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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기 May 17. 2023

(13) 한통·데이콤 TDMA 한국이통·신세기 CDMA

5부.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1995년. 개인휴대통신(PCS) 기술표준 논란이 뜨겁게 타올랐다.


이 논란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전해인 1994년을 먼저 살펴야 한다. 당시 체신부는 1차 통신구조 개편방향에 대한 마무리 작업인 제2이동통신사 선정 전후로 2차 통신사업구조 개편을 준비 중이었다. 앞서 1차 개편이 국가 주도에서 민간 자율경쟁으로 변화를 야기했다면 2차 개편은 민간 경쟁을 보다 확산시키는데 주력했다. 


체신부가 준비 중인 2차 통신사업 개편의 핵심은 경쟁력 있는 강력한 통신사업자를 육성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통신사업 영역에 대한 파괴적 혁신이 따라야 했다. 즉 통신분야에서 유선과 무선, 정보통신 등 각각의 사업권을 부여해 가림막을 쳐 놓은 것들을 해제해야 했다. 누구나 통신사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 경쟁을 부추기겠다는 복안이다. 


가령 일반통신사업자에 속했던 한국통신(현 KT)과 데이콤(현 LG유플러스), 특정통신사업자인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 등을 구분해 상호 사업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했으나 이 같은 제한을 없애고 거시적 경쟁을 도입한다는 게 핵심이다.


시장은 이같은 변화에 빠르게 반응했다. 통신사업은 말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비유되는 때였다. 앞서 제2이동통신사 선정에서도 재벌 기업들이 한바탕 총성없는 전쟁을 치룬 상태였다. 승자와 패자가 뒤섞이는 한편, 지분제한으로 참여하지 못한 4대 재벌기업들은 귀가 쫑긋할 소식이었다. 


체신부는 통신사업을 주파수공용통신(TRS)과 무선데이터통신, 발신전용휴대전화(CT2), 저궤도위성 이동통신과 개인휴대통신(PCS)으로 구분하고 그에 따른 로드맵을 짜느라 분주했다. 


TRS 사업은 교통방송과 경찰청 등이 자가통신용으로 썼다. 적은 주파수로 동시에 여러 가입자가 통신할 수 있는 이동통신 서비스였다. 현재까지도 재난에 대비하고자 쓰이고 있으나 PS-LTE 등으로 넘어간 서비스다.


무선데이터통신은 전담사업자가 있었으나 일반사업자뿐만 아니라 특정사업자에게도 기존 통신망을 이용해 서비스할 경우 허가 없이도 쓸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CT2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명 ‘시티폰’ 서비스다. 발신전용휴대전화로 불렸다. 일정구역 내에서 상대방에게 발신만 할 수 있고 수신은 불가했다. 최근 드라마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시티폰은 ‘응답하라 1994’에서 성동일(배우)이 주식으로 대박을 노리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한국통신이 서울 여의도 지역을 대상으로 시범서비스를 시작해 확산을 노렸으나 삐삐가 몰락하면서 자연스럽게 무대 뒤로 퇴장했다.


어수선한 PCS 사업자 선정 속 정보통신부 신설


체신부의 2차 통신개편안 중에 눈에 띄는 부분은 단연 ‘개인휴대통신(PCS)'이다. PCS는 영국 브리티시텔레콤(BT)의 레이몬드 스틸 박사가 제안한 방식으로 개인마다 고유 이동전화번호를 부여받아 초소형 단말기를 이용해 언제 어디서나 이동전화를 할 수 있는 첨단 서비스를 가리켰다. 스틸 박사는 PCS 번호가 마치 주민등록번호와 마찬가지로 개인에게 부여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초기 PCS는 개인소통시스템(personal communication system)으로 불렸으나 망 기술 개념을 중심으로 유럽에서는 PCN(personal communication Network)로 명명하기도 하고, 미국에서는 벨코아 콕스 박사의 제안으로 쓰임새에 착안해 PCS(personal communication Service)라 말하기도 했다.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이들을 꿰뚫는 의미는 비교적 간단하다. ‘개인이 언제 어디서나 이동전화를 쓸 수 있다’라는 목적은 동일하다.


