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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기 May 11. 2023

(7) 제2이동통신사 大戰 발발

4부. 제2이동통신사 선정

제2이동통신 사업을 잡아라.


1990년 7월 체신부가 통신사업 구조조정을 발표한 이듬해인 1991년 제2이동통신사 선정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우선, 제2이동통신사 선정을 위해 체신부는 전기통신기본법, 공중전기통신사업법 개정이 필요했다. 각 부문의 관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보통신발전협의회를 구성했다. 연구용역을 통해 경쟁체제 도입에 대한 세부적 내용을 살폈다. 


경쟁체제를 세우기 위해 이동통신분야의 경우 이동전화와 무선호출, 무선데이터, 주파수공용통신 등 4개 분야로 구분했다. 무선호출(삐삐)은 전국 도별로 9개 사업구역으로 분할해 각 1개 사업자를 지정했다. 수도권은 2개 사업자가 경쟁하도록 했다. 즉, 수도권은 제2무선호출사업자를 신규 선정하기로 한 것.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집중된 분야는 이동전화였다. 한국이동통신이 독점하고 있는 이동전화(휴대폰) 시장에 신규 사업자를 허가하기로 했다. 경쟁구도를 세우기 위해 제2이동통신 사업자를 선정하겠다는 의도였다. 


다만, 체신부는 이동전화 서비스가 대기업 수직계열화에 희생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평적인 육성 정책 방향을 내세웠다. 이는 곳 시장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재벌기업에게 사실상 문호를 닫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통신기기 제조사 지분은 10% 이내로 제한하기로 했다. 장비 제조사는 국내 빅4라 불리는 삼성과 현대, 대우, 럭키금성을 가리켰다. 통신 시장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던 대기업들에게 체신부의 결정은 날벼락이었다.1)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다. 5월 2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 관련 공청회에서 이 같은 갈등이 점화됐다. 


정부는 통신시장 육성 방향에 대해 ‘경쟁체제 도입’으로 대기업 참여가 이뤄진다면 경쟁 목적을 잃고 독점화가 강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달리 대기업 장비 제조사들은 정부가 제조업 강화를 말하고 있는 와중에 이동통신 서비스 발굴만큼은 인색하다고 비판했다. 장치산업 특성상 이동통신은 초기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들이 나서야 합리적이라고 호소했다.2)


반대가 있기는 했으나 체신부는 완강했다. 8월 14일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에 관한 주요 기준을 발표하면서 기존 입장을 명확히 했다. 


장비 제조사의 지분제한은 기존 방침대로 10% 이내로 제한했다. 구체적으로 단일 기업이 단독 지배할 수 없도록 컨소시엄을 구성해 공모에 나서야 하며, 지배주주는 해당 주식의 33% 이상을 소유해서는 안된다고 명시했다.3)


체신부·과기처 vs 상공부·경제기획원

제2이동통신사업자를 선정하기 위한 6개 그룹의 치열한 다툼이 지속됐다 [사진=SKT]

법 제도 개선과 재벌기업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체신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체신부 입장에서도 이해관계가 복잡해 봉합에 어려움이 컸다. 하지만 갈등은 엄한 곳에서 발생했다. 이번엔 부처 간 실랑이가 벌어진 것.


1992년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 공모를 2개월 앞두고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가 무역수지 적자폭 확대와 개선을 앞세워 제2이동통신사업자 도입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에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이 가세하면서 사태가 더 커졌다.4) 


상공부가 제2이동통신사 도입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무역적자폭 확대 때문이다. 당시 상공부는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무역수지 개선이 주된 임무였다. 하지만 체신부의 계획대로 1994년 1월부터 제2이동통신사가 사업을 시작한다면 엄청난 수입수요촉발로 국제 수지방어차원에서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는 판단이다. 


상공부에 따르면 무선통신 기기분야에서 우리나라 전자 산업은 기술부문이 취약한 실정으로 현재 10%로 낮은 국산화율을 감안했을 때 통신 시스템 기기와 단말기 등을 전량 수입해 막대한 수입유발효과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단했다. 


