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1995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한국이동통신 직원들은 인천과 부천을 오고 가며 부산하게 움직였다. CDMA 상용화의 불확실성이 내부에서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에 본격적인 마케팅 이전에 직원들의 신뢰를 얻어야 했다. 직원들이 직접 상용화 초기 지역을 돌아다니며 CDMA 시험통화를 시도한 이유다. 다행스럽게 CDMA 통화는 직원들을 만족시킬 만큼 흡족한 결과물을 내줬다. 이에 힘입어 한국이동통신은 대대적인 마케팅 작업에 착수했다.
한국이동통신은 상용화 이전인 1995년 12월 26일 정부로부터 상용 서비스를 위한 형식 승인을 완료받고 최종 시험통화를 대비했다. 적체현상을 대비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유휴 주파수 대역까지 할당받았다.
CDMA 상용화 하루 전인 1995년 12월 31일 한국이동통신은 마지막 최종 시험통화를 실시했다. 시험통화는 손길승 SK그룹 부회장과 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 등이 참석했다. 인천 톨게이트에서 차량에 탑승한 손길승 부회장은 인천 주안역(1호선)까지 이동하면서 최종현 SK그룹 회장에게 전화(CDMA 방식)를 걸어 상황을 보고 했다. 이때 역시도 단말기를 번갈아가며 쓰는 동안 단 한차례도 끊기지 않고 명료한 통화품질을 보여줬다.1)
그리고 우리나라 제1이통사 한국이동통신은 1996년 1월 1일 세계 최초 CDMA 상용화를 목전에 뒀다.
이동통신 상용화 조건은 크게 3가지다. 네트워크 인프라, 이동통신 서비스, 단말이 꼽힌다. 단말을 보유한 고객이 서비스에 가입해 네트워크 인프라를 사용할 수 있어야 완전한 상용화로 인정된다.
가령 인프라가 갖춰졌다고 하더라도 100대의 단말기로 100명의 가입자만 받아 운영하는 방식은 상용화라기보다는 시험통화와 다를 바 없게 된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서비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이동통신이 CDMA 인프라를 차곡차곡 쌓아 올릴 때 한편에서는 CDMA 단말기 개발이 한창이었다. 국내서 CDMA 단말기를 개발했던 기업은 삼성전자와 LG정보통신(현 LG전자), 현대전자, 맥슨전자 등 4곳이었다. CDMA는 한정된 지역에서 서비스를 시작해 점진적으로 커버리지를 늘려가야 했기에 단말은 기존 아날로그 통신과 CDMA 디지털 통신이 모두 가능한 듀얼모드로 설계돼야 했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 CDMA 단말은 어떤 제품이었을까. 애석하게도 지난 2021년 단말사업을 접은 LG전자의 전신, LG정보통신이 그 주인공이다.
LG정보통신의 전신은 금성전기다. 금성전기는 1984년 일본 NEC와 기술제휴를 통해 카폰을 개발했으나 3년 후 제휴가 종료되면서 금성통신으로 사업을 이관시켰다. 이후 1993년 휴대전화 '셀스타'를 출시하면서 최초로 단말 브랜드화에 성공했다.
이듬해 금성통신은 금성사로 흡수되고, 1995년 금성이 사명을 LG전자로 바꿨다. LG전자의 신규 휴대폰 브랜드가 바로 ‘화통(話通)’이다. 화통 브랜드는 안타깝게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CDMA 사업을 추진하면서 통신장비와 단말 개발이 계열사인 LG정보통신으로 이관됐기 때문이다. LG정보통신은 또 다른 신규 브랜드로 '프리웨이'를 내놨다. LG전자 단말 브랜드 '프리웨이'에서 바로 최초의 CDMA 휴대폰인 ‘LDP-200’이 탄생했다.