이 같은 PCS가 1995년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 한국통신과 데이콤, 그리고 정부 간의 갈등을 야기한 데는 PCS 그 자체라기보다는 PCS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행주체에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PCS’가 일종의 개인휴대 개념이라고 한다면 그 개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실제 구현되는 기술 방식이 있어야 한다. 한 조직에 명령을 내리는 보스가 있다면, 직접 수행에 나서는 행동대장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행동대장 선택에 이견이 있는 셈이다. 주요 후보군은 크게 시분할다중접속방식(TDMA)과 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CDMA)이 꼽힌다.


기술방식 선택은 향후 우리나라 PCS 시장 생태계 자체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관련 생태계가 어떤 방향으로 갈지, 나아가 어떤 기업이 선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업들에게 이 선택은 간단하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채택되는 것이 제일이다. 그렇기에 기업 스스로가 자신 있는 기술표준, 또는 준비하고 있는 기술표준이 PCS 기술표준으로 인정받기를 바랐다. 


또 하나. PCS 기술 표준 선정문제가 더 뜨겁게 타올랐던 이유로 체신부가 PCS 사업자 신규 지정을 지정하겠다고 발표해서다. 이 말은 곧 이동통신사업을 영위하는 사업자에게는 PCS라는 또 다른 먹거리를 줘 경쟁 역량을 일시에 끌어올릴 수 있다. 반대로 이동통신사업을 하지 않는 기업들에게는 통신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한다. 


1994년 5월 30일 윤동윤 체신부 장관은 오전 국회 당정협의회에서 PCS와 관련해 우선적으로 1개 사업자를 선정하겠다고 선언했다.1) 이어 같은 해 6월 30일 체신부가 2차 통신사업구조 개편방향을 최종 확정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PCS 1개 사업자를 1995년 중반께 선정하겠다고 일정까지 공개했다. 선정 여부에 따라 1997년부터 시범서비스를 도입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관련된 법과 제도 정비도 끝마쳤다.2)


한편, 1994년 말에는 정보통신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부각되는 큰 사건이 발생한다. 새로운 문민정부로 전환되고, 정부조직법이 개정되면서 그간 정보통신분야를 이끌었던 체신부를 뒤로 하고 ‘정보통신부’가 신설됐다. 정보통신이 국가 주요 산업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전 우편 업무는 소속기관인 체신청(신설)이 관할하게 됐다.3)


비록 현재 정보통신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과거 정보통신분야를 하나로 모아 일관된 정책을 추진하면서 우리나라 IT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정부 조직으로 추억된다. 여러 차례 시련을 겪은 후 우려곡절 끝에 미래창조과학부로 이관됐으며, 현재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그 이름과 명맥을 잇고 있다.


한국통신·데이콤 ‘TDMA’ vs 한국이동통신·신세기통신 ‘CDMA’

2G 휴대폰 [사진=LGU+]

PCS 사업자를 선정하겠다는 소식에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곳은 다름 아닌 한국통신이었다. 통신사업을 영위하는 한국통신이 왜 설래는지는 과거 상황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한국통신은 앞서 이동통신 분야를 한국이동통신에게 넘겨준 후 그저 그 시장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제2이동통신사 선정 역시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한국통신으로서는 다시 이동통신 시장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국가기관으로 출발해 탄탄히 쌓아 올린 유선 네트워크 인프라가 있었던 한국통신에게는 이동통신만 있다면 황금알뿐만 아니라 온갖 금은보화가 터져 나오는 신비의 멧돌을 가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한국통신은 1995년 초 이상철 단장을 중심으로 무선통신사업추진단을 구성했다. PCS 사업자 선정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현행 이동전화보다 낮은 요금과 20만 원대 단말기로 전국을 재패하겠다는 야심에 불타 올랐다. 국내 통신장비 업체인 삼성전자, LG정보통신, 대우통신 등과 PCS 공동개발협약도 체결했다.4)


그에 앞서 한국통신은 시티폰(CT2) 시범 사업을 전개했다. 1995년 3월 8일 여의도 지역에 CT2 시범 서비스를 시작한 한국통신은 이후 시티폰을 위해 구축한 망 인프라를 PCS 기지국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5)


한국통신의 적수로는 같은 유선 사업을 영위했던 데이콤이 부상했다. 데이콤도 만만치 않은 준비 태세를 갖췄다. 1997년 6월 대도시 중심으로 PCS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2000년까지 R&D에만 무려 1조 8천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공언했다. 국내 업체들과의 공동개발을 즉각 추진했다.