즉, 간단하게 제2이동통신사가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 외국에서 대량의 기기들을 사들여야 하고 이는 무역적자로 이어져, 상공부의 임무인 무역수지 개선이 어렵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또한 무작정 연기하기보다는 1년간 유예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현재는 통신기기 국산화율이 10% 수준이나 2~3년 이후인 1995께 이동통신 기기 국산화율을 40~50%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휴대용 전화기 국산화율은 15%, 카폰 35%, 무선호출기 30%의 국산화율을 기록하고는 있으나 국내 제조사의 상품은 전량 수입한 부품을 활용하고 있으며, 도시바와 후지쯔, NEC 등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도 수입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특히, 1995년을 전후해 이동통신 서비스분야가 예상키 힘들 정도로 급속히 확대될 전망이어서 우선적으로 기술 자립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되는 초기 단계라는 점과 디지털 방식 중 전 세계 통용화된 바 있는 시분할방식(TDMA)과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코드분할방식(CDMA)에 대한 방향성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갈 필요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다.5) 


영향력이 큰 부처에서의 반발이기는 했으나 체신부 역시 지지 않고 맞섰다. 체신부는 국내 이동통신기기 수요가 매년 2배 이상 급증하고 있어 기존 설비로는 조만간 포화상태에 놓일 것이라 판단했다. 16만 명 수준인 이동통신가입자는 1993년 말 20만 명을 넘어서면서 현재 주파수 대역만으로 소화할 수 없을 것이라 예견했다.6) 


실제 당시 이동전화로 활용할 수 있는 주파수는 800MHz 대역 내 30MHz폭이었다. 이 중 한국이동통신이 일부를 활용하고 있는 상황. 만약 주파수 포화로 인한 적체현상이 가속화된다면 한국이동통신에게 가용할 수 있는 대역을 모두 줘야만 했다. 


즉, 제2이동통신사에게 줄 주파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동통신의 독점을 보다 공고히 해주는 결과이기에 당초 계획했던 경쟁체제 도입을 통한 통신시장 성장은 백지화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또한, 상공부가 제시한 예상 무역적자폭도 달랐다. 상공부는 제2이동통신사와 관련해 1992~1994년 무역적자 15억 달러를 예상했으나 체신부는 우선적으로 사업자 선정 자체가 무역적자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그렇더라도 대략 6억 달러 수준이라고 전망했다. 게다가 대표적으로 모토로라가 30% 수준의 기술료 이전을 요구하는 등의 현 상황에서 1년 만에 가시적인 국산화율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못 박았다. 


아울러, 사업자 선정을 연기해야 한다면 그간 쌓인 적체현상으로 인해 고객 불만이 커지는 한편, 이동전화 수요를 강제로 줄여야 할 수도 있다고 토로했다. 시행연기라는 소극적 방법보다는 경쟁을 통한 이동통신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해 국산화를 앞당기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기 역시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도 따랐다.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은 1980년 말부터 정부가 고심했던 내용으로 1990년부터 관련 법 개정을 통해 3년간 내실을 다졌던 정책 사업이다. 사업자 선정 공고를 1~2개월 앞두고 상공부가 반대에 나섰다는 질타를 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양측의 갈등은 도무지 풀릴 기색이 없었다. 최각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과 송언종 체신부 장관, 한봉수 상공부 장관 등이 여러 차례에 거친 당정협의를 열었으나 빈손 회의가 되기 일쑤였다. 관계장관회의 역시도 마찬가지로 시간만 흘렀다.


갈등이 심화될수록 시장도 요동쳤다.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추측이 난무했다. 


