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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가와 페미니스트

by 윤희웅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엘 트라가(el traga) 식당은 고급까지는 아니어도 한국 사람들에게 꽤 괜찮은 식당이었다. 일단 응대를 잘했다. 자리를 안내하고, 바로 주문을 받고, 주문을 확인하며 퍼펙트를 외쳐줬다. 나 역시 엄지 척하며 응대했다. 그런 나에게 웨이터는 윙크를 날렸다. 난 여자를 좋아하지만, 여유와 미소, 유머까지 있는 남자도 꽤 멋있었다. 음식도 빠르게 나왔다. 샹그리아는 보기도 좋고, 은은한 향과 달콤한 와인이 잘 어울렸다. 문어를 곁들인 먹물 리소토와 갈릭 쉬림프를 먹었다. 문어를 먹을 때 약간 긴장을 했다. 딸에게 말은 안 했지만, 피곤한지 잇몸이 내려앉아 이빨이 흔들렸다. 질기거나, 딱딱한 음식은 먹기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이 써질 만큼 잇몸이 아팠다. 그래도 생각보다 문어는 질기지 않았다. 먹기 좋았다.

“만족스럽습니까?”

“퍼펙트는 아니지만 베리 굿입니다.”

“그럼 계산하겠습니다.”

딸은 계산서를 받아 들고서 꼼꼼히 살폈다.

“왜? 잘못됐어?”

“이럴 줄 알았어. 전에 왔을 때도 계산이 틀리더니, 또 그러네. 우리 아까 빵을 반납했잖아. 그런데도 빵값이 계산서에 떡하니 올라와 있어. 이건 실수가 아니라 계획적인 범죄 같아.”

웨이터는 계산서를 보더니 ‘미안(sorry)’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 모습을 보니 일부러 실수한 것 같다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맛있게 잘 먹었는데,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식당을 나와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카르푸’를 들렀다.

“오늘은 맥주 대신 와인을 마셔볼까?”

“와인이 종류가 많아서 고르지 못하겠어.”

“내가 좋은 와인을 고르는 팁을 하나 알려줄게. 와인에 메달이나 목걸이가 있으면 실패하지 않아.”

“메달, 목걸이, 무슨 말이야?”

“잘 살펴보면 와인에 ‘올해의 와인’처럼 상을 받거나, 몇 초에 몇 개가 팔린다는 광고가 붙어 있거든. 그런 와인을 고르면 절대 실패가 없어.”

“여기 병에 메달이 4개나 붙어 있어. 거기다 금메달이야. 이런 와인을 고르라는 말이잖아.”

“학습 능력이 뛰어나군.”

“술이잖아.”


서로 핸드폰을 보며 과일에 와인을 마셨다.

“너 페미니스트지? 나는 노동운동을 했었고. 노동운동가와 페미니스트가 서로 비슷한 것 알아? 우리는 싸움에서 절대로 지지 않아. 포기하지 않지. 조금은 늦더라도 언젠가는 세상이 변하리라 믿기 때문이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사람들은 노동운동이 너무 과격하다고 말해. 그런데 좋게 말하면 듣지를 않으니까 점점 과격한 방법을 찾는거지. 그럼 사람들은 이때다 하며 공격하지. 누구는 삭발하고 싶고, 단식하고 싶고, 높은 곳에 오르고 싶겠어? 나는 페미니즘과 노동운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좋게 말하면 들어 주지 않으니까, 무시하니까, 세상이 변하지 않으니까 싸울 수밖에 없지.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삶이 나도 모르게 몸에 익어버린다는 거지. 말투가 도전적으로 되고, 행동이 전투적으로 변해. 그러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피하게 돼. 그래서 어느 순간 끼리끼리만 모여 있고, 서로 위로하며 나와 다른 사람들을 욕하며 살지. 나도 그랬어. 그런데 너를 보니까 꼭 나 같아. 모든 남자가 적이지? 아빠도 남자니까 적이고.”

“아빠 말처럼 남자들은 다 그렇게 이야기해.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야. 그 말이 곧 남성 우월주의야.”

“엄마가 이야기하면 괜찮고, 아빠는 남자니까 안 되고?”

“아빠도 남자야. 그건 변하지 않아.”

“나도 한때는 빨갱이 소리 많이 들었어. 그런데 지금은 빨갱이 소리보다는 진보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 세상을 바꾸려면 나와 다른 사람들과 적이 되어서는 안 돼.”

“나는 사람들과 적이 되고 싶지 않아. 남자들이 우리를 적으로 만든 거야.”

“너도 나처럼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 기분 나빠.”


어떻게 해야 정말 잘 사는 것일까를 고민하게 될 때가 있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자신에게 달려 있다. 옳다고 느껴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는 최선의 길이다. 잘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핵심적인 가치관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하루, 하루 행동을 조정한다. 마지막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핵심은 사람이며, 그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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