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상대를 만나기까지
(5)
초 5 때 또 전학을 갔다. 벌써 초등학교만 세 번째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아싸가 된다. 아이들은 2차 성징이 와서 사춘기가 시작되었고 무리 지어 다니는 여자애들 틈으로 조용한 성격으로 친구를 만들기 어려웠다. 물론 같이 다니는 몇몇 아이들이 있었지만 5학년이 되니 친구 집에 가지도 않고 놀이터에서 놀지도 않아 이제 하교 후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게 되었다. 이 때도 좋아하던 남자애들이 소소하게 있었지만 반에서 인기 있는 애들을 좋아해도 누구에게 알리지 않았고 내 마음을 숨긴 채 혼자 좋아하다 말았다.
초 6 때는 갓 군대 전역 후 처음 선생님이 된 남자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이셨다. 엄청 강압적이어서 반발심도 가졌었는데 특히 내 눈엔 반에서 제일 예쁘고 공부도 1등으로 잘하는 여자애를 편애하는 게 보여서 속으로 질투를 많이 했다. 선생님이 싫기도 했지만 잘 보이고 싶은 양가적 마음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남자 선생님들에게 관심을 갈구했던 것 같다. 아빠와 어색하고 정서적 결핍이 있어서 다른 남자 어른에게서 사랑과 인정을 채우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자들은 예쁜 애들만 좋아한다는 적의와 분노가 이때부터 쌓이고 있었다.
(6) 철벽 1
중학교 시절은 이성관계가 제일 화려했던 시기다. 처음으로 나와 친분이 있는 친구를 좋아했다. 중 1 때 나는 의외로 인기가 있었다. 내가 반 1등 이기도 했고 모범생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반에서 좀 날티 나지만 인기 있는 남자애가 있었는데 내가 1학기 동안 그 아이를 좋아했다. 그리고 걔 친구 중에 웃기면서 공부를 좀 잘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와 친해지면서 문자를 엄청 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시험기간에 문자로 고백을 받았다. 한창 날티 나는 남자애를 좋아하던 시절이라 고백을 받은 게 너무 당황스러웠고 (처음 받은 고백이기도 했다) 시험기간에 어떻게 마음을 다잡고 공부할지 걱정이 되었다(나는 점점 전교 등수를 높여 전교 10등 권에 들었다.) 그냥 공부에 집중하고 싶다며 거절했던 것 같다(철벽 1: 외모가 내 이상형이 아니어서. 그런데 깊은 수렁에 빠짐). 그래도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주니 자존감이 올라가기는 했다. 나중에 내가 좋아했던 남자애와 문자를 하다 우연히 그 남자애도 나를 좋아했다는 (과거형..)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같은 반 애가 두 명이나 나를 좋아한다? 그것도 인싸인 애들이? 신기했다. 걔한테 나도 좋아했었다고 말했던 것 같다. 이미 나도 좋아하는 마음이 지나간 후여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 나에게 고백했던 아이에게 자꾸 마음이 커져갔다. 친하기도 했고 성격도 좋고 공부를 열심히 하려는 아이였다 (결국 그 아이는 한의대에 갔다.)
그 아이에 대한 마음은 2년이 갔다. 내가 찼는데 나중에 내가 더 미련을 가진 거다. 그때 당시 유행했던 버디버디 메신저에는 카톡처럼 상태 메시지를 입력할 수 있는데, 그 아이가 자꾸 포르투갈어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써놓았다. 나는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그 당시엔) 강하게 확신이 들었고 나도 일본어 같은 말로 화답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가슴앓이를 하다 나중에 걔가 같은 반 예쁜 여자애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음을 접게 되었다. 결국 남자는 외모를 보는구나. 외모 컴플렉스가 더 심해졌다. 내가 누구를 좋아할 수는 있지만 상대방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쉽게 마음이 바뀌는데 어떻게 그 마음이 진실한지 믿을 수 있을까. 영원히 나만 바라봐주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고 싶었다.
(7) 철벽 2
중 3 때는 같은 학원에 다니고 같은 아파트에 살지만 다른 학교에 다니는 어떤 남자애를 좋아했다. 말 한번 섞지 않고 영어 학원에서 본모습만으로 좋아하게 된 금사빠다. 그래도 당시 싸이월드를 타고 들어가 사진도 보고 반에서 반장?(혹은 학생회장) 도 하는 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몇 동 사는지 궁금해서 학원 셔틀에서 내리면 몰래 뒤를 밟기도 하는 스토커 기질이 있었다. 아마 동 호수를 알게 되면 편지를 전해주려고 그랬던 것 같다... (절대 얼굴 보고는 얘기를 못해서 편지를 좋아한다...) 과거의 나 소름 돋는다...