일각에서는 노태우 대통령 정권 마지막해임을 감안한 대기업의 로비가 심각했다는 주장이 따랐다. 대기업 지분 제한에 따라 통신기기 제조업체인 삼성, 금성, 현대, 대우 등 4대 재벌기업들이 통신 시장 참여를 위한 견제책이 작동했다는 것. 공교롭게도 당시 5위 기업이라 불린 선경의 통신사업자 선정을 막기 위한 비책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특혜 시비가 불거진 셈이다. 또한 이 같은 정치적 해석은 일반 국민까지도 관심이 증폭된 결정적 이유이기도 했다. 


실제 시장에서는 속을 끓였다. 사업자 공고에 앞서 컨소시엄 구성과 연구개발 준비를 서둘러왔기 때문이다. 만약 사업자 선정이 연기된다면 그간 준비해 왔던 모든 작업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금성과 삼성 등은 국내 시장을 빨리 열어줘야만 현재 기술 개발을 완료한 국산화 비율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포항제철과 선경 등은 외국과의 손해배상, 인력 시설비 부담 등 토로했다. 공모를 준비 중이었던 기업들은 50~100명가량의 인원을 충원하고 시험용 장비 구입과 기술 자문료 등으로 각각 500~1천만 달러의 자금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3개월가량 이어진 줄다리기는 1992년 3월 25일 관계부처장관회의를 통해 봉합됐다. 당초 계획대로 제2이동통신사업자를 선정하겠다는데 합의를 이뤘다. 내용적인 면을 감안하더라도 체신부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7) 


대신 체신부와 상공부는 휴대용 무선전화 국산화율을 현 20%에서 1996년 70%까지 높이고 디지털 방식의 이동통신은 공동개발지원체제를 구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이동통신 교환기 기지국 설비는 전자통신연구원(현 ETRI), 단말기와 핵심부품 기술 개발은 전자부품 연구소가 담당하기로 했다. 


체신부는 계획보다 2개월가량 늦기는 했으나 3월 26일 통신위원회를 구성해 제2이동통신 사업자 신규 허가와 신청 공고안 등 후속 절차 작업을 진행했다. 이동전화는 6월 26일 허가 신청서를 접수하겠다고 발표했다.8)


제2이동통신 사업자 신규허가 공고


1992년 4월 14일.


체신부가 제2이동통신사업자의 신규허가 신청공고를 냈다. 신청서는 6월 말까지 접수하고 8월 말까지 사업자 선정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을 밝혔다.9) 


이날 공고가 나오긴 했으나 1980년 말부터 통신시장 경쟁체제 도입이 논의됐으며, 1990년 체신부가 통신사업 구조조정안을 발표했기에 사실상 대기업들의 치열한 눈치싸움은 물밑에서 계속 돼왔다. 시장에서는 제2이동통신 사업자 참여 기업들이 대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준비과정도 만만치 않았기에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제2이동통신사업자 공모 대상으로는 초기 선경과 포항제철, 효성, 쌍용, 대한항공, 일진, 맥슨전자, 코오롱, 태일전자 등 8개 업체가 조사 준비팀을 구성하는 등 구체적 움직임을 보였으나 이후 선경과 포항제철, 쌍용, 코오롱, 동부, 동양 등 6개 그룹 경쟁으로 압축됐다.10) 


이렇듯 대기업들이 이동통신 사업에 뛰어들고자 했던 이유는 1991년 이동전화 가입자수 15만명에서 2000년 450만 명으로 늘어남에 따라 시장규모가 700억 원 수준에서 2조 원 선으로 급증할 전망이었기 때문이다. 무선호출 시장까지 합산한다면 무려 3조 원 시장으로 불어난다. 이동통신 사업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 불렸던 근거이기도 했다. 


다만, 이동통신 사업은 장치산업이라는 특성상 막대한 투자비가 필요하다. 당시 10년간 1조 원이라는 거금을 투입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고로 대기업 이외에 이동통신 사업 진출은 근본적으로 어려웠다.


