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여러 가지 당황스러운 일들도 많았지만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보람도 있었고 또 나름 팀의 성과도 좋았기에 나 역시 이곳에 와서 많은 기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의 평가도 좋았고 나름 새로운 직장에 이만하면 잘 정착했다고 생각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평가의 자리.
나에게도 입사 후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시간이 찾아왔다. 팀장님과의 면담을 위해 나는 팀장님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동안 겪었던 여러 가지 장면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팀장님의 이해가 되지 않았던 행동들, 설득을 하기 위해 많은 설전을 벌였던 회의실에서의 내 모습
휴우~
그리고 이 자리까지 버티며 앉아있는 내 모습이 대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도 어쩔 수 없이 평가를 받는 입장이기에 이전과는 조금 다른 기운이 회의실에 맴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자 올해 어땠어요? 평가는 자신 있나요?"
팀장님이 나에게 한 첫마디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자신 있냐?' 이게 무슨 의미일까?
'너는 잘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아니다.' 이런 의미일까? 난 순간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표정을 숨기며 참고 있었다.
"올해 여러 가지로 수고 많았어요 새로운 곳에 와서 갑자기 프로젝트도 맡아 진행하고 일하랴, 적응하랴 정신이 없었겠네"
"아닙니다. 뭐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이고 또 제가 합류한 이유도 그 점에 있기에 팀장님과 팀원들의 도움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팀장님의 말투와 표정은 유독 더 날카로워 보였다.
" 과장님은 인복이 많으신가 봐요. 팀원들과도 잘 지내고, 타 팀과의 협업도 잘 마무리하시고,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좋으시겠어요."
나의 노력과 야근, 타 부서를 설득하기 위해 뛰어다닌 시간들을 단 한마디로 '운'과 '인복'으로 치부해 버렸다.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도 물론이지만 저도 관계를 잘 유지하고 협업을 이끌어 내기 위해 나름 많은 노력들을 기울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네 그 점은 저도 알죠 가벼운 이야기니까 너무 담아 듣지 마시고요"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어떤 평가 면담의 자리보다 매섭고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성과 지표야 뭐 숫자로 나오는 거니까 저도 이견은 없습니다. 좋은 편이죠. 그런데, 일하는 방식이나 태도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네요."
"태도... 말씀이십니까?"
"이전부터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단계마다 보고도 안 하는 경우가 너무 빈번해요. 내가 다른 팀 팀장 통해서 우리 팀 이슈를 듣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기가 찼다. 팀장님이 말한 그 '빈번한 누락'이란, 실무 선에서 즉시 처리해야 할 사소한 문의 메일에 참조(CC)를 넣지 않았거나, 점심 식사 메뉴를 정하는 것 같은 시시콜콜한 것들을 일일이 보고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정작 중요한 의사결정이 필요할 땐 "알아서 하라"라며 회피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절차를 운운하다니.
"업무에 지장을 줄 만한 중요 사안은 빠짐없이 보고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사소한 부분까지 팀장님의 리소스를 뺏는 게 비효율적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런 변명을 듣고 싶어서 꺼낸 말이 아니에요. 요즘 보면 누가 팀장인지 잘 모르겠어요. 타 팀에서도 다 과장님한테 먼저 연락하고~."
아, 결국 이거였구나. 그의 본심이 튀어나왔다. 업무의 효율이나 보고의 누락이 문제가 아니었다. 실무를 장악한 나에게 주도권이 쏠리는 것, 자신의 존재감이 흐릿해지는 것. 그 열등감이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반박이 튀어나왔다.
"팀장님, 제가 실무를 챙겨서 팀장님의 시간을 아껴드리면, 팀장님은 더 중요한 리더의 역할에 집중하실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저는 제가 팀장님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팀장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내뱉은 말은 내 귀를 의심케 했다.
"도움이라... 도움은 제가 당신한테 주는 거지, 저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똑같은 회의실이었다.
매번 팀장님께 의견을 제안드리고 설득하고, 누구보다 자신 있게 이야기했던 그 회의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난 이 회의실에서 이전의 내 모습을 찾을 수없었다. 분했다.
내 인사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마이너스되는 말이나 행동은 나에게 득이 될 것이 없으니까......
난 가만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은 지금까지 내가 진행했던 업무 방식에 대해서 하나하나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은 모두 '바꿔라, 고쳐라'가 전부였다.
난 더 이상의 이야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상한 평가 면담은 마무리되었다.
그간 나에게 쌓인 게 많았던 것일까? 왜 중간에 바로바로 이야기해 주지 못했을까? 그때는 잘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던 사람이 속마음은 아니었던 걸까? 난 수많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새로운 곳에서의 나의 첫 평가를 받는 자리에서 난 팀장의 매섭고 날카로운 감정의 칼날들을 보았다.
업무에 대한 피드백들은 전혀 없었다. 그저 나에게 담아 왔던 당신의 감정을 하나씩 꺼내놓은 자리일 뿐이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 이 자리는 업무 성과를 리뷰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네가 아무리 일을 잘해도, 너를 평가하고 짓밟을 수 있는 힘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일종의 '복종 서약식'이었다.
회의실을 나오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나에게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했지만, 정작 문제는 그의 '자격지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가장 열심히 뛴 팀원의 의욕을 꺾어버렸다. 하지만 팀장님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오늘 그가 휘두른 그 감정의 칼날이 나의 자존심을 꺾은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남아있던 마지막 신뢰의 끈을 끊어버렸다는 사실을.
그가 이겼다고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나는 조용히 마음속에서 그를 '나의 리더' 목록에서 지워버렸다. 이것이 그가 받게 될 진짜 성적표였다.
1. 리더는 '도움을 받는' 자리다.
"도움은 내가 주는 것"이라는 팀장의 말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리더야말로 팀원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 팀원의 유능함을 자신의 무능함을 비추는 거울로 생각하는 순간, 리더는 고립된다.
유능한 팀원의 도움을 기꺼이 받고,
그것을 팀의 성과로 연결하는 것이 진짜 리더의 능력이다.
2. 평가는 '감정 풀이'의 도구가 아니다.
평가는 1년 동안의 성과와 성장을 논하는 공적인 자리다. 하지만 많은 리더가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감정을 '태도'라는 모호한 단어로 포장해 쏟아내는 기회로 삼는다. 객관적 사실(Fact)이 빠진 감정적 비난은 팀원의 의욕을 꺾는 것을 넘어, 조직에 대한 로열티를 파괴한다.
3. 통제하려 할수록 멀어진다.
팀장이 "누가 팀장인지 모르겠다"라며 화를 낸 이유는 통제권을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권위로 찍어 누르며 통제하려 할수록 팀원들의 마음은 더 빠르게 떠나간다.
진짜 권위는 직책이 아니라, 팀원들이 리더를 신뢰할 때 자연스럽게 생긴다.
나 역시 지금의 리더의 자리에서 일을 하며, 나보다 유능한 팀원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난 내가 겪었던 이전의 평가 면담에서의 팀장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리더의 한마디로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몸소 실감했기 때문이다.
생각의 표현이 더 뚜렷해진 세대라고 이야기하지만, 지금보다 더 오래 전의 시대에서 일했던 사람들도 분명 다 자신의 생각을 갖고 일을 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더 커질 수 있도록 리더는 그 생각을 통제하고 관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관심과 질문을 통해 팀원의 생각을 확장시켜 팀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리더인 당신이 지금 팀원과 마주 앉아 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는 지금 이 사람의 성장을 돕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 사람을 깎아내리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