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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기 May 14. 2023

(10) 주인 찾은 1·2 이통사, 한통 vs 신세기

4부. 제2이동통신사 선정

제2이동통신사 선정 무산과 달리, 정치권에서는 제6공화국이 저물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차기 정권으로 넘긴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 역시도 기지개를 켜야 했다. 다만, 생각보다 선정 이슈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과거 실패를 반복할 수도 있다는 부담 때문이었을까. 소신을 잃은 정부와 이를 믿을 수 없는 기업의 애증관계는 봉합은 고사하고 또 다시 정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체신부 역시 새롭게 취임한 윤동윤 장관이 이끌었으나 이와 관련된 발언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상황이 반전된 때는 1993년 6월 9일. 말 그대로 느닷없이 찾아왔다. 


급작스럽게 기자회견을 마련한 윤 장관은 제2이통사 선정의 첫 계획을 발표했다. 1994년 6월까지 제2이통사를 선정하고, 서비스 도입 시기를 1996년으로 잡았다. 특히 이 같은 시간차를 고려한 듯 제2이통사의 기술방식을 코드분할다중접속(CDMA)으로 하겠다고 못박았다.1) 


당시 상황 속에서 윤 장관은 발언은 획기적, 다시 말해 폭탄발언에 가까웠다. 이미 상용화된 TDMA가 강세인 상황에서 CDMA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다. 미국에서조차 상용화 사례가 없는 기술발전 단계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정일자와 서비스 도입 시기를 감안한다면 더 없는 좋은 카드이기도 했다. 


동양, 데이콤 최대 주주로


제2이통사 선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6개 컨소시엄은 이후 큰 변수를 맞이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데이콤의 완전 민영화 추진이었다. 1990년 1차 통신산업 구조조정에 이어 데이콤의 민영화가 한 축에서 진행 중인 상태다. 


1993년 9월 22일 조백제 한국통신사장은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한국통신이 보유하고 있는 데이콤 주식 160만 주(23.6%)를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데이콤 주식 전량에 대해 10월 7~8일 이틀간에 걸쳐 일반국민과 법인을 대상으로 희망수량에 의한 경쟁입찰방식으로 매각한다는 것.


하지만 이 입찰은 예정가미달로 전량 유찰됐다. 1천83건의 총 입찰건수에 대한 입찰주식수는 384만 주에 달하기는 했으나 입찰최고가가 4만 1천500원으로 당시 증시의 데이콤 주식가인 4만 3천 원에 비해 낮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통신은 2차 입찰을 10월 28일 재개했으나 개인이 1천 주를 사는 게 그치면서 또다시 재입찰에 나서야 했다. 이 때는 희망수량에 의한 수의계약방식으로 방식을 전환했다. 


3차 입찰에서 그 변수가 발생했다. 동양그룹이 1대 주주로 오르게 된 것. 동양그룹은 계열사인 동양베네피트생명, 동양투자금융과 함께 총 67만 7천400주를 배정받아 데이콤 지분을 10% 보유할 수 있게 됐다. 이전 1대 주주였던 우리사주조합의 지분율은 7.7%였다.2)


제2이통사에 도전했던 동양은 다른 방식으로 정보통신사업에 발을 들이게 됨에 따라 나머지 5개 컨소시엄으로 후보군이 축약됐다. 당초 6개 컨소시엄은 선경과 포항제철, 코오롱, 동부, 쌍용 그리도 동부였다. 


2차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계획 발표


마치 데이콤의 민영화를 기다리기라도 했듯 1993년 12월 10일 체신부가 제2이동통신사 사업자 선정방식을 발표했다. 


체신부는 ‘이동전화 신규사업자 선정방법으로 사업계획서를 평가하는 방법과 단일 컨소시엄을 구성토록 하는 방법 두 가지를 검토한 결과 단일 컨소시엄 방식이 민간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많은 기업들이 참여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이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단일컨소시엄 구성을 민간경제 5단체 가운데 전산업 분야의 대표성과 자율조정 능력이 가장 높은 것으로 인정되는 전경련에 의뢰하기로 했다. 기간은 2개월 내. 만약 구성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체신부 주도로 일정자격을 갖춘 모든 신청자에게 동일한 지분을 배정해 단일 컨소시엄을 구성하겠다고 설명했다. 