앞서 이동통신 사업권을 보유한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으로서는 잘 나가는 맏형들인 한국통신과 데이콤의 참전 예고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맏형한테 빼앗길 바에야 동생들이 PCS 사업권을 차지해야만 하는 형국이었다. 이미 개발 중인 CDMA 기술을 앞세워 PCS 사업 진출을 추진했다.6)


단순했던 판세는 보다 복잡해졌다. 한국통신이 시분할다중접속방식(TDMA)을 채택하고, PCS 기술 표준으로 밀어붙였다. 데이콤 역시 TDMA로 기울었다. 이동통신시장에서 한국통신은 후발주자이기에 앞서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의 CDMA를 채택하기보다는 대척점에 있는 기술 표준을 통해 차별화에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다. 전 세계적으로 TDMA가 채택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한국통신의 우회전략으로 머리를 싸맨 곳은 정보통신부다. 정보통신부가 어떤 PCS 기술표준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PCS 사업권 역시 따라갈 공산이 컸다. TDMA라면 한국통신이, CDMA라면 한국이동통신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다. 때문에 사업자들은 자신의 기술표준이 PCS 표준이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 세계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첨단의 CDMA와 전 세계 범용성을 가지고 있으나 CDMA보다 뒤처진다는 TDMA 중 어느 하나를 쉽게 선택하지 못했다. 그간 꾸준히 국가 기술표준으로 수천억 원을 쏟아 상용화를 앞에 둔 CDMA와 제3의 사업자가 당연지사 선택할 TDMA는 무엇을 선택하든 리스크를 감당해야 했다.


그 사이 정보통신부는 8월 통신사업허가계획 1차시 안을 발표하고 PCS 사업자를 1곳이 아닌 3곳을 신규 허가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7) 이후 9월 7일 경상현 정보통신부장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PCS 사업자 선정 일정을 무선접속방식 등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좀 더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며, 해를 넘긴 1996년 6월 말까지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8)


서정욱 한국이동통신 대표 '신의 한수'


한국통신과 한국이동통신이 PCS 기술표준을 두고 날을 세웠던 1995년.


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은 신의 한수(?)를 준비했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95 정보통신 전시관 행사'에서 CDMA 시연회가 열리기에 앞서 기자들의 검증을 받겠다는 것. 이미 전시관은 한국이동통신뿐만 아니라 신세기통신도 CDMA 시연회를 준비한 상태였기에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자칫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망신만 당하는 게 아니라 CDMA 불확실성을 키움과 동시에 PCS 기술표준 선정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무리를 해서까지 추진하고자 했던 한국이동통신의 판단은 서정욱 사장의 면면을 살펴보면 납득할 수 있다. 서울대 공과대학 전기공학과를 거쳐 미국 텍사스 A&M 대학원 전기공학 박사를 취득한 후 공군사관학교 교수를 역임한 후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지내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과 과학기술부 차관, 한국통신 부사장 등 다채로운 이력을 갖췄다. 전전자교환기(TDX) 국산화에 일조한데 이어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장을 맡아 CDMA 기술개발을 진두지휘했을 만큼 성공 DNA가 밑바탕에 자리한 인물이었다.


업계에서는 그를 방대한 독서량을 가진 공학박사 또는 지독한 워커홀릭 등으로 평하기도 할 만큼 일처리에 있어 실제적 완벽을 기했다.


즉, 서 사장의 입장에서는 CDMA 시연에 있어 실패 없는 성공만을 염두에 둔 카드였다. 만약 성공하기만 한다면 상용화되지 않은 불확실한 통신기술이라는 CDMA의 최약점을 어느 정도 벗을 수 있고, TDMA와의 싸움에서도 유리한 고지 선점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셈이다.


