤다는 그 행위에만 의미를 두는 것 같았다. "내 손을 떠난 것은 내 몫이 아니다. 나는 신께 나의 뜻을 바쳤고 신은 나의 뜻을 받았다. 그러면 되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사원 내에는 7편 2만 4천 시구로 된 라마 왕의 무용담을 담은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 대서사시 라마야나와  신에 대한 노래인 바가바드 기타가 그림과 함께 벽면을 메우고 있었다.


 "고행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욕망을 비우고 자신조차 비우는 일이다."

사르나트 한국절 녹야원 법당

 비슈와 나트 사원을 나와 간단히 요기를 하고 사르나트에 있는 한국 절 녹야원에 들어가기로 했다. 여름에 지인의 소개로 처음 뵌 지훈 스님이 궁금하기도 하고 바라나시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전기 릭샤를 타고 사르나트로 향했다.  사르나트로 가는 도로가 공사 중이라 돌아가야 했는데 힘없는 전기 릭샤는 느긋하다 못해 기어가는 것 같았다. 거기다  릭샤왈라는 중간에 내려 소변을 보고 간식까지 먹었다. 우리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으니 목적지에 다 닿을 때까지는 릭샤왈라의 신경을 건드려  좋을게 하나도 없었다.  속에서는 울화통이 터져 죽을 맛인데도 겉으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참새들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한 전기 릭샤의 손잡이를 꼭 잡고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바라나시의 먼지를 손수건으로 가리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불안한 장난감 차를 타고 가는 기분이 들어 다시는 전기 릭샤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르나트는 붓다가 최초로 설법을 개시했던 초전 법륜지로 인도 불교 4대 성지 중 하나이다. 4대 성지는 붓다가 태어난 룸비니, 보리수 아래서 깨 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초전 법륜 지인 사르나트 그리고 열반에 든 꾸쉬나가르를 이른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붓다는 "깨달은 자"란 뜻이다. 붓다는 왜 사르나트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행했을까?


 싯다르타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싯다르타를 낳고 7일 만에 세상을 떠나 이모의 손에 자라게 된다. 싯다르타의 아버지 숫도다나 (정반왕)은 싯다르타가 태어나자마자 유명한 관상가 아지타 성인을 불러 싯다르타의 미래를 물어보았다. 아지타 성인은 싯다르타가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되거나 출가하면 붓다가 된다고 알려주었다. 정반왕은 싯다르타가 자신의 대를 이어 대왕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출가를 막기 위해  꽃과 산해진미가 가득하고 음악이 흐르는 아름다운 세상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인생은 이미 정해진 지도 위를 걷는 것처럼 싯다르타는 사문 유관을 관찰하던 중 병자와 늙은이 그리고 죽은 자를 보고 삶의 회의를 느끼게 된다. 세상이 아름다운 줄만 알았던 싯다르타는 병약하고 추악한 모습의 인간을 보게 된 것이다. 결국 북문에서 만난 사문이란 수행자를 따라 출가를 결심하게 되는데 이때 아들이 태어난 것을 알고 "라훌라" 즉 인생의 장애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길을 떠나 보드가야 고행림에서 6년 동안 신체의 모든 감각기관을 극도로 제어하는 고행을 하게 된다. 고행이란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다. 고행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욕망을 비우고 자신조차 비우는 일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지혜를 얻기 위한 고행은 쉽지 않았다. 고행을 하던 중 탈진한 싯다르타는 소치는 소녀 수자타의 우유죽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여 보리수 아래 앉게 된다. 그와 함께 했던 5명의 수행자는 싯다르타가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사르나트로 떠난다. 보리수 아래 홀로 앉은 싯다르타는 마왕 파순의 세 딸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된다. 붓다는 교화를 결심하고 5명의 수행자가 간 사르나트로 오게 된다. 5명의 수행자는 처음에는 붓다를 외면하려 하였으나 붓다가 일반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를 따라 사슴 동산에 앉아 붓다의 설법을 듣게 된다. 처음으로 사르나트에서 재가 신도(출가를 하지 않은 불교신자)가 생기게 되었고 불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르나트는 바라나시의 동북쪽 약 10km 떨어진 곳에 있다. 한적하고 깔끔한 가로수길을 지나면 다멕 스투파 모뉴먼트 사이트(Dhamekh Stupa Monument Site)와 사원들 그리고 고고학 박물관을 만나게 된다. 가로수길 양 옆으로는 햄버거와 샌드위치 등 다양한 길거리 음식과 기념 품을 파는 작은 노점들이 늘어서 있다. 신들이 그려진 커다란 벽붙이사진이 있는데 그림들이 재미있어 한참 쳐다보았다.