또한 체신부는 한국통신이 보유하고 있는 한국이동통신 주식지분 64% 가운데 민간업체가 경영권을 획득하는데 충분한 규모의 주식인 45% 이내를 매각토록 해 이동전화사업 신규허가와 한국이동통신 민영화를 병행하기로 했다.3)


이 같은 체신부의 결정은 1차 제2이통사 선정 당시의 문제를 최대한 회피할 수 있는 묘안으로 분석된다. 정치가 경제를 압도한 1차 선정에서의 기업 불만을, 기업 스스로가 선정하게끔 유도하는 한편, 각 컨소시엄을 주도한 재벌그룹의 경쟁을 억제해 그에 따른 잡음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풀이다. 


게다가 한국이동통신의 민영화는 곧 민간기업으로의 이전을 말하기에 좀 더 유연한 조정이 가능했다. 사실상 체신부의 결정은 기업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한 결과였다. 



요동치는 시장…총성없는 전쟁


각 컨소시엄은 두 개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하나는 전경련이 주도하는 단일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것. 이 선택지는 주주구성에서 제1대 주주로 올라서야 한다는 경쟁 미션이 주어진다. 또 다른 하나는 한국이동통신 주식 매입을 통한 경영권 인수. 다만,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야 해 부담이 상당한 선택지다.


장단이 명확한 두 개의 선택지에 대한 각 컨소시엄별 눈치싸움은 여전했다. 시장도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한국이동통신의 주식매각공고를 앞두고 주가가 폭등했다. 2차 이통사 선정 전인 11월까지만 해도 15만 원이었던 주가는 12월 20일 23만 원대로 올라섰다. 당초 전체 30%에 해당하는 160만 주가 2천400억 원 수준이었으나 3천800억 원까지 늘어난 것. 하루 약 100억 원씩 늘어날 정도로 높아졌다. 


이에 따라 포항제철과 코오롱, 쌍용 등은 주식매입에 따른 자금부담이 너무 커 계획 자체를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볼멘소리를 내기도 했다. 


다만, 변수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포항제철이 정부가 추진 중인 공기업 민영화 작업 대상에서 빠져 당분간 공기업으로 남게 되자, 12월 28일 윤동윤 체신부 장관이 기자간담회를 통해 민영화를 위해 주식매각을 추진하는 한국이동통신의 경영권이 다시 공기업인 포철에 넘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 것.4)  


포철을 극렬하게 반발했다. 특별법을 적용받는 정부기관과 선을 긋는 동시에 대표이사 임명권 역시 대통령이 아닌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통해서 선임되고, 예산과 회계도 정부와 무관하게 움직인다고 해명했다. 정부투자기업이 아닌 정부출자기업으로 통상적인 공기업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5) 


결국 체신부는 같은 달 30일 포철의 입찰자격을 제한하지 않기로 하면서 해프닝으로 종결됐다.6)


포철 이외 또 다른 문제도 제기됐다. 단일 컨소시엄을 구성하는데 주어진 시간이 2개월임을 고려했을 때, 신규 업체의 참여가 어렵다는 것. 즉, 1차 컨소시엄을 주도한 기존 6개 기업 이외에는 참여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삼성과 현대, 럭키금성, 대우 그룹 등은 1차 선정 당시 통신설비업체 제한규정에 따라 각 컨소시엄에서 8.25~10%의 지분을 확보한 바 있다. 만약 단일 컨소시엄으로 구성 기준으로 6개 기업이 모두 참여한다면 남은 지분이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여기에 재벌기업들이 제한선 10%를 준해 참여한다면 여타 다른 기업들은 들어오기도 쉽지 않을뿐만 아니라 설령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그 발언권이 강하지 않은 것임이 자명했다. 


결과적으로 정보통신 시장에 뛰어 들 수 있는 기회가 열리긴 했는데, 벽이 너무나도 높은 셈이다. 사실상 막힌 것이나 다름 없다. 


물론 진입장벽의 어려움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전경련 구성도 뜨거운 감자였다. 1993년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된 후 민간업계의 효율적인 사업조정자 기능을 내걸고 ‘자율조정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전경련 회장단으로 위원이 구성되고 실무위원회의 회장단 그룹의 기획실장이 맡는 기구다. 이 기구가 제2이통사 컨소시엄 구성에 핵심 역할을 담당했는데, 문제는 당시 회장단은 김석원 쌍용 회장 이외에 포철과 코오롱, 동부, 동양은 멤버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판이 사전부터 기울 수 있다는 지적이 따랐다. 


