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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기 May 08. 2023

(6) 한국통신 vs 데이콤, 100년 통신독점 깨지다

3부. 1세대 통신(1G)

“정부는 그간 독점체제를 유지해 오던 각종 통신망 사업에 경쟁원리를 도입하고 민영화와 개방화 등 다각적인 구조조정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정보산업과 첨단산업의 육성과 기술개발에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1)


1990년 4월 21일 제주 성산읍에서는 제주-육지 간 해저 광케이블 건설 준공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해저망 연결과 함께 향후 통신시장에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 선언했다. 이미 1980년 후반부터 국제적 압박과 내부 자생력 강화라는 숙제를 떠안고 있었지만 대통령이 직접 나서 향후 정보통신 비전을 선언한 일은 이례적이었다. 


체신부는 보다 본격적으로 통신사업에 대한 재편을 단행했다. 5월 10일 공중통신사업자 제도를 회선설비를 보유하고 있는 ‘기간통신사업자’와 그 회선을 빌려 서비스하는 부가통신사업자로 구분했다.2) 이 같은 분류는 어느 정도 숙고가 있기는 했으나 현재까지도 법상 유지되고 있다. 또한 특정인의 소유지분과 외국인 자본참여를 제한해 수평화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제도 정비에도 나섰다. 


같은 해 7월 12일 체신부는 국내 정보통신시장을 대대적으로 바꿀 ‘통신사업 구조조정’을 발표한다.3) 구체적으로 ▲시장경제원리 도입을 통한 통신사업 경쟁력 강화 ▲통신수요의 다양화와 고도화에 따른 신규 서비스 창출과 확대 ▲직접적인 규제와 지도를 벗어나 자율을 바탕으로 한 간접적 조정 정책으로의 전환 ▲민간경영기법에 의한 시장 활성화와 창의적인 육성 도입 ▲경쟁력을 바탕으로 해 결과적으로 통신사업의 발전을 가속화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정보통신 서비스는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전통적인 음성 전화를 이용한 통신과 네트워크를 활용한 데이터 통신, 카폰과 삐삐, 휴대폰 등 무선 기반의 이동통신이다. 각각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한국데이터통신(현 LG유플러스),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이 독점운영을 하는 분야다. 


즉, 체신부의 ‘통신사업 구조조정’은 각 분야별로 독점운영 구조를 깨고 경쟁원리를 도입해 정보통신 경쟁력을 강화시킨다는 의미인 셈이다. 또한 이 같은 결정은 각각의 제2사업자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위 잘 나간다는 재벌 부호들이 군침을 흘릴만한 내용이었다. 


한국전기통신 vs 한국데이터통신

한국전기통신과 한국데이터통신 로고 [사진=각 사]

이 중 가장 먼저 구조조정이 일어난 분야는 전화 사업과 데이터 전송사업 분야다. 


앞서 체신부가 1988년 한국전기통신공사와 한국데이터통신에게 ‘공중전기사업자업무영역 조정지침’을 전달했으며 전기통신공사가 데이터 사업을, 한국데이터통신이 전화 사업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와 조율을 진행했다. 


음성전화 서비스의 경우 국제와 시외, 시내 전화로 구분해 2~3개 사업자가 경쟁할 수 있도록 했다. 비음성 서비스(데이터 전송)는 한국데이터통신이 기반을 쌓을 수 있도록 광케이블 전용회선망 구축을 독려했다. 


한국전기통신공사와 한국데이터통신은 서비스 경쟁을 위한 기반을 닦는데 전념했다. 특히 민영화 바람이 거셌던 한국전기통신공사에 맞서 한국데이터통신은 자립성장 배경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했다. 


한국데이터통신은 1990년 3월 29일 창립 8주년을 맞아 2~3년 내 독자적인 사업영역을 확립하는 한편 비음성 자료 전송 서비스에 전념하겠다는 비전을 선포했다.


