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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기 May 16. 2023

(12) 몰아치는 파도, 흔들리는 CDMA 항해

5부.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1992년 12월 3일.


체신부가 이동통신 단일 표준화 기술을 CDMA로 전환하자, 업계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CDMA가 첨단 기술이기는 하나 상용화 시기와 실현 가능성이 불확실했다. 기술적으로 밀린다고 평가받는 TDMA의 경우 이미 상용화된 상태, 그렇게 각자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게다가 업계가 아닌 정부부처 내 갈등이 더 불거졌다. 1993년 초 체신부와 상공자원부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무엇보다 이 둘이 대립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1992년 무산된 1차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도 체신부와 상공자원부는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체신부는 민간 경쟁을 빠르게 도입해 기술역량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상공자원부는 자체적인 기술력이 먼저 뒷받침돼야 국산 장비 경쟁이 가능하다며 제2이통사 선정을 연기해야 할 것을 요청했다. 


당시에도 양보없는 혈전을 벌인 바 있는 상황에서 상공자원부가 CDMA 대신 TDMA를 주장하고 나서니, 체신부로서는 또 다시 머리를 싸멜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업계에서는 1차 제2이동통신사 선정 무산에 상공부 연기 주장이 일부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선정 일정 자체가 연기됐다. 단순 연기만 됐으면 모르겠지만, 일정이 뒤로 밀리면서 우연치 않게 차기 대통령 선거와 맞닿게 됐다. 어찌보면 정치가 경제를 압도했던 그 상황은 상공부가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 지적할만했다. 우연치고는 절묘한 때 터진 셈이다. 


물론 각자 명분은 확실했다. 체신부는 기술 관점, 상공자원부는 통상 관점에서 해석했다. 통신분야는 장치산업으로 초기 인프라 구축이 절대적이다. 처음부터 첨단 기술이 도입되는 것이 유리하다. 체신부가 CDMA를 선택한 핵심이다. 


하지만 상공부는 TDMA는 미국과 유럽 등 여러 지역에서 도입이 확정돼 상용화가 멀지 않았기에 수출 산업화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국산 장비를 먼저 개발하고 그 후에 인프라를 조성해도 늦지 않다는 심산이었다.  

양측의 갈등이 격화되기는 했으나, 체신부는 완강했다. 만약 CDMA 상용화가 실제 이뤄진다면 선진국보다 빠르게, 또는 비슷하게 기술을 확보할 수 있게 되고, 이 같은 성과가 수출산업화에 더 유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ETRI와 퀄컴의 협력으로 CDMA 테스트가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는 것 역시 자신감을 갖는데 기여했다.1)


체신부는 고삐를 당겼다. 1993년 2월 대전에서 ETRI와 퀄컴이 공동개발한 CDMA 이동통신시스템의 예비 성능 시험에 성공하고, 당초 7월로 예정된 서울지역 성능시험을 4월에 마무리했다. 이로서 상용화 계획 역시 1997년에서 1995년으로 앞당겨졌다.2)


또한 미국 팩텔과 US웨스트가 CDMA를 채택한데 이어 GTE, 나이넥스, 벨사우스아메리텍 등도 CDMA로 기울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체신부의 선택에 힘을 더하게 됐다.


1993년 5월 체신부는 CDMA를 포함한 1조 규모의 ‘무선통신 기술개발 10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3), 2차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에 CDMA 채택을 조건으로 부여하면서 논란의 마침표를 찍었다.


정부-업계 ‘불협화음’…해결사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  등판


체신부가 CDMA 기술 표준을 확정한 후 업계 역시 들썩였다. 


