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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기 May 08. 2023

(5) 韓 이동통신 급성장, 100만 가입자 돌파 순간

3부. 1세대 통신(1G)

88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은 이동통신 시장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때다. 


한국전기통신(현 KT)과 한국데이터통신(현 LGU+)이 각각 영위해 오던 전화와 데이터 사업을 함께 수행할 수 있게 됐으며,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한국이동통신으로 사명을 변경해 국내 첫 이동통신 사업을 전개했다. 


이 같은 변화는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장에 우리나라의 정보통신 경쟁력을 확인시켜 줬다. 통신 강대국에게 한국은 꼭 공략해야 할 중요한 요충지로 떠올랐다. 대외적인 압박이 커지긴 했으나 이를 통해 내실을 다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동통신 시장은 순풍에 돛을 단 듯 빠르게 성장했다. 공중전기통신사업자로 독립의 깃발을 올린 ‘한국이동통신’이 중심축으로 자리했다. 차량다이얼전화(카폰)와 무선호출서비스(삐삐), 휴대폰 서비스 등 이동통신 서비스는 한국이동통신의 독점 시장이었다. 


물론 비싼 단말 가격과 유지보수비, 높은 통신요금제, 까다로운 가입절차 등이 대중화를 가로막기는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공급 대비 수요만큼은 폭발했다. 


한국이동통신 독립…정부재투자기관 첫 기업공개 사례


88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부터 정부는 정보통신 역량을 향상하기 위해 골몰했다. 한국통신공사의 민영화도 이때 거론됐다. 국가 주도의 독점운영을 벗어나 민간 시장경쟁체제를 마련해야 했다. 이를 위해 민간자본이 유입돼야 하고, 기업공개가 전제돼야 했다. 더 나아가 민간 기업의 직접적 참여도 고려됐다. 


1989년 5월 1일 체신부는 지난해 공중전기통신사업자로 지정된 한국이동통신의 경쟁력 강화를 목적으로 ‘자율경영을 위한 기반조성계획’과 시행을 목적으로 한 ‘이동통신서비스 발전계획’을 시달했다. 


주요 내용은 이동통신 경쟁력 강화. 대안은 민간자본 참여 확대, 기업공개 추진으로 구분된다.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이동통신 시장에 무리하게 경쟁 요소를 넣기보다는 기존 사업 주체가 우선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다시 말해 한국이동통신의 자율경영에 보다 힘을 실어 주기로 한 셈이다.1)


당시 한국이동통신이 가파른 성장세를 유지했으나 내실은 부족했다. 차량다이얼전화 2만 3천 회선, 무선호출 8만 1천 회선 정도 수준으로 약 10만 가입자를 소폭 상회하는데 그쳤다. 


기업공개도 어려움이 따랐다. 한국이동통신은 한국전기통신공사가 100% 출자한 회사다. 정부재투자기관이 기업공개에 나서는 사례가 전무했다. 전례가 없다 보니 앞날이 캄캄했다.


수요 대비 적은 가입자 수준과 기업공개의 어려움에도 시장의 관심만큼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정부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전망이었다. 정부재투자기관이 기업공개를 했다는 점은 국가 육성의지와 맞닿기 때문에 미래 전망이 밝을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었다. 


정부는 한 단계씩 나아가기로 했다. 한국이동통신과 관련해 1989년 9월 21~22일까지 청약을 실시했다. 청약은 약 20대 1의 높은 비율로 접수됐다. 아무래도 공기업에 대한 안정성이 설득력을 얻었다. 11월 9일 한국증권거래소의 상정 요건 심사를 통해 정식 상장했다. 


이로써 한국전기통사 단독 주주에서 벗어나 12만 8천124명의 새로운 주주가 탄생했다. 1주당 발행가는 1만 3천 원에 총 액면 금액은 64억 원으로 증자 후 자본금액은 199억 9천281만 원으로 증가했다. 총 주식 508만 주 가운데 34.9%에 해당하는 178만 주가 민간으로 넘어갔다. 시간이 갈수록 주가는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주주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2)


수의입찰경쟁입찰, 장비 경쟁시대 개막

세계 최초 휴대폰인 모토로라 다이나택 [사진=위키피디아]

전파를 활용한 이동통신은 사실 유선망을 기반으로 한다. 


예를 들어 공원에 분수를 설치하고자 한다면, 분수대까지 물을 전달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을 포설해야 한다. 그래야 파이프라인을 통해 물을 공급하고, 그 물이 분수대 끝에서 쏟아질 수 있다.  물이 고인 수조가 서버고 이를 전달하는 파이프라인이 유선망, 분수대가 물을 뿜어내는 것은 무선장비가 주위에 전파를 뿌린다고 비유할 수 있다.


즉, 이동통신은 유선장비 측면의 경쟁력도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88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ETRI)와 한국전기통신공사, 금성반도체, 대우통신, 동양전자통신, 삼성전자 등 민관이 함께 공동개발에 착수해 전전자교환기 TDX1B 개발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후 국산 전전자교환기 TDX-10까지 나아갔다. 


다만, 국산 장비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선진국의 장비를 도입해야 했다. 장치산업 특성상 한번 포설한 장비는 꽤 오랫동안 쓸 수밖에 없다. 호환성을 고려해 썼던 제조사의 제품을 계속해서 교체하며 사용해야 할 수도 있다. 장치산업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순차적인 교체가 이뤄져야 하는 한계점을 안고 있었다. 외산 장비가 득세할수록 기술자립을 기대하기 어렵고 발 빠른 대응도 어렵다. 운영관리 측면에서의 어려움도 크다. 


