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플라멩코 박물관 입구 앞에 섰다. 예매를 해둔 덕에 줄을 서지 않고, 바로 입장이 가능했다. 공연시간 30분 전에 입장했음에도 객석은 벌써 가득 찼다.
“아빠, 여기 앉자.”
“안돼, 기둥이 있잖아.”
“그럼, 여기 앉자.”
“앞사람이 너무 커. 안 보여.”
“조금 뒤쪽에 앉더라도 잘 보이는 곳이 좋아. 여기 앉자.”
“아빠, 흥분 돼?”
“내가 왜 떨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막 흥분되고, 떨린다. 그런데 저기는 뭐 하는 거야?”
“플라멩코 배우기를 하는 것 같은데, 진작 알았으면 신청할 걸 그랬지?”
“그러게. 저기 배 불뚝 아저씨보다 내가 더 잘 출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든다. 오늘 공연은 어제 스페인 광장에서 본 플라멩코와는 다르겠지?”
“내가 공연을 몇 번 봤는데, 내 눈에는 노래나 춤 모두 다 비슷하던데.”
“광장에서 추던 젊은 배우와 늙은 배우도 나는 느낌이 다르던데.”
“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 나는 비슷해 보였어.”
“플라멩코가 집시들의 춤이라고 했잖아. 집시라면 서민도 아닌 하층민이잖아. 서러움이 얼마나 많았을까?나는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 기타 소리 그리고 우리처럼 한이 담긴 노랫소리까지 정말 기대된다. 여기 공연장도 일부러 동굴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것 같아.”
“그러게. 꼭 동굴 속에 들어온 느낌이야.”
배우들이 무대로 나왔다.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과 가수가 먼저 무대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기타 소리와 함께 무용수가 들어왔다. 남자 무용수와 여자 무용수 둘이었다. 나이가 있어 보였다. 노래가 시작되자, 무용수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무용수들의 움직임에 따라 날아다니는 땀방울, 목에 굵게 드러나는 핏줄, 바닥이 깨질 듯 울리는 구둣발 소리, 삶을 포기한 듯한 슬픈 표정까지, 한 시간가량 진행된 공연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박진감 넘쳤다. 플라멩코 노래는 슬픈 목소리와 말하듯이 읊어지는 가사는 우리의 판소리나 시조창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슬픈 노래와 화려한 춤은 묘하게 어울렸다. 가수는 노래를 부르며 일부러 한 박자씩 쉬어갔다. 숨을 고르는 듯, 아니 깊은 한을 뱉듯 한 박자 쉴 때마다 객석은 울렁거렸다. 관객들 역시 배우와 함께 숨을 골랐기 때문이었다. 춤은 처절한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몸의 표현 중 얼굴 표정이 가장 중요했다. 그 표정을 ‘카라비에라(caravieja)’ 부른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늙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무용수들 나이가 있어 보였던 것 같다. 그 표정에서 할머니의 얼굴이 보였고,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공연이 끝나고 나는 눈물을 조용히 훔쳤다.
“우리 윤 작가님, 제대로 감동 받으셨네요.”
“공연 또 보고 싶다. 가기 전에 한 번 더 보자.”
“감동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두 번 보면 지금과 같은 감동이 또 안 옵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지금 느끼는 감동을 가슴 깊이 새기세요.”
“그렇겠지. 정말 좋은 공연을 봤다.”
“마음에 무척 드셨나 봅니다.”
“아빠 나이쯤 되면 크게 감동받을 일이 없거든. 그런데 스페인 와서 하루에 한 번씩 감동받는다. 너무 좋다.”
“제가 한 번 더 감동을 드리겠습니다. 저녁 식사는 ‘so so’ 한 점심이 아닙니다. 제가 전에 세비야 왔을 때 감동받았던 식당입니다.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뜻밖에 감동은 저녁 식사 전에 한 번 더 찾아왔다.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타로(점성술) 서점이었다. 타로에 관심 갖고 공부한 지 일 년쯤 됐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타로카드를 들고 갔다. 그들의 고민을 듣고, 같이 슬퍼하며, 응원했다.그런데 우연히 타로카드와 그와 관련된 책들이 있는 서점을 발견한 것이다. 또다시 흥분됐다. 많은 카드를 구경하고, 관련된 책들도 펼쳐봤다. 타로카드의 오리지널 버전을 하나 구입했다. 세상의 모든 고민을 내가 다 해결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빠, 오늘 럭키비키네.”
“럭키비키가 도대체 무슨 뜻이야?”
“원형적 사고라고 아이브 멤버 장원영이 유행시킨 말이야.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적인 결과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나 원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해.정신 승리하고는 다른 말이야.”
“지금 상황 하고는 럭키비키는 안 어울리는데?”
“대충 하자. 지금 따지는 겁니까?”
“그래, 대충 하자. 오늘 아빠는 럭키비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