작은 참새는 사르나트에서도 무료입장이 가능했다. 아그라에서의 횡재를 잊고 있었는데 입장권을 사면서 다시금 생각나 행운을 얻은 듯 기분이 좋았다. 사르나트의 유적지는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볼거리가 많았다.

 

 " 진실만이 승리한다. (Satyameva Jayate)"

 

 다멕 스투파 모뉴먼트 사이트 안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넓은 잔디밭 위에 우뚝 솟은 붉은 스투파가 눈에 들어온다. 6세기에 세워져 일부가 훼손되긴 했지만 직경 26m 높이 13m의 대좌 위에 약 31m의 탑이 세워져 있는데 진흙으로 만든 철옹성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은 참새가 두 팔을 벌리고 스투파를 안았지만 참새가 스투파를 안았다기보다 거대한 스투파에 참새가 안겨있는 것 같았다. 스투파는 붓다의 상징이고 붓다의 가르침의 상징이다.

"엄마, 저 사람들은 지금 뭐 하는 거야?"

큰 참새가 탑 주변을 돌고 있는 수행자들을 가리켰다.

"간절함을 담아 예배를 보고 있는 거야. 간절히 원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데! 우리도 한번 해 볼까?"

 우리는 두 손을 가지런히 합장하고 스투파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참새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천천히 간절함을 되뇌며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을 옮겼다.

 

 넓은 경내를 천천히 걷다 보면 옛날에 승려들이 수행하던 승원을 볼 수 있다. 또 인도 최초로 통일제국을 이룬 마우리아 왕조의 제 3대 왕인 아소카 왕이 세운 석주의 토대를 볼 수 있다. 아소카왕은 칼링가 전투의 비참함을 본 후 불교에 귀의하여 무력 정복을 버리고 불법(Darma)에 의한 덕치주의를 추구하였다. 10년 동안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며 도처에 불탑을 세우고 불법을 역설하여 지방 불교를 세계적 종교로 격상시켰다. 자신의 정책이나 칙령, 법령을 새긴 석주를 30여 소에 세웠는데 뛰어난 조각예술을 자랑한다. 지금은 작은 유리관 안에 토대만 남아 있어 아소카왕의 노력이 헛되이 무너진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다멕 스투파 모뉴먼트 사이트를 나오면 대각선 쪽으로 맞은편에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5루피의 입장료가 싸게 느껴질 만큼 사르나트에서 발굴된 아름답고 진귀한 유물들이 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사면 사자상이 관람객을 맞는다. 아소카왕의 석주 머리에 있었던 사면 사자상은 인도의 국장(國章)이기도 하고 동전의 뒷면에 새겨져 있다. 받침대 위에 올라앉은 네 마리의 사자는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느낌을 주었다. 받침대에는 24개의 축을 가진 법륜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소와 말이 오른쪽에는 코끼리와 사자가 새겨져 있다. 사자상 아래에는  " 진실만이 승리한다. (Satyameva Jayate)" 란 글귀가 있다.


 "진실만이 승리한다" 정말 진실이란 있는 것일까? 가끔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하다.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것을 뒤엎는 새로운 진실이 밝혀질 때의 좌절감은 불신을 만든다. 언젠가 또 새로운 진실이 나올 것만 같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진실!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버티기엔 너무 멀고 험한 삶이 진실은 없다고 믿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실만이 승리한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때때로 삶은 너무나도 허무하기 때문이다.  