앞서 1987년 4월 국내 최초로 컴퓨터 통신 전용망인 데이콤네트를 구축해 국내 주요 도시와 해외 52개국을 컴퓨터와 컴퓨터가 연결될 수 있도록 데이터망을 구축했다. 443명에 불과한 가입자와 기업은 7천400여 회선으로 늘어났다. 꾸준한 사업 고도화를 통해 대기업과 국가기관, 금융기관과 중소기업, 학교 연구소 등도 연결하는 특정통신 가입자의 경우 5만 7천400여 회선까지 증가했다. 국내 부가가치통신망(VAN) 사업과 행정전산망사업을 전담 추진하기도 했다.4)


다만, 한국데이터통신은 사업확장이 지속되는만큼 그에 따른 불안도 상당히 커져갔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민영화를 이룰 한국전기통신공사가 경쟁 대상이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내부적으로 팽배했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한국데이터통신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90년 6월 12일 체신부는 한국데이터통신이 1992년 하반기부터 국제뿐만 아니라 시외전화 사업까지 참여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통신위성을 임차해 별도 국제통신망을 갖추게 하고, 시외전화는 설비에 따른 비용부담이 크다는 전제 하에 한국전기통신공사 네트워크를 임차 사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5)


독점적으로 사업을 운영하던 한국전기통신공사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역시나 즉각 반발에 나섰다. 국제전화에 대한 경쟁은 어찌해서 감내하겠으나 시외전화만큼은 기존 독점을 보전해 줄 것을 요구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한국데이터통신이 선호했던 식별번호 ‘007’에 대해서도 기존 사용처를 감안해 난감함을 표하며 견제했다. 당시 한국전기통신공사는 국제전화로 식별번호 ‘001’을 사용해 왔다. 


한국통신공사를 바라보는 시장의 시선은 싸늘했다. 무엇보다도 반박 자체가 급작스러웠다는 반응이다. 앞서 이같은 움직임은 지난 1988년부터 진행돼왔다. 그간 별다른 행보가 없었던 한국통신공사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움직인다는게 말이 안된다는 것. 즉, 되돌릴 수 있는 또는 반대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으나 그 시간을 죽였다는 것. 다시 말해 최종 결정을 앞두고 반박 논리를 펼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독점화를 유지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는게 업계 지적이었다. 


다만,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제시한 시내전화사업의 적자 등을 감안했을 때 시외 전화 경쟁 도입이 이른 판단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따랐다.6) 


하지만 애석하게도 시장 반응과 달리 정부는 기존 결정을 뒤집었다. 체신부는 결정이 내려진지 1개월만에 국제전화에 경쟁도입은 기존 계획대로 하되, 시외전화는 한국전기통신공사의 독점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정리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7) 이 역시도 한국데이터통신에게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100년 통신독점구조 깨지다

국제전화 001 홍보 사진 [사진=KT]
국제전화 002 홍보 사진 [사진=HS에드]

국제전화 경쟁도입은 단순히 2개 사업자로 늘어났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국내 정보통신 역사에 견줬을 때 한 획을 긋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우리나라는 1880년대 전화기를 도입했을 당시, 1902년 서울과 인천을 잇는 시외전화가 개통됐을 때도 국영독점으로 사업이 이어졌다. 100년 동안 국가가 독점적으로 통신사업을 키워온 셈이다. 즉, 통신사업에 경쟁원리를 도입하고 또 다른 제2의 사업자를 둔다는 것은 100년간 유지됐던 독점구조가 깨졌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만큼 두 사업자에게 통신시장에서의 경쟁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로 인식됐다. 즉, 사활을 걸 정도로 예민하기도 하고 절실하기도 했다. 그에 따른 절치부심은 약 10여 년간 이어온 명패를 바꾸는 작업에서 두드러졌다. 