그의 전략은 CDMA 시연회를 취재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 정보통신부에서 셔틀버스에 오르는 기자들을 대상으로 이동하는 차량에서 CDMA 시스템 기반의 통화 경험을 제공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동하는 차량에서 끊김 없는 통화가 가능하다면 실제적 불확실성을 줄임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CDMA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한국이동통신 직원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지시였다. 실패 없는 성공을 하라니, 불확실성을 담보하지 않은 추진에 앞날의 고생은 불보듯 뻔했다. 


실제로 직원들은 서울 광화문에서 삼성동 코엑스까지 가는 모든 길의 시설을 하나하나 꼼꼼히 점검해야 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통화불량 버그 제거는 물론이거니와 사장의 거센 채찍질까지 더했으니 사경을 해멜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기에 그만큼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은 덤이었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마침내 기자들을 대상으로 CDMA 시연회가 열리는 1995년 6월 12일의 날이 밝았다.


약속대로 기자들이 서울 광화문 정보통신부에서 서울 삼성동 코엑스로 가는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미리 대기해 있던 서정욱 사장 역시 승용차에 탑승해 셔틀버스를 인도했다. 무사히 출발한 두 대의 차량은 광화문을 지나 용산구 하얏트호텔을 지났다. 그리고 승용차로부터 셔틀버스로 통화가 시도됐다.


영겁의 시간, 한국이동통신으로서는 코엑스로 향하는 그 시간만큼 절박한 상황이 또 있을까 싶었다. 한 번의 끊김만으로 나락에 떨어질 수 있기에 초단위로 쿵쾅대는 가슴을 틀어잡아야 했다. 물론 시간이 흐를수록,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불확신은 서서히 확신으로 바뀌었고, 지옥문에서 천국을 향한 도로로 전환했다. 승용차와 셔틀버스는 목표했던 코엑스에 무사히 당도했다. 결과는 대성공. 이 둘의 CDMA 통화는 단 한 번의 끊김도 없었다. 


전시장에서 진행된 시연회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은 코엑스 3층 전시관에서 전시장 주위를 돌고 있는 차량 탑승자와 C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전화기를 이용한 통화에 나섰다. 끊김 없이 고품질 통화가 가능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9)


한발 더 나아가 한국이동통신은 같은 해 10월 9일 서울 장안동 사옥에서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CDMA 방식 시험통화에도 성공했다. 이 자리에서 서정욱 사장은 PCS 기술표준으로 CDMA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국민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10)


같은 날 권혁조 신세기통신 사장도 이듬해인 1996년 4월 CDMA를 상용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연말까지 장비 설치와 연동시험을 마무리한 후 1996년 2~3월에 걸친 시범서비스 후 4월부터 서울 등 수도권 21 개시와 대전시에서 서비스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상용화 해에는 20만 명의 가입자를 유치하겠다는 목표도 내걸었다.11)


1995년 10월 20일 정보통신부는 마침내 PCS 기술표준을 확정했다. 정통부는 통신사업자 허가 관련 전자공청회에 앞서 ‘통신사업자 허가신청요령 2차 시안'을 발표했다. 경제성과 기술확보 측면에서 PCS 무선접속방식을 TDMA가 아닌 CDMA로 가겠다고 천명했다.12)


질풍노도, 그리고 제자리


정보통신부가 PCS 기술표준을 확정했으나 일부 업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통신은 앞서 결정한 대로 TDMA 방식을 고수했다. 정부의 눈길이 고울리 없었다. 이에 따라 명분은 해외 진출이라 해명했지만 속내는 달랐다. 표준이 또 바뀔 수도 있다는 확신으로 언제든지 사업을 전개할 수 있도록 대비한다는 측면에 더 강했다.