6대 그룹 눈치전, 선경의 질주


6개 그룹은 440개사에 달하는 국내업체 및 외국 통신사업체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체신부 제안요청서(RFP)에 준하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선경그룹은 1990년 하반기 선경정보시스템을 설립한 후 1991년 이를 기반으로 한 선경텔레콤을 발족하면서 후발기업으로서는 정보통신사업에 가장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운 포항제철은 계열사인 포스데이타를 통해 정보통신사업 확대에 골몰했다. 코오롱그룹 역시 1990년 하반기 코오롱정보통신을 설립했으며 동부그룹은 산하 정보통신본부를 동부정보통신으로 독립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동양그룹 역시 1991년 3월 동양정보통신을 설립해 자체 전산망통합운영사업을 전개했다. 


제2이동통신사업자 신규허가 신청공고를 시작으로 6개 그룹은 대대적인 홍보전에 돌입했다. 각자 이동통신 사업 진출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고 최적의 후보임을 강조했다. 


이 중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곳은 선경그룹이다. 1992년 1월부터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정보통신사업 진출 원년으로 삼고 진출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기존 업체와의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고 국가 산업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 분야를 우선적으로 생각했고, 또한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에서의 성장 가능성도 고려했다”라며, “이런 분야 등 중 정보통신사업을 다음 사업영역으로 선정해 그룹의 중점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라고 밝혔다. 


또한 “우리가 진출하고자 하는 이러한 정보통신사업은 KMS와 SUPEX를 추구하는 선경으로서는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업영역이라고 확신했다”라고 강조했다.11)


선경그룹은 별도 회사로 대한텔레콤을 설립하고 컨소시엄명으로 확정했다. 선경텔레콤과 유공해운을 겸임하고 있는 손길승 SK그룹경영기획실장을 총괄로 임명했다. 


선경그룹은 컨소시엄 구성에도 힘을 쏟았다. 사업자 선정을 위해서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기업을 끌어들이는 게 관건이었다. 지분제한으로 인해 나설 수 없었던 삼성과 럭키금성, 대우, 현대 등 4대 재벌기업의 향방과 정부투자기관인 한국전력이 유력한 우군으로 불렸다. 


선경은 이 중 한국전력과 손을 잡았다. 정부기관임과 동시에 막대한 자금력과 전국 광전송망을 갖추고 있어 선정결과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공산이 컸다. 럭키금성의 경우 부산투자금융을 통해 선경에 합류했다. 


우리나라는 이동통신 기술이 낙후돼 있었기에 외국 기술기업과의 협력 역시 중요한 선택의 근거로 작용했다. 선경은 앞서 미국 벨 사우스와 협력관계를 유지했으나 불화가 지속됨에 따라 1991년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 미국 GTE와 영국 보다폰, 홍콩 허치슨이 컨소시엄에 합류하게 됐다.12)


유력 후보 '포철', 코오롱·동부·동양·쌍용 '수싸움'


포항제철은 계열사인 포스데이타를 중심으로 이동통신 사업에 전력투구했다. 총괄 역시 포스데이타를 이끌고 있는 성기중 사장이 지휘봉을 잡았다. 이후 신세기통신으로 컨소시엄을 완성하면서 대표로 통신전문가인 외부 인사 권혁조 대표를 영입했다. 


포항제철 역시 선경그룹과 마찬가지로 유력한 선정후보였기에 당시 쟁쟁한 기업들이 속속 컨소시엄에 합류했다. 특히 4대 재벌기업 중 럭키금성을 제외한 삼성과 대우, 현대가 모두 포철에 모였다. 삼성은 삼성전관을, 대우는 대우통신, 현대는 현대상선을 통해 합류했다. 


글로벌 협력업체도 탄탄했다. 미국 팩텔과 퀄컴뿐만 아니라 독일의 만네스만이 나섰다. 이 중 퀄컴은 나중에 코드분할다중방식(CDMA)의 디지털 이동통신을 개발해 국내 최초 상용화를 이끈 기업으로 기록됐다. 