경쟁은 국내 업체들 사이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물밑에서는 외국업체들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단일 컨소시엄의 외국기업 지분은 최대 20%다. 외국계 기업들의 경쟁도 경쟁이겠지만, 이 지분을 배분해야 하는 전경련 역시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1차에 참여해 고배를 마셨던 미국 나이넨스나 GTE, 팩텔 등은 나름의 명문을 가지고 해당 기업들에게 컨소시엄 참여에 대한 정보를 건내받기를 원했다.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의 용단 

고 최종현 SK 회장 20주기 사진전에서 최태원 SK 회장이 손을 맞대고 있다 [사진=SK]

1994년 새해가 시작됐다. 1월 10일 한국통신이 한국이동통신 주식 64% 중 44%에 해당하는 243만 8천300주를 희망수량에 의한 경쟁입찰방식으로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입찰서류는 24~25일까지로 낙찰자 발표는 26~27일 발표할 예정이었다. 


11일에는 전경련이 새해 첫 회의를 열고 제2이동통신 단일 컨소시엄 구성방식에 대해 논의했다. 전경련은 모든 의사결정과 최종결정을 회장단회의가 맡기로 결정했다. 1개월 후인 2월 17일까지는 최종 확정이 목표였다.7) 


15일 전경련 회장단은 비공식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회장단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장소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최고의 한옥을 짓겠다는 목표로 서울 한남동 자택 내 마련한 영빈관인 승지원에서 열렸다. 업계에서는 이 모임을 가리켜 ‘승지원 결의’라고도 불렀다.8) 


이틀이 지난 1월 17일 업계를 뒤흔든 일대 깜짝 발표가 나왔다. 선경과 쌍용이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 게다가 1차 선정 당시 1위를 차지하면서 가장 유력시됐던 선경의 포기는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판단이었다.9)


이 같은 판단에 대해 세간에서는 고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의 용단이라고 평가했다. 현재의 SK텔레콤이 1위 이통사로서 굳건한 모습을 보인 것은 이 당시 최 회장의 결단이 주효했다는 증거다. 그간 최 회장은 이동통신 사업 영위를 위해 단 하나의 오점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해온 바 있다. 


1차 선정 당시 압도적 1위였음에도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관계로 인한 특혜 시비로 고배를 마신 후, 공교롭게도 2차 선정 때는 최종현 회장이 단일컨소시엄을 맡긴 전경련 회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때문에 전경련 회장으로서 또다시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상당했다. 


다만, 제2이통사 포기 역시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이미 단일 컨소시엄으로 구성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재계 부담은 일시적으로 줄어들었으나, 또 다른 대안인 한국이동통신의 인수는 시간이 갈수록 부담이 배가됐다. 이로 인해 한국이동통신 지분 매입에 대해 유력 후보인 포항제철과 코오롱 마저 재검토에 나서기도 했다. 


즉, 선경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적고 유력한 제2이통사를 포기하고 상당한 리스크를 안은 채 제1이통사인 한국이동통신을 택한 셈이다. 물론 리스크가 큰 만큼 그에 따라 얻는 혜택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지난 15일 열린 1차 승지원 결의에서도 최 회장은 “재계가 단합된 모습을 보이고 국민과 정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선경의 제2이통사 참여 포기가 불가피하다”라고 회장단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함께 참여하고 있던 회장단 역시 이 같은 최 회장의 결단을 말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쌍용 역시 과열된 제2이통사에 뛰어들기보다는 제3이통사에 도전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 포기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미 체신부가 이동통신 시장을 키우기로 했고,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을 통해 제3, 제4의 이통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선경 ‘제1이통’ 잡다…이동통신 민간경쟁시대 개막


선경과 쌍용의 제2이통사 포기는 결론적으로 포철과 코오롱 2파전 구도를 만들어냈다. 17일 선경의 제2이통사 포기가 공식적으로 발표되자마자 코오롱이 한 발 앞서 제2이통사 지배주주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선언했으며, 다음날인 18일 포철이 기자회견을 통해 제2이통사에 정식 도전하겠다고 밝히면서 양측의 갈등은 점차 깊어졌다. 


하지만 1월 22일 제2차 승지원 결의에서도 뚜렷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 전경련은 컨소시엄을 개방해 포철과 코오롱, 동부 등 기존 3개사 이외에 금호와 아남, 건영, 삼환영풍 등 5개 사가 추가돼 모두 8개 기업이 지배주주를 위한 경합에 돌입했다.10) 