게다가 신세기통신은 CDMA와 동시에 아날로그 통신(1G) 서비스 도입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표면적으로는 10월 24일 신세기통신 지분 11%를 보유한 에어터치 샘긴 회장과 칼라 힐스 전 미국무역대표부 대표가 우리나라 정보통신부를 방문해 아날로그 방식 허가를 요청하면서 불거졌다. 또한 CDMA 장비를 국산뿐만 아니라 해외 장비도 수입할 것을 요구했다. 앞서 주파수 확보 논란에서도 신세기통신을 지원했던 에어터치의 로비력이 끝없이 우리나라를 괴롭혔다.13)


한국이동통신은 이 같은 결정을 막아야 했다. 아날로그 통신은 한국이동통신의 독점 시장이었다. 후발주자는 반드시 견제해야 했다. 아날로그 통신은 정보통신 발전의 퇴보를 야기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이동전화의 디지털 CDMA 시스템 전환은 우리나라 통신기술진의 자존심과 국가의 경제적 이해가 걸려 있는 중요한 국책과제이다. 따라서 디지털 전환은 국익을 위해 반드시 성공적으로 조속이 이뤄져야 한다.

기존도로를 확장하거나 도로를 신설할 때 우회도로를 만들어 불편을 없애야 하는 것은 상식인데 기존 아날로그 주파수 대역 내에서 디지털 전환은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며, 오히려 어려운 방법의 선택이다.

더구나 현실적으로 올해 연말 이전에 아날로그 신규가입은 적체가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디지털 전환 기간 동안 고객의 사용정지 등의 고통이 따를 것으로 보아 큰 걱정이다.

국가가 주파수 사용료를 받는 상황에서 국가 공공 자원인 주파수는 국민의 편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향후 3~4년간 사용할 수 있는 여유 주파수를 유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이 같은 1995년 10월 한국이동통신이 배포한 보도자료의 일부는 당시 상황을 잘 대변해준다.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정부와 업계의 갈등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한국통신은 10월 31일 TDMA 방식을 포기하고 CDMA 방식으로 전면 수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한국통신이 정보통신부의 압박을 이기지 못했다 평가했다.14)


또한 11월 7일 정태기 신세기통신 사장이 기자간담회를 갖고 아날로그 방식 시스템 도입을 폐기, CDMA 방식으로 이동전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기본 원칙에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15) 이 역시 정보통신부가 허가취소 사유에 해당된다며 신세기통신에 최후통첩한 결과였다.


PCS 기술표준이 일단락되는 사이 한국이동통신의 CDMA 시스템 구축은 완성단계에 도달했다. 한국이동통신 연구원과 LG정보통신 연구원은 외풍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스템 개발에만 매달린 결과였다. 하지만 역시나 상용화 서비스에 대한 불안감이 확실히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이동통신 내부에서조차 반신반의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는 데 있었다.


한국이동통신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 전 내부 확신과 외부 홍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마케팅 전략을 본격화했다.



1) <개인휴대통신 1개 사업자로>, 한겨레, 1994. 5.31.

2) 주호석 기자, <유무선 통신사업 동시영위 가능>, 매일경제, 1994. 7. 1.

3) 진용학 기자, <통산부・정보통신부 출범>, 매일경제, 1994.12.25.

4) 주호석 기자, <한국통신 무선통신사업단 발족>, 매일경제, 1995. 1.27.

5) 김의태 기자, <발신전용 휴대폰 내일 첫선>, 경향신문, 1995. 3. 7.

6) 주호석 기자, <한국통신 데이콤 한국이통 PCS사업 각축전 돌입<개인휴대통신>>, 매일경제, 1995. 3.22.

7) <"휴대통신 3개사 새로 선정">, 동아일보, 1995. 8.12.

8) 김의태 기자, <통신사업자 선정 연기>, 경향신문, 1995. 9. 8.

9) <미래를 향한 결단, CDMA 상용화>,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51~152

10) <미래를 향한 결단, CDMA 상용화>,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54

11) 김의태 기자, <신세기통신 권혁조 사장 인터뷰 "내년 4월 수도권 대전서 이동전화서비스 실시계획">, 경향신문, 1995.10.9.

12) <미래를 향한 결단, CDMA 상용화>,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54

13) <신세기통신, 아날로그방식 채택 움직임 이동전화 시장 파문 예상>, 조선일보, 1995.10.28.

14) 신기섭 기자, <한통 "개인휴대통신 코드분할로 변경">, 한겨레, 1995.11. 1.

15) 권오주 기자, <"[CDMA]상용화 위험대비 아날로그방식 도입 검토" 정태기 신세기통신 사장 밝혀>, 경향신문, 1995.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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