코오롱의 브레인은 이웅열 부회장으로 알려졌다. 이동찬 그룹회장의 외아들로 3세 경영 안착을 위한 이동통신 사업 진출이라는 미션이 부여된 셈이다. 동아제약, 부산파이프뿐만 아니라 미국 나이넥스와 손을 잡았다. 당시 이웅열 부회장이 17층에서 근무하고 있어 이동통신 사업을 ‘17층 프로젝트'라 부르기도 했다. 


동부그룹은 김준기 그룹회장 경기고 동문 오효원 전무가 지휘봉을 잡았다. 한국도로공사와 미국 벨 애틀란틱이 합류했다. 동부증권과 동부애트나생명보험, 동부상호신용금고, 동부창업투자, 동부고속 등 금융과 보험, 운송 서비스 노하우를 통해 이동통신에서도 양질의 서비스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쌍용그룹은 미래이동통신을 세우고 김석원 회장의 동생인 김석준 부회장이 키를 잡았다. 미국 사우스 웨스턴 벨과 스웨덴의 스웨디시텔레콤이 협력했다. 


쌍용은 쌍용컴퓨터와 쌍용양회 등의 이동통신팀과 그룹종합조정실 신규사업팀이 통합돼 이동통신사업본부를 구성하면서 일찌감치 컨소시엄 구성을 마무리했다. 이를 통해 미래이동통신이라는 명칭도 확정됐다. 


동양은 동양이동통신을 통해 중소기업도 이동통신에 진출할 수 있다는 목표 아래 컨소시엄을 키웠다. 무려 306개 사가 함께했다. 동양의 경우 앞서 이동통신사업부를 신설하고 안상수 동양선물 사장을 임명했다. 앞서 1991년 11월 미국 US웨스트가 기술기업으로 합류했다.


동양은 앞선 5개 컨소시엄과 다르게 투명성을 강조했다. 중소기업 집합으로 규모 면에서는 부족할 수 있으나 이를 지분에 따른 혈맹관계로 구성하면서 누구보다 끈끈함을 강조했다.13) 


경쟁과열, 약속시간


6개 그룹은 치열한 홍보전과 마케팅, 물밑에서는 수주전을 벌이면서 과열경쟁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관련 시장 역시도 유력한 후보 잡기에 혈안이 됐다. 


이 같은 움직임은 해외 사업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외 통신장비업체들의 판촉전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미국 AT&T와 모토로라, 스웨덴 에릭슨 등이 각축전을 벌였다. 본사 회장단과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동원돼 각 그룹에 로비전을 벌였다. 또한 각 컨소시엄에 참여하고 있는 해외 기술업체들과 장비 구매 협조를 약속받기도 했다. 


이들은 6개 그룹을 만나 아날로그와 디지털 방식 교환시스템과 기지국 장비를 소개하는 한편, 장비 구체적 사양과 견적서까지 뽑아 제출했다. 체신부에 제출해야 하는 사업계획서에는 장비구매계획도 포함돼야 했기에 컨소시엄 공략은 필수 관문이었다. 


한편으로는 평가 점수를 유리하게 받을 수 있는 국산장비에 대한 수급 계획도 불거졌다. 삼성과 금성 등도 구매 제안에 나선다. 국산장비의 경우 전원공급장치와 안테나 등 일부 장비들이 채택된 것으로 알려졌다. 


각 그룹의 회장까지 발 벗고 나섬에 따라 과열양상은 하루가 다르게 심화됐다. 일각에서는 6개 그룹을 모두 통합하는 ‘연합컨소시엄’까지 논의해봐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이에 따라 5월 30일 6개 그룹의 사장과 부사장급 이동통신 관련 본부장들이 뉴서울골프장에 모여 골프 회동을 벌이는 상황도 연출됐다. 과열 분위기를 식히고 공정한 경쟁에 나서자는 게 회동의 취지였다.14)