‘프리웨이 LDP-200’은 153x51mm 크기에 25mm 두께, 238g 무게를 갖춘 단말이다. 통화시간은 CDMA 2시간, 아날로그는 1시간으로 통화대기시간 기준 CDMA는 30시간, 아날로그는 10시간이었다. CDMA가 이동통신 기술 규격 상 전력효율이 더 뛰어났기에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한다.
현재는 형태와 디자인, 성능 등으로 하나의 메인 모델이 분할되는 방식이라면 CDMA 초기는 배터리 사용량으로 모델 기종을 구분됐다. 하지만 프리웨이 LDP-200의 경우 1종의 배터리 모델만 출시됐다. 2)
12월 21일 정부로부터 형식 검증을 완료받은 LG정보통신의 ‘프리웨이’는 약 72만 원의 가격의 고가 제품이었다. 이후 삼성전자 애니콜 SCH-100과 현대전자 HHP 200 등의 단말이 출시되기 전까지 약 4개월가량을 독점했다.
1996년 1월 1일. 한국이동통신은 인천과 부천 지역에서 C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전화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아날로그와 CDMA 듀얼방식으로 CDMA 가입자는 CDMA 커버리지와 상관없이 전국에서 이동전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다만, 1월 1일이 신정 연휴인 관계로 1호 가입자는 휴일을 넘긴 1월 3일 탄생했다. 3일 오전 9시 1분 남인천영업소에 방문한 자영업자 정은섭 씨는 가입신청서를 제출하고 CDMA 1호 가입자라는 영예를 얻었다. CDMA 디지털 이동전화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몇 달을 기다렸다는 정 씨는 깨끗한 통화 감도에 감탄했다며 언론사들의 인터뷰에 응했다.3)
이 시점에서 ‘왜 서울 수도권이 아닌 인천과 부천에서 CDMA를 상용화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사실 한국이동통신은 서울에서 먼저 CDMA 서비스를 시작하고자 했다. 하지만 주파수 추가 확보가 어려워 안정적 운영이 가능한 수도권 내 지역인 인천과 부천을 선택했다. 각 지역별로 주파수 운용폭이 달랐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이후 800MHz 대역의 유휴 대역을 할당받은 한국이동통신이 수도권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커버리지를 늘려 갔다.
1996년 4월 12일 서울 등 수도권 지역으로 CDMA 커버리지를 확대하고 7월에는 울산, 8월은 대구 경북, 9월은 부산, 경남과 광주 전남 지역으로 확대했다. 결과적으로 9개월 만에 전국 주요 도시에 인구대비 약 79%에 이르는 CDMA 전국 커버리지를 달성했다.
CDMA 서비스 요금은 비쌌다. 우선 이동전화 판매점에서 디지털 단말을 구입해야 했다. LG정보통신 프리웨이 LDP-200 가격은 72만 원선. 기본료 2만 7천 원. 10초당 25원의 통화료가 부과됐다. 15초를 이용하면 20초로 인정해 50원이 부과되는 방식이다.
단말뿐만 아니라 서비스 자체도 고가였기에 한국이동통신뿐만 아니라 신세기통신 역시 보급에 속도를 높이기 위해 직접 판매 활로를 모색했다. 정보통신부에 CDMA 단말기를 직접 판매하고자 ‘유통업겸업허가신청서’를 제출했다. 이 신청서는 1996년 1월 15일 정보통신부로부터 1년간 한시적용이라는 허가를 받았다. 기존 단말기 유통업체와의 관계 등을 고려한 조치였다.4)
성공적인 CDMA 상용화를 마무리한 한국이동통신은 1996년 3월 28일 세계 최초 CDMA 이동전화 상용화 성공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서울 힐튼호텔에서 개최한 이 행사는 최종현 SK그룹 회장뿐만 아니라 이수성 국무총리,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 내외 귀빈과 법인, 우수고객 등 1천여 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손길승 부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CDMA 방식 디지털 이동전화 서비스의 상용화 성공을 계기로 향후 한국이동통신은 차세대 통신 서비스와 멀티미디어 세계를 선도해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축사로는 이석채 정보통신부장관이 나서 “순수한 국내 기술로 상용화에 성공한 CDMA 디지털 이동전화 서비스는 국내 정보통신 서비스가 세계 시장에서 뒤지지 않도록 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추켜 세웠다.