그리고 그 영어 학원에서 만난 어떤 아이와 처음으로 사귀게 된다. 이 아이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내가 전학 왔던 초 5 때 같은 반을 했던 아인데 공부를 아주 잘했다. 중학교를 전교 1등으로 입학한 아인데 그냥 공부 잘하는 게 재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중 3 때 특목고 입시를 하며 매번 밤늦게 같은 학원 셔틀을 타고 집으로 걸어오는데 예전에 같은 반을 했지만 지금은 친하지 않은 사이라 내 뒤에서 들려오는 그 아이의 발걸음 소리가 왠지 모르게 의식되고 긴장되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아무 말없이 둘이 밤길을 걸었던 것 같다. 그러다 내 친구가 걔랑 같은 반이라 쉬는 시간마다 걔네 반을 들려 자주 보게 되었고, 마침내 고등학교 특목고 입시를 끝내고 각자 진학할 학교가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걔가 갑자기 아파트 놀이터로 불러내어 고백을 했다. 나는 그간 짝사랑을 하며 생긴 나에 대한 외모 컴플렉스, 남자에 대한 비관적인 마음, 내 마음을 내가 모르는 혼란 속에서 철벽을 쳤고, 너를 좋게 생각하고 아끼지만 이 관계가 깨질까 봐 연애를 할 마음은 없다는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최근에 본 책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인용하며 소유를 원하지 않지만 내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거면 사귀어도 되지 않냐고 했고, 결국 그의 말에 넘어가 사귀게 되었다. (철벽 2: 내 마음을 내가 모르겠어서. 별로 좋아하는 마음이 크지 않아서. 그런데 거절을 거절 당해 사귀게 되었다.)
학교 음악실에서 서로를 위한 피아노 곡을 연주해 주며 꽤 로맨틱한 관계를 이어갔지만 결국 사귄 지 80여 일 만에 그쪽 부모님의 반대로 눈물로 헤어지게 됐다. 안 헤어지면 고등학교 등록금을 끊겠대나 뭐래나.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도 지켜주지도 못하는 약한 남자였던 듯하다. (당연하지... 고딩이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할 돈과 자유가 어디 있다고...)
고등학생이 돼서 또 싸이월드 염탐을 통해 그 아이가 다른 여자아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다. 그놈의 싸이월드... 나는 또다시 짜게 식으며 세상에 믿을 남자 없다고 마음을 굳히게 된다.
(8)
고등학교에서는 대학 입시로 힘든 와중에 다른 반에 인기 있었던 S군을 짝사랑했고, 같은 반 K군과 친해지다 좋아하게 된다. 여전히 짝사랑은 동경이었다. 입시로 힘든 기간, 잊고 싶은 나날... 이쯤 해둔다.
(9) 철벽 3
대학교 1학년. 자유가 주어지는 시기. 내 마음도 설렌다. OT에서 만난 과 선배를 좋아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인기남들이 끌릴만한 외모나 성격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런 나의 성격과 외모를 좋아하는 순박남들이 있긴 있다. 그런데 왠지 그런 사람들에게는 끌리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 때, 같은 새터반 동기 오빠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원래 난 언니오빠에게 반말을 잘 안 하는데 그 오빤 엄청 편해서 반말을 하는 사이였다. 새터 반장 여자애와 셋이서 시험 끝나면 DVD 방 가서 영화 3편 보고 밤새서 나오고 (인생 최대 일탈) 뭐 그런 사이였다. 거의 남자로 보지 않은 것 같다. 남사친... 그런데 오빤 날 좋아하고 있었다. 외모도 나처럼 수수하고,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착하고, 교회 다니고 그랬다. 그런데 난 왠지 따분해 보였다. 이제 자유를 만끽하는 20살에게 더 재밌는 사람, 인생 경험 많은 사람이 끌렸다. 직접 고백을 한건 아니지만 나는 마음이 없었기에 간접적으로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철벽 3: 외모가 내 스타일이 아님. 아직도 눈을 낮추지 않은 상태. 비현실적인 상대를 좋아함. 이어질 가능성 없음.)
20대 초반 인생 최대 고민은, 언젠가 결혼을 할 텐데, 연애를 해야 결혼을 할 수 있을 텐데, 도대체 연애는 어떻게 하냐는 거였다. 현실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은 사람만 좋아하고 주변 남자들이나 지인들은 친구로만 대하다가 고백하면 철벽 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그런데 또 날 안 좋아하면 그제야 마음이 가는) 나는 마음이 아주 고장 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가 만 25살, 27살이 되는 해 2월에 결혼을 해 지금은 결혼 10년 차가 되었다. 21살에서 26살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대체 누굴 만난 걸까?
표지 이미지: Unsplash의Kateryna Design (중3 때 나눴던 커플 아이템 핸드폰 고리와 유사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