제2이동통신사업자 공모 접수를 보름 정도 앞둔 6월 10일 체신부는 기자간담회를 개최하고 세부 계획을 밝혔다. 6월 25일까지 세부심사 평가기준을 확정하고 각계 전문가 55명으로 심사평가전담반을 구성키로 했다. 이동전화는 26일부터 접수에 돌입해, 1차 심사는 7월 13~28일까지, 2차 심사는 8월 3~22일까지 진행키로 했다. 통신위원회 심의를 거쳐 8월 말 최종 1개 사업자를 선정하기로 했다. 심사는 비공개 장소에서 합숙심사를 계획했다.15)


이후 1992년 6월 26일 한 번도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 속에 6개 컨소시엄이 제2이동통신사업자 공모 접수에 나섰다. 


선경으로 쏟아지는 집중포화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 문구 하나로 전국을 들썩이게 한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은 그 관심만큼 많은 오해와 소문, 추측들을 야기시켰다. 물밑에서는 치열한 로비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선정 당위성을 세우기 위한 작업이 수시로 교차돼 전개됐다. 이 같은 수싸움은 결론적으로 선정 이후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제2이동통신사업자를 놓고 경쟁을 벌인 곳은 선경과 포항제철, 코오롱, 쌍용, 동양, 동부 등 6개 그룹사였다. 이 중 가장 집중적인 포화를 감내해야 했던 곳은 선경이다. 


선경으로 향한 집중포격은 사실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치적으로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지간이라는 점이 거론돼 특혜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기업 측면에서는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에 참여할 수 없도록 지분제한이 걸린 삼성, 현대, 대우, 럭키금성 등 4대 기업을 제외한 5위 그룹에 속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시장 측면에서는 가장 유력한 후보를 낙마시킴과 동시에 자신들의 치부를 가릴 수 있다는 일거양득의 전략 구사가 가능했다. 


사실 특혜 시비는 선경 이외에도 불거진 바 있다. 포항제철의 경우 박태준 회장이 집권당 최고위원이었고, 코오롱그룹 회장은 정계 유명인사인 김종필 민자당 최고위원과 사돈관계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두 그룹은 선경과 함께 1차 심사평가에서 나란히 후보군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16)


대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 선경이 선택한 전략은 ‘진정성’이었다. 정보통신사업 진출에 대한 당위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데 집중했다. 


선경그룹은 1975년부터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목표를 추진해 1980년 11월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면서 가시적 성과를 거뒀다. 이후 다음 단계로의 진화를 위해 장기경영을 목표로 ‘정보통신사업’을 낙점했다. 


선경그룹 사보 ‘선경’의 1992년 1월호에서는 이 같은 결정에 대한 故 최종현 SK그룹 회장의 고민이 적혀 있다.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 완성이 가시화될 즈음인 10여 년 전부터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심사숙고해 왔습니다. 새로운 사업이라고 해서 아무 업종에나 진출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남들이 하니까 한다는 식은 곤란합니다. 당시 각광을 받던 가전업계나 자동차 업계의 진출도 고려한 적이 없지는 않지만 이들 분야는 이미 충분한 경쟁체제가 이루어져 있어 기존 업체들과의 경쟁이 불가피하고 국가적으로도 낭비를 초래할 소지가 있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존업체와의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고 국가산업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 분야를 우선적으로 생각했고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에서의 성장 가능성도 고려했습니다. 이런 분야들 중 나는 정보통신사업을 다음 사업영역으로 선정하여 그룹의 중점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보통신 분야에서도 하드웨어 부문은 기존의 전자업체가 이미 진출해 있거나 진출이 용이하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우리가 경쟁우위를 확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서, 우선 새로운 분야이며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고 경쟁에서 비교우위의 확보가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서비스 및 소프트웨어 부문을 중심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17)


목표 설정에 따라 선경은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정보통신 사업을 준비해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선경정보통신과 선경텔레콤을 거쳐, 제2이동통신사 선정을 위한 대한텔레콤으로 단계별 절차를 밟아 나갔다. 