한국데이터통신이 1991년 말부터 국제전화 사업을 영위할 수 있다고 확정된 때, 한국통신은 이미지 쇄신에 나섰다. 1990년 12월 10일 한국전기통신공사는 ‘기업문화헌장 선언 및 기업이미지 통일화 발표식’을 개최한다. 기업 약칭을 새로 만들고 심벌마크를 세웠다. 이때부터 한국전기통신공사는 ‘한국통신’으로 명패를 바꿔 달았다. 현재 영문명으로 쓰이는 ‘Korea Telecom’은 이때 세워진 명패다.8) 


한국통신은 1991년 민영화 절차에 따라 주식 상장이 예정돼 있는 상황이었으며, 통신서비스 시장 개발과 통신사업 구조조정 조처로 환경변화에 대응하고자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조치에 한국데이터통신 역시 민감하게 대응했다. 1991년 10월 19일 국제전화산업진출을 계기로 기업 이미지 통일화 작업에 착수해 회사명을 기존 영문 약칭으로 썼던 ‘데이콤(DACOM)’으로 확정했다. 이전에는 국문인 ‘한국데이터통신’과 영문 ‘데이콤’이 혼용돼 쓰였으나 이때부터는 모든 명칭이 ‘데이콤’으로 통일됐다.9)


약 100여 년의 통신국영독점구조가 깨진 날은 1991년 12월 3일. 데이콤이 드디어 국제전화를 개통하면서부터다. 식별번호는 당초 선호했던 ‘007’ 대신 ‘002’를 부여받았다. 미국과 일본, 홍콩을 대상으로 서비스가 시작됐다. 


데이콤은 한국통신보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분단위 과금체계를 초단위로 전환했다. ‘쓴 만큼만 내세요’라는 마케팅 문구가 쓰인 거의 첫 사례다. 일각에서는 ‘1천 원 수준(당시)인 다방커피 한잔 값이면 미국과 통화할 수 있다’라는 홍보 문구가 탄생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통신의 ‘001’보다 국제전화요금을 5% 더 저렴하게 책정해 고객 확장에 나섰다.10) 


이 같은 대대적인 마케팅 활동에 따라 데이콤 국제전화 ‘002’는 3개월도 채 걸리지 않은 시기에 전체 국제전화 사용률 10%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11)


한국통신 역시 데이콤이 독점운영해 온 데이터 전송에 즉각 뛰어 들었다. 1991년 12월 9일 국제 데이터통신 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이넷-P’ 서비스를 시작한 한국통신은 데이콤보다 5% 더 저렴한 요금을 내세워 사업 확장에 나섰다.12)


여담으로 데이터 전송 부문에서 경쟁에 나선 한국통신과 데이콤은 이후 한 시대를 풍미한 PC통신 시장에서 자웅을 겨루기도 했다. PC통신 서비스의 양대산맥인 ‘천리안’은 데이콤이, 한국통신은 ‘하이텔’을 운영했다.



1) <각종 통신망 경쟁 도입>, 매일경제, 1990. 4.21.

2) <통신사업 특정인 소유 제한>, 매일경제, 1990. 5.10.

3) <통신공 독점 국제전화 데이타통신 참여허용>, 매일경제, 1990. 7.13.

4) <"전용망등 2~3년내 독자 영역 확립">, 조선일보, 1990. 4. 4.

5) <국제-시외전화사업 데이타통신사 참여 통신서비스 경쟁시대>, 동아일보, 1990. 6.12.

6) 신동호 기자, <'통신사업 구조조정' 싸고 논란 '국제・시외전화사업 이원화' 공청회>, 한겨레, 1990. 6.21.

7) <통신공 독점 국제전화 데이타통신 참여허용>, 매일경제, 1990. 7.13.

8) <한국통신 민영화 이미지 본격화>, 경향신문, 1990.12.11.

9) <한국 데이타 통신 '데이콤'으로 개명>, 한겨레, 1991.10.19.

10) 안종주 기자, <데이콤 국제전화서비스 개시>, 한겨레, 1991.12. 3.

11) <데이콤 국제전화시장 11%점유>, 매일경제, 1992. 1. 9.

12) <국제데이타통신서비스>, 매일경제, 1991.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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