 "너를 잊으라"말하고 있었다. 나의 존재 자체를 잊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박물관 왼쪽에 있는 초전법륜상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떠오르게 했다. 헤르마 헤세가 고빈다의 입을 통해 말하는 붓다의 미소는 한결같은 , 잔잔한 우아한, 측량할 길이 없이 불가사의한, 어쩌면 자비로운 듯도 하고 어쩌면 조소하는 듯도 한, 현명한, 그 속뜻을 가늠하기 힘든 신비한 미소였다. 완성을 이룬 자의 미소이며 흘러가는 그 온갖 형상들을 내려다보며 던지는 단일성의 미소였다.


 반개한 눈과 꼭 다문 입술은 침묵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초전 법륜상에서 한걸음 물러서서 한참 동안 조각상을 응시했다. 마치 성당에서 말없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바라보듯 붓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붓다는 내게 말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초월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너를 잊으라"말하고 있었다. 나의 존재 자체를 잊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욕망들이 내가 아닌 것이다. 내가 아닌 나의 욕망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그것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나를 잊을 수 있을까? 돌아서서 나오는 발길이 무거웠다.

  참새들에게 박물관은 그리 흥미로운 장소가 아닌 듯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인데 여기저기 훼손된 돌덩이를 모아 놓은 듯한 박물관이 아이들에게는 심심한 놀이터에 불과했다. 그래서 입구에 있는 기념품점에서 참새들의 심심함을 달래야 했다. 큰 참새는 처음 여행을 떠날 때부터 나무로 만든 코끼리상을 갖고 싶어 했다. 마침 기념품점에 있어 두 개를 샀다. 조금 비싸긴 했지만 노점에서 파는 것보다는 야무져 보였다.


 물라 간다 꾸티 사원(Mulgandha Kuti Vihar) 뒤쪽으로 가면 사슴공원(Deer Park)이 있다. 사슴과 여러 동물들이 있긴 한데 불교 성지라기보다는 동물원이 있는 작은 놀이공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투파 옆에 자이나교 사원이 있는 것을 보면 1%의 불교신자를 가진 인도에서의 불교 입지가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나를 잊어야 한다. "

 

 사르나트에는 불교 성지 답게 승복을 입은 스님들과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다. 사르나트 주변에는 티베트 승원을 비롯하여 베트남, 일본, 캄보디아, 미얀마 절 등이  있다. 종교와 국적을 떠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된 각국의 절을 방문해보는 것도 좋다. 여름에 들러 보았는데 한적하고 엄숙한 법당에서 평온함을 느끼고 왔었다. 게스트 하우스가 있는 절도 있으니 숙박을 하면서 사르나트에 머무는 것도 좋을 듯했다.


 초전 법륜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국 절 "녹야원"이 있다. 녹야원은 사르나트의 옛 이름이다. 통도사의 분원이기도 한 녹야원에는 주지스님이신 지훈스님 한 분이 절을 지키고 있다. 우리가 절에 도착했을 때는 스님이 바라나시로 외출 중이셨다. 참새들과 법당을 둘러보며 스님을 기다리기로 했다. 일층은 스님이 머무르는 곳이고 이층에 법당이 있다. 그런데 법당에는 거대한 부처님이 없다. 초전법륜을 하는 붓다와 5명의 제자들이 있을 뿐이다. 참새들은 낮은 곳에 내려앉은 부처님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재미있고 신기해했다. 벽에는 부처님의 일대기가 만화로 그려져 있고 법구경의 글귀도 적혀있다.


 "엄마, 여기 침대가 있어!"

 큰 참새는 게스트 하우스 방문을 열어보고 활짝 웃었다.

"한 숨 잘래?"

"응"

 오랜만에 바쁜 하루를 보낸 참새들은 침대를 하나씩 차지하고 눕더니 금세 잠이 들었다.