하지만 국내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1980년 초만 하더라도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발족으로 자회사 격인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T)가 운영되고 있었으며, 이동통신을 전담한 한국이동통신서비스의 통신서비스는 무선호출(삐삐)과 차량다이얼전화(카폰)가 전부였다. 법과 제도적으로도 현재의 이동전화를 위한 이동통신 분야는 미개척지였다. 


우선적으로 선경그룹은 1984년 1월 미주 경영기획실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발족시켰다. 선진국인 미국의 기술을 경험하자는 취지였다. 1989년 10월 24일 미국 뉴저지 주에 현지법인 유크로닉스를 설립했다. 국내서는 1990년 5월 선경정보시스템을 세우고 같은 해 10월 YC&C를 출범시켰다. 1991년 4월 선경텔레콤으로 역량을 집중시켰다. 이 선경텔레콤이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에 공모한 선경그룹의 컨소시엄 ‘대한텔레콤'의 전신이다. 


선경그룹이 미주 경영기획실에서 정보통신사업을 구상했을 당시 최태원 SK 회장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SK 50년사에서는 최태원 회장이 직접 회상한 당시 상황이 묘사돼 있다.


“당시 미국에서는 AT&T와 같은 회사들의 분할이 진행되고 있었고 셀룰러폰이 나오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성장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만 꽤 유망해 보였고 리스크도 적어 보였습니다. 또한 선경그룹이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해서 이동전화를 초석으로 깔고 상황을 봐서 사업을 확대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회장님(최종현 회장)께 드렸습니다. 그 이후로 미국 이동전화회사에 투자를 하고 경험을 쌓기 시작했습니다”18)


선경그룹으로서는 1990년 7월 체신부가 통신사업구조조정안을 내놓고 제2이동통신사업자를 선정하겠다는 발표가 반가웠을 수밖에 없었다. 선경은 유공과 함께 1989년부터 독자 추진하던 정보통신 관련 사업팀을 그룹차원에서 경영기획실 산하 사업개발팀에 통합하고 정보통신사업을 위한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체신부, 공정성 논란 정면돌파


제2이통신사업자 공모에 공정성 논란이 발생할 것으로 예견한 체신부는 시작부터 공정한 심사를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내비쳤다. 실제 제2이동통신사업자 심의를 진행할 통신위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계장관회의를 통해 기존대로 제2이동통신사 선정에 나서겠다고 부처 내 합의가 이뤄짐에 따라 곧장 현판식을 개최하고 업무에 돌입했다.


통신위원회는 윤승영 초대 위원장을 필두로 이건웅 서울고법 부장판사, 전윤철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 상임위원, 김세신 법제처법제조정실장, 경상현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 조백제 통신개발연구원장, 김길창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박정식 서울대 교수 등 8명으로 구성됐다. 


체신부는 아울러 각 컨소시엄들의 공모 관련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일례로 컨소시엄이 4월 24일 체신부에 제출한 질문은 1개월이 채 안된 5월 13일 답변이 배부됐는데 그 분량이 무려 134쪽에 달했다. 


제2이동통신사업자 공모 실무 책임자인 박영일 체신부 통신정책심의관은 언론을 통해 거듭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공정하게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선정 이후 결과를 공개하고 엄격한 심사를 통해 특혜를 철저하게 배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에 따른 심사중점 사안들도 공개했다.19)


1차 심사에서는 ‘재무구조’를 가장 큰 비중으로 살피겠다고 발표했다. 이동통신사업은 장치산업이라는 특성상 초기 막대한 투자비용을 감내해야 한다. 계속적인 연구개발비 투입도 병행해야 하기에 최소한 사업을 시작한 이후 5~6년 동안 적자가 예상됐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체력이 있어야 가능했다. 