한국이동통신 역시 같은 고민에 빠졌다. 해결책은 크게 두 가지다. 국산장비 개발에 적극 나서면서 한편으로는 외산장비 사업자의 경쟁을 부추겨야 했다. 그래야 양쪽을 자극해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우선 한국이통통신은 무선호출 송신기 국산화에 성공했던 삼성전자와 손을 잡았다. 이후 끝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1992년 11월 9일 자체 기술력으로 개발한 TDX-PS 상용시험 결과 보고대회를 개최했다. 세계 최초 무선호출 전용 시스템의 탄생이었다. 1993년까지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5개 지사 1차 설치, 1995년 말 전북, 강원, 제주 지사까지 전량 대체됐다. 망 구성 단순화뿐만 아니라 원가절감과 수입대체 효과까지 거뒀다. 


외산장비 도입은 경쟁입찰제를 도입했다. 1983년부터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미국 모토로라와 단독 수의계약으로 유선장비를 들여왔기 때문에 그에 따른 유지보수 문제가 부상했기 때문. 장비 단독 도입의 폐해가 여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경쟁입찰에 대한 전례도 전무했기에 가는 길은 험난함 그 자체였다.  


1989년 5월 31일 한국이동통신은 외자구매협의회를 열고 공개입찰경쟁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관련한 심의위원회를 구성해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조달청과 함께 실제 입찰을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7월 7일 조달청에 이동전화 교환기 3만 회선과 기지국 장비에 대한 공개경쟁입찰을 공고했다. 치열한 경합 끝에 모토로라가 아닌 미국 AT&T가 선정됐다. 경쟁을 통해 예산절감과 유지보수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게 됐다.3) 


전례가 만들어지자 이후는 일사천리로 전개됐다. 특히, 기존 단독 수의계약 대상자였던 모토로라가 장비 가격을 절반 가량 낮추는 효과도 거뒀다. 캐나다 그레니어, 스웨덴 에릭슨 등이 국내 진출을 희망하면서 입찰경쟁은 하루가 다르게 심화됐다. 즉, 외산 장비업자에서 우리나라 이동통신사로 주도권이 넘어오게 된 셈이다. 4)


이동통신 100만 시대 개막


이동통신 휴대전화 서비스를 기점으로 무선호출(삐삐)과 차량다이얼전화(카폰)의 성장세는 날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1991년 12월 14일 드디어 한국이동통신 이동통신 가입자 100만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5) 


당시 이동통신 가입자는 ▲휴대폰 기반의 ‘이동전화’ ▲삐삐 가반의 ‘무선호출’, ▲차량 탑재 형태의 ‘차량다이얼전화(카폰)’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을 가리켰다. 일각에서는 이동전화에 카폰을 포함시켜 통계를 내기도 했다. 


정보통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100만 가입자 달성 시기인 1991년 말 이동전화 가입자는 11만 6천198건, 무선호출 가입자는 85만 515건으로 101만 8천704건을 유치했다. 100만 가입자 시대를 연 이동통신 시장은 이후 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중에서도 이동전화의 성장이 눈에 띄었다. 무려 2 배수에 달하는 가입자 증가폭을 보였다. 1991년 10만 가입자 수준이었던 이동전화는 1993년 말 50만 고지에 올랐다. 


무선호출 역시 대중화 바람을 타고 1992년 4월 100만 가입자를 돌파했다. 이후 무려 1년 3개월 만인 1993년 7월 19일에는 200만 가입자까지 넘어섰다.



폭발적인 가입자 증가는 한국이동통신에게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늘어나는 가입자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 인프라 전면 확산에도 나서야 했다. 적체 현상을 해소하지 않는다면 고객 불만은 불 보듯 뻔했다. 앞서 외산장비 경쟁입찰을 통해 대량의 장비를 들여왔기에 그에 따른 설비 개설에도 속도를 내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동전화 시설장비를 전담하는 전용비행기까지 운항됐다. 한국이동통신은 대한항공, 대한통운과 함께 이동전화 장비운송전담팀을 구성해 운용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6) 


또 다른 과제는 고객 서비스 응대였다. 적체 해소나 통화품질 향상만큼이나 가입자를 대상으로 한 신속한 서비스 역시 중요했다. 신규 가입자 모집에도 적극 나서야 했다. 이동전화를 체험해보지 않은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프로모션도 준비해야 했다. 


한국이동통신은 우선 고객 접점을 늘리기로 했다. 1992년 1월 31일 무선호출위탁대리점 개설 시범안을 마련하고 경기도 안산시에 최초 위탁대리점 개설 공고를 냈다. 5월에는 실제 안산대리점이 문을 열었다. 7월부터 부산 북구와 공주시, 수도권, 부산권, 충청권 등에 69개 대리점 개설이 연달아 이어졌다. 이후 한차례 더 대리점을 모집한 한국이동통신은 연말까지 총 113개의 대리점을 개설할 수 있게 됐다. 1994년 2월에는 178개점으로 더 늘었다.7)


이동전화 서비스 포트폴리오도 다양화했다. 1993년 2월 1일 이동무선공중전화를 보급하는 한편, 임대이동전화 사업을 전개하고 같은 해 10월 1일부터 일반 고객에 확대했다. 부담스러운 이동전화 설비비 분납제를 지방에 우선 도입하고 1994년에는 수도권으로 확대했다.8)



1) <한층 높아진 기업의 위상>,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81

2) <한층 높아진 기업의 위상>,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82~83

3) <한층 높아진 기업의 위상>,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84~85

4) <한층 높아진 기업의 위상>,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85

5) <성틈 다가온 이동통신 대중화 시대>,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90

6) <성틈 다가온 이동통신 대중화 시대>,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92

7) <성틈 다가온 이동통신 대중화 시대>,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94

8) <성틈 다가온 이동통신 대중화 시대>,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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