그 사이 한국이동통신 주식입찰의 날이 밝았다. 1월 23~24일 일정으로 한국이동통신 주식 입찰이 시작됐다. 선경은 한국이동통신의 지배주주가 되기 위해 안감힘을 썼다. 대규모 입찰가를 모아야 하는 상황이 쉽지 않았다. 그룹 내에서도 최 회장의 결단을 아쉬워한 데는 이 같은 자금 부담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선경은 마지막날인 25일 오후 가까스로 입찰에 참여했다. 유공과 흥국상사, 선경인더스트리 등 3개 계열사를 통해 437억 원의 입찰보증금을 납부했다. 26일 선경그룹은 한국이동통신의 주식 23%인 127만 5천 주를 4천271억 2천500만 원에 매입키로 하면서 드디어 이동통신 사업을 다시 한번 거머쥐게 됐다.11) 


손길승 대한텔레콤 대표는 10년만의 집념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환호했다. 그룹투자규모가 1조 7천억 원선으로 4천억 원을 추가 조성하는 것에 부담이 있으나 어려움을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이에 앞서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 역시 인수금액에 대한 부담과 제2이통사 포기와 관련한 고민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으면서도 정보통신사업 진출이 부담을 이길 정도로 중요하고, 진출 자체가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만큼 값지다고 강조했다.12)


그리고 이날은 우리나라에서 이동통신 사업이 국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민간경쟁시대로 진입한 첫 시작점으로 남게 됐다.


극적인 제2이통사 탄생

신세기통신 설립 이후 큰 인기를 끈 바 있는 TV CF 광고 속 한 장면.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카피는 그 당시 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진=CF]

선경이 제1이통사 ‘한국이동통신’을 거머쥐자 시장의 관심은 제2이통사로 옮겨갔다.


1994년 1월 26일 유력한 지배주주로 꼽히는 포항제철과 코오롱 수장이 첫 회동을 가졌다. 이날 조말수 포철사장과 이웅열 코오롱그룹 부회장은 코오롱빌딩에서 지배주주가 누가 될지 선의의 경쟁을 벌였다. 물론 이날도 결론은 도출되지 않았다. 


1월 29일 제3차 승지원 결의가 이뤄졌으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전경련은 당초 예상한 2월 17일에서 25일로 최종선정을 연기했다. 14~18일까지 합동서류면접심사를 실시하고 2월 25일 회장단 회의를 통해 제2이통사를 최종 확정하겠다고 밝혔다.13) 


시간이 흐를수록 경쟁구도는 단순화됐다. 8개 기업 중 쌍용, 동부, 건영, 영풍이 포철 컨소시엄에 합류했다. 결과적으로 지배주주에 나선 단체는 포철과 코오롱, 금호로 압축됐다. 다만, 신규 참여사인 금호는 제3이통사 도전을 위한 포석으로 여겨지면서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14일 시작된 합동서류면접심사가 예정대로 끝나자 19일 전경련은 포철과 코오롱, 금호 3개 사간 자율합의를 통해 주주 구성이 완료되기를 바랐다. 만약 합의가 불발될 경우에는 전경련이 임의결정하겠다고 밝혔으나 기간은 함구했다.14) 


이에 따라 포철과 코오롱은 합의안을 도출하기 위한 실무협의를 진행했다. 21일 저녁 롯데호텔에서 권혁조 신세기통신(포철)과 송대평 제2이동통신시장(코오롱), 전경련 실무팀이 모여 논의를 이어갔으나 진전이 없자 22일 오전 뉴서울호텔에서 조찬회동을 갖기도 했다. 23일 저녁에는 승지원에서 회장단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 가운데 23일로 예정된 선정일자가 25일로 자연스럽게 미뤄진 셈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자율적 합의가 어려워짐에 따라 28일로 또다시 연기됐다.15)16) 


제2이동통신사 선정 발표날인 28일 오전에도 포철과 코오롱의 신경전은 도무지 끝날 기색이 없었다. 새벽부터 조말수 포철 사장과 이웅열 코오롱 부회장이 담판에 나서기도 했으나 양보 없는 혈전만 나눴다. 지분배정과 공동경영 문제에 관한 이견차가 쉽사리 줄지 않았다. 


이 같은 갈등에 이건희 삼성 회장뿐만 아니라 회장단 인원이 나서 중재에 안간힘을 썼다. 만약 자율적 합의가 아니라 전경련에 의한 임의결정이 내려진다면 전경련 차원에서도 잇속만을 챙기는 재벌기업 이미지와 위상까지도 흠결이 생길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바람대로 막판 극적으로 합의안이 받아들여졌다. 포철이 15%를 확보한 지배주주로 코오롱이 14%로 뒤를 잇는 최종안이 통과된 것. 기업 자율 합의를 통한 제2이동통신사가 탄생한 날이다. 물론 정치권의 계속된 질책과 금호의 반발, 진통 속 여론의 비난이 있기는 했으나 5년간의 대단원이 막이 내린 날이기도 했다.17)