아울러 사업허가 후 1년 6개월 내 최소 1천400억 원의 자본금을 납입하고 상당액의 이동통신기술연구개발비 일시 출연금도 내야 했다. 적어도 2000년까지는 5천억 원에서 1조 원가량을 설비투자비와 연구비에 쏟아 넣어야 했다. 


1차 심사는 상위 2개 사와 나머지 업체와의 점수가 현격한 경우를 제외하고 3개사를 선정하기로 했다. 2차 심사에서는 다각도의 논의를 거쳐 1개 사업자가 최종적으로 선택된다. 


2차 심사에 대한 업계의 관심은 ‘연구개발출연금’으로 귀결됐다. 업계 납입할 출연금 액수 다과에 따라 점수가 배정됐기 때문이다. 즉, 출연금이 점수와 직결되기에 경쟁 컨소시엄 대비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는 평가항목이기도 했다. 다만, 어디까지 쏟아 넣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부담감 역시 상당했다. 


이에 따라 체신부는 상한성을 설정해 초과하는 금액은 평가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출연금의 상한선 기준은 정부가 이동통신기기에 관한 연구개발비 722억 원을 책정하고 이동통신 올 한 해 출연금이 226억 원인 점을 감안해 결정하기로 했다. 출연금 상한선은 심사 이후 모두 공개하기로 한 만큼 2차 심사 결과와 아울러 투명하게 공개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기술개발출연금이 여당의 정치자금으로 쓰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고, 해당 기업들 간 업계 추산치 차이가 커 불확실성을 거둬 달라는 차원에서 적정 수준 여부에 대한 민원이 재차 접수됐다. 20) 


이에 따라 체신부는 2차 심사결과 발표 후 공개하기로 한 기술개발출연금 상한선을 공모 접수 시작일 직전인 6월 25일 300~400억 원이라는 대강의 기준을 각 컨소시엄의 지배주주 측에 통보해 불신을 해소했다. 



1) 김홍 기자, <이동통신 신규사업자 설비 제조사는 대주주 배제>, 조선일보, 1991. 4.11.

2) 윤영걸 기자, <제2이동통신 정책 새사업자의 향방은...(3)쟁점>, 매일경제, 1991. 5.23.

3) <중단 없는 변신, 민영화 준비>,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15

4) <제2이동통신 선정 시기 싸고 부처 대립>, 경향신문, 1992. 2.13.

5) 안종주 기자, <제2 이동통신 사업시행 시기 마찰>, 한겨레, 1992. 2.18.

6) <제2이동통신 추진시기 정부부처 이견 팽팽>, 동아일보, 1992. 2.16.

7) <이동통신 사업 계획대로 시행 체신부 방침>, 매일경제, 1992. 3.26.

8) <통신위원회 발족 독립성 공정성 확보 관건>, 한겨레, 1992. 3.28.

9) <2이동통신 공고>, 경향신문, 1992. 4.13.

10) <제2이동통신 추진 6개사 협력업체 막바지 절충>, 매일경제, 1992. 4.20.

11) <중단 없는 변신, 민영화 준비>,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17

12) <선경 보다폰 GTE등 확정>, 매일경제, 1992. 4.14.

13) 박대호 기자, <그룹 사활 걸고 "전력투구" 이동통신 특집 [금세기 최대 사업]에 온갖 지혜>, 경향신문, 1992. 5.22.

14) <이동통신 경쟁 6사 본부장 회동...공정 다짐>, 조선일보, 1992. 6. 4.

15) <제2이동통신 심사평가반 구성>, 경향신문, 1992. 6.11.

16) 장윤영 기자, <[6공 마지막이권] 어디로>, 경향신문, 1992. 4. 5.

17) <민영기업으로의 새출발>,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25~126

18) <민영기업으로의 새출발>,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26

19) 김의태 기자, <인터뷰 이동통신 특집 박영일 통신정책 심의관 "엄격심사...특혜 철저배제", 경향신문, 1992. 5.22.

20) <이동통신사업 선정과정 의혹>, 경향신문, 1992.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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