 나는 입구에 있는 탑 주변을 돌며 바람을 느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는 사문 생활 중에 친구 고빈다와 명상과 욕망을 극복함으로써 초탈의 길을 가려한다.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자아로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수행이라는 것이 잠시 자아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일 뿐 자아로부터의 구제인 열반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결국 싯다르타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킨 부처 고타마를 만나고 속세로 들어가 평범한 인간으로 살면서 자아라는 존재가 실제의 삶을 통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나를 잊어야 한다. 복잡한 머릿속이 잊었던 두통을 불러오더니 긴 날숨을 토해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해가 저물고 스님은 오시지 않고 참새들도 일어날 생각을 않았다. 시계는 7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참새들을 깨우고 부엌에 들어가 저녁을 했다. 꼼꼼한 지훈 스님의 냉장고에는 김치가 가득했다. 배추김치, 갓김치, 깍두기, 총각김치 등 직접 담그신 김치통을 열어 밥상을 차리고 스님을 위한 밥 한 공기를 얌전히 떠서 뚜껑을 덮어놓았다.

 참새들은 푸짐한 식탁을 보자 환호성을 질렀다.

"얼마만에 보는 김치야!"

 커다란 대접에 넉넉하게 퍼 담은 밥을 뚝딱 해치우더니 맨입에 김치를 먹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밥상을  치우려고 하는데 스님이 들어오셨다. 급하게 돌아오신 건 아닌지 허락 없이 부엌을 써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무슨 그런 말을 하냐며 손사래를 치셨다.

 물에 만 밥에 김치를 얹어 식사를 마치신 스님께서 우리를 위해 드립 커피와 녹차를 내오셨다. 그리고 고급 스윗상자의 뚜껑을 열어 참새들 앞에 내놓으셨다.

"이거 맛있는 거야. 먹어봐!"

 참새들은 시장에서 먹던 스윗과 다른 스윗을 보고 고급스러움에 감탄했다. 스님께서는 바라나시에 다녀오신 얘기를 하신후 참새들에게 질문을 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고?"

"나입니다."

"허허 고것을 어찌 알았누?"

 참새들은 멋쩍게 웃었다. 참새들을 위한 스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은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변덕스럽다. 그래서 온전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세상에 불만을 터뜨리지 말고 그 불만을 내 안으로 가져와야 한다.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는 몹쓸 말들은 부모를 욕하는 것이고 정말 노력한 사람의 능력을 폄하하는 것이다.

"신이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멀리서 찾지 마. 신을 대신해 나를 만들어 낸 부모가 신이야"

 부모도 사람인지라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화를 낸다. 다툼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아무 탈이 없다. 그렇다고 부모와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이 부모의 뜻과 맞지 않으면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부탁해야 한다. 애원해야 한다. 싸워서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해야 한다. 한번 져 주고 평생 고통스러워하지 말고 한 번 져버리고 나중에 화해하면 된다. 부모는 자신의 욕심을

인정해야 한다.


"무엇이 되고 싶니?'

"경찰이요"

"애니메이션 작가요"

 가장 좋은 직업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남들과 공유할 수 있는 직업이다. 행복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행복해지려면 일을 사랑하고 일을 좋아하고 미쳐야 한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다. 나눔의 직업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함께 나누는 것이다.


 스님과 참새들의 대화가 따뜻했다. 나는 침묵을 했고 듣는 것에 충실했다. 녹야원 마당에 짙은 어둠이 내렸다. 스님은 참새들에게 숄을 꺼내 주시면서 내일 당장 짐 싸들고 들어오라고 하셨다. 고마운 말씀이었다. 하지만 바라나시에 머물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스님께서 아이들 데리고 위험하다고 택시를 불러주셨다. 인사를 하고 나서는데 혼자 남겨진 듯한 스님을 돌아보기가 마음 아팠다.

 

 참새들은 스님께서 내주신 숄을 이쁘게 접어 내려놓았다. 캄캄한 어둠 속을 달리는 택시 안에서 우리는 많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무엇을 얻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스님 말씀 새겨 두라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나는 참새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할 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것에 행복했다. 내일 다투더라도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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