또한 CDMA 세계 최초 공로를 인정해 윤동윤 전 체신부 장관과 경상현 전 정보통신부 장관 등 국무위원과 김광호 삼성전자 부회장, 정장호 LG정보통신 사장, 김주용 현대전자 사장 등 파트너사들, 조기영 고객 대표를 포함한 24명에게 감사패가 전달됐다.
특히, CDMA 최초 상용화를 사선에서 진두지휘했던 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은 같은 해 4월 8일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서 사장은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어려운 연구에 몰두해 온 젊은 과학자들에게 영광을 돌리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CDMA 방식 이동전화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이동통신 기술과 서비스의 광복이나 마찬가지다”라고 소감을 밝혔다.5)
기념행사 이후 한국이동통신은 4월 12일 서울 수도권으로 CDMA 커버리지를 확대했으며, 4월 23일 가입자 1만 명을 돌파했다. 단말 수량이 부족할 정도로 폭발적인 가입자를 감내해야 했다. 식별번호인 011을 활용한 ‘디지털 011’ 브랜드는 1997년 속도를 보다 강조한 ‘스피드 011’로 전환되면서 고객의 대표적 상징으로 기록됐다.
한국이동통신이 CDMA 세계 최초 상용화를 달성한 1996년 1월 1일.
동시 상용화를 계획했던 신세기통신의 입은 바싹 말랐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듯 242개 기업이 한데 모여 있는 신세기통신은 상용화 전부터 대내외적인 갈등에 시달렸다. 외국 기업의 압박으로 인해 아날로그 방식 이동전화 서비스를 요청했으나 제2이동통신사 선정 조건과 맞지 않아 정보통신부로부터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는 뭇매만 맞았다. 게다가 그 사이 수장도 바뀌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월 1일에는 상용화 시기를 6월로 늦춰 달라는 요청을 할 정도로 기약할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세기통신은 주파수에 대한 열세, 아날로그 없이 순수 CDMA로만 커버리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인프라 제약, 도무지 섞이지 않는 내부 조직문화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했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한 듯 정태기 신세기통신 사장은 1월 초 각 매체를 통해 신세기 통신의 CDMA 로드맵을 공개하고 서비스 차별화를 통해 승부수를 띄우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장치산업 특성과 PCS 도전 등으로 인해 3년간 적자가 예상되기는 했으나 빠른 가입자 확보를 통해 그 시기를 1년 내로 앞당기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기약할 수 없는 4월 상용화를 위기이자 기회라 설득했다.
이후 1월 말 6개월 내 상용화를 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는 그때, 정 사장은 서비스 개시일을 4월로 못 박고 비상근무체계에 돌입했다. 임원회의 명칭조차 ‘4월 상용서비스 개시 추진위원회 회의’로 바꿀 만큼 강한 의지를 보였다.6)
신세기통신은 1996년 1월부터 기지국과 교환국 설치 등 준비작업을 계획대로 진행했다. 관련부서가 비상근무에 들어갈 정도로 전 직원이 총동원됐다. 4월 상용화를 위해 우선적으로 2월 초부터 수도권과 대전권 등 1단계 서비스 지역에서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2단계는 부산, 3단계는 대구와 광주, 강원권을 대상으로 했다. 사내직원과 관련인사 600명이 달려들어 CDMA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3월에 들어서자 신세기통신은 일반고객 2천 명을 대상으로 시범 서비스를 고도화했다. 시범기간 동안 모든 요금을 무료로 풀었다. 시범고객은 2월 중순부터 신세기통신 대리점을 통해 접수받았다. 그 결과 통화소통률 95%를 달성한 신세기통신은 자신감을 얻었다. 올해 안에 25만 명에서 3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하겠다는 내부 계획을 수립했다.