한국이동통신 vs 신세기통신…민간 경쟁 시작


선경그룹은 1994년 3월 16일 한국이동통신의 주식 매입금 4천271억 2천만 원을 납입했다. 주식 매입금은 관계사인 유공과 선경인더스트리, 흥국상사가 나눠 분납했다. 다만, 한국통신이 보유한 한국이동통신  주식 33%에 대한 매각이 유찰되면서 한동안 경영권을 가져올 수 없었다. 이후 같은 해 6월 2일 한국이동통신의 주식이 증권시장에 매각됨에 따라 비로소 선경그룹이 한국이동통신의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시간이 흘러 7월 7일 선경그룹은 한국이동통신 임시주주총회를 개최하고 경영권을 최종적으로 취득했음을 알렸다. 한국이동통신의 대표로 손길승 부회장을 선임했다. 


같은 달 18일 손 부회장은 취임식을 통해 “민간기업으로의 발전적인 새 출발을 위해 민간기업의 활력과 선경그룹 경영의 특징을 한국이동통신에 접목해 한마음 한뜻으로 세계 일류의 종합정보통신 기업이라는 목표를 달성해 나가겠다”고 선언했다.18) 


그 사이 신세기통신도 권혁조 대표이사를 선임하고 법인을 등록하는 등 출범을 위한 사전 작업에 돌입했다. 240여 국내외기업들이 모인 컨소시엄으로 사우스웨스턴벨, 에어터치커뮤니케이션스, 퀄컴 등도 함께 했다. 


마침내 6월 30일 창립기념식을 개최하고 신세기통신의 출발을 알렸다. 이 자리는 윤동윤 체신부 장관을 비롯해 최종현 전경련 회장(선경그룹회장), 김만제 포철 회장,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 등 관계인사만 750여 명이 참석한 대형 행사였다.


자리에 오른 권혁조 사장은 “1996년 1월 디지털 이동통신 방식인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으로 이동전화 서비스를 시작하고 조기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고객만족기술우위 국제화를 3대 경영이념으로 삼고 구현해 가겠다”고 강조했다.19) 


민간 주도의 민간 경쟁을 통해 정보통신의 새 출발을 알린 1994년은 5년간의 1차 통신사업 구조개선의 마지막장으로 제2차 통신사업 구조개편을 알린 때이기도 했다. 



1) <"제2이통 사업자통신 디지틀식 채용가능성">, 매일경제, 1993. 6.10.

2) 주호석 성철환 기자, <데이콤 경영권 향방 관심 동양 최대주주 부상>, 매일경제, 1993.11.28.

3) 김홍 기자, <2이통 [단일 컨소시엄] 확정>, 조선일보, 1993.12.11

4) <한국이동통신 주식 매입 포철은 제외 가능성 윤 체신장관 시사>, 동아일보, 1993.12.29.

5) <[이통주] 매입 불허 검토 관련 포철 "부당제재" 반발>, 매일경제, 1993.12.30.

6) <한국이통 주식 매각 포철 응찰자격 부여>, 매일경제, 1993.12.31.

7) 김재호 기자, <이통 회장단서 결정>, 조선일부, 1994. 1.12.

8) <전경련 회장단 비공식모임 제2이동통신 컨소시엄 논의>, 한겨레, 1994. 1.16.

9) 강반구 주호석 기자, <선경・쌍용 [2통] 포기배경과 향후 전망 [1통]선경-[2통] 코오롱・포철 "가시권", 매일경제, 1994. 1.18.

10) 강반구 기자, <컨소시엄 구성 막바지 [합종연횡]>, 매일경제, 1994. 1.23.

11) <중단 없는 변신, 민영화 준비>,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21

12) <손길승 사장 일문일답 "10년 노력 결실 보람...인수금액 조성 자신">, 매일경제, 1994. 1.27.

13) <2통 지배주주 25일 최종선정>, 매일경제, 1994. 2. 1.

14) <2통 3개사 자율합의 실패땐 "전경련 회장단서 결정">, 한겨레, 1994. 2.20.

15) 박명훈 기자, <[2통] 산실로 떠오른 승지원>, 경향신문, 1994. 2.23.

16) <전경련 [2통] 28일 발표 확정 안팎 흠집만 남긴 [자율합의]>, 1994. 2.25.

17) 강반구 기자, <이통 민간 경쟁시대(상) 2통 포철 선정 배경>, 1994. 3. 1.

18) <민영기업으로의 새출발>,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27~8

19) <신세기통신 창립기념식>, 매일경제, 1994.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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