드디어 4월 1일. 정태기 신세기통신 사장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포스코센터에 올랐다. 상용 서비스를 기념하는 017 개통식이 막 열리기 전이었다. 신세기통신의 식별번호는 '017'. ‘전파의 힘이 강하다’라는 슬로건을 더한 ‘파워디지털 017’의 시작을 알렸다.7)
개통식을 마친 정 사장은 서울 호텔신라를 향해 달렸다. 신세기통신의 CDMA 상용화를 기념하기 위한 축하행사가 마련돼 있었다. 이수성 국무총리와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 김우석 내무부장관, 이우영 중소기업청장, 이각범 청와대 정책기획 수석, 심우영 청와대 행정수석뿐만 아니라 김만제 포스코 회장과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도 자리했다. 경쟁사인 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도 함께 했다. 8)
다만, 화려한 시작의 이면에는 어둠도 깔려 있었다. 한국통신과 같은 유선 네트워크 인프라도, 한국이동통신의 아날로그 무선 이동통신 인프라도 없었던 신세기통신은 온전히 CDMA로만 서비스가 가능했다. 즉, CDMA 커버리지가 없다면 통화가 끊겼다. 아날로그 방식을 연동한 한국이동통신과 달리 통화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신세계통신은 피하기보다는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우선 핸디캡을 인정했다. 시스템이나 네트워크 안정성 등의 문제는 해결했으나 초기 가입자들이 불이익을 받은 가능성이 있음을 알렸다. 보상 차원에서 한시적 요금할인 혜택을 3개월간 적용했다. 기본료 2만 2천 원은 그대로였으나 당초 요금보다 50%를 할인된 10초당 15원을 책정했다. 여기에 정 사장은 통화 중 끊어지면 요금 자체를 받지 않는 과금제도 도입을 예고하기도 했다.9)
신세기통신의 가세로 CDMA 가입자는 빠르게 늘어났다. 서비스 2개월도 채 안된 5월 27일. 한국이동통신 3만 5천 명, 신세기통신 1만 5천 명을 기록하면서 5만 명을 돌파했다.10) 공급 대비 수요가 폭증하자 단말 수급을 위한 신경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물론 초기 서울 수도권과 대전권에만 CDMA 서비스를 상용화했던 신세기통신은 타 지역에서 통화가 되지 않는다는 고객 불만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이 빠르게 시장 선점에 나서기는 했으나 이후 PCS 도전으로 인해 우리나라 이동통신 시장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1) <미래를 향한 결단, CDMA 상용화>,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56
2) <이동전화CDMA서비스 내년 일반에 첫선>, 매일경제, 1995.12. 1.
3) 석종훈 기자, <디지털식 이동전화 한국이통 첫서비스>, 조선일보, 1996. 1. 4.
4) 주호석 기자, <정통부 한국이통 신세기 CDMA단말기판매 1년간 한시 허용>, 매일경제, 1996. 1. 16.
5) <미래를 향한 결단, CDMA 상용화>,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58
6) 석종훈 기자, <4월부터 개시 디지털휴대폰 서비스>, 조선일보, 1996. 1.24.
7) <신세기통신 '017 개통식>, 한겨레, 1996. 4. 2.
8) 조헌주 기자, <디지털 휴대전화 개통 축하연>, 동아일보, 1996. 4. 2.
9) 이지환 기자, <인터뷰 정태기 신세기통신 사장 [017] 이동전화 올 가입자 29만명 목표>, 매일경제, 1996. 4. 3.
10) 조헌주 기자, <디지털휴대전화 상용서비스 3개월 가입 5만명 넘어 "성공예감">, 동아일보, 1996. 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