발단은 1997년 예정된 상용화 시기를 1995년으로 앞당기면서부터다. 당시 체신부는 ETRI와 함께 1993년 9월 시제품을 제작하고 정확히 1년 후인 1994년 9월 1차 상용제품을 개발해 1995년 말에는 선정된 제2이동통신사로 하여금 상용화 서비스를 내도록 하는 로드맵을 세워놓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장비를 개발하고 제작해 납품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청천벽력이었다. 이 시기를 맞출 수 없다는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업계 사정을 무시한 탁상행정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4)


게다가 CDMA 장비는 퀄컴에 기술 로열티를 지급해야 했다. 이 마저도 부담이 상당했다. 일정을 맞추는 것도 어려운데 투자비용까지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만약 이 같은 악순환이 지속된다면 국산장비는 고사하고 외산장비를 들여와야만 했다.5)


순탄한 CDMA 상용화를 위해 이리저리 얽혀 있는 실타래를 풀어야 했다. 우선 ETRI는 퀄컴의 창립자인 어윈 제이콥스 회장을 초청했다. 1993년 8월 내한한 제이콥스 회장은 19일 한국 기자들과 만나 예정대로 1995년 상용화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말하는 한편, 기술료 수준 역시 모토로라 등 다른 국가 기업들과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라 밝혔다.6)


또한 ETRI를 중심으로 정부 주도 국책사업으로 추진했던 CDMA 사업을 민간과 연결하기 위한 고리를 만드는데 주력했다. 보다 현실적이고 체계적인 사업 추진이 필요했다. 이 결과 이동통신개발관리사업단을 신설하기로 했다. 사업단은 전전자교환기 국산화를 이끌어 탁월한 성과를 거둔 서정욱 단장에게 맡겼다.


서정욱 단장의 각오는 대단했다. CDMA 기술방식을 선택한 것은 훌륭한 일이나 기존 일가견이 있는 유선장비 연구개발과는 달리 이동통신 기술 개발에 대한 어려움이 상당했다. 국내서는 아날로그 이동통신 원천기술조차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목표는 연구개발을 넘어 상용화 서비스까지 이어질 수 있는 길을 닦는 데 있었다.7)


마침내 1993년 9월 16일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은 한국이동통신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 이마빌딩에 자리 잡고 현판식을 개최하면서 정식으로 발족했다. CDMA뿐만 아니라 개인휴대통신(PCN)까지 개발 사업을 전담케 했다. 전파통신기술개발사업에 대한 체신부 장관 자문기구 ‘전파통신기술개발추진협의회’도 이날 발족했다. 의장은 서정욱 단장이 겸임했다.8)


'국가 주도 연구소 공동개발'에서 '민간 주도 자율경쟁' 전환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앞서 갈등을 야기했떤 정부 주도의 국책사업에서 민간 참여를 바탕으로한 자율경쟁체제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끊겨 있던 연결고리를 이어 붙임과 동시에 기술개발도 속도를 높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서정욱 단장은 "어떻게 해서라도 1995년 말까지는 CDMA 시스템을 상용화해야 하는 것은 당위가 되었지만, 당시의 처지로는 도저히 국산 시스템으로 이동통신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 불투명해진 상태였다. 만약 차질이 생겨 신규사업자의 서비스 개시가 늦어지고, 그로 인해 적체가 심화되거나 통상마찰로 비화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은 차치하더라도 엄청난 투자 낭비는 물론 장비 도입 과정에서의 불이익이나 외화 부담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를 심각하게 생각한 정부는 다각도로 대책을 강구하던 끝에 TDX의 개발 사례를 되새기면서, 그 사업에 앞장섰던 나에게 다시 한번 CDMA라는 고행의 길을 걷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TDX 개발보다 CDMA 위험부담이 훨씬 큰 개발 사업이었다. 번번이 극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는 나의 입장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종종 되새기게 했다"라고 회고했다.9)


죽으라는 법은 없다. 사업단에서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당시 미국 이동통신 시장에서의 경험이 있었던 이성재 부장의 제안으로 1988년 미국 이동통신사업자협회가 디지털 이동전화 도입 시 ‘사용자 요구사항’을 제시한 점에 주목했다.


즉, 정부는 CDMA 시스템 개발에 대한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기업은 이 기준에 부합하는 제품을 제작해 업계 상관없이 채택한다는 의도였다. 예를 들어 정부가 특정 크기와 특정 무게, 특정 성능 등을 기준으로 삼으면, 그에 맞춰 제작이 이뤄진다면 성능검증을 통해 수주하는 방식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혁신으로 전환된 셈이다. 


CDMA 로드맵이 계획과 달리 지연된 상태, 민간 자율경쟁을 부추기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일정한 자유를 부여해야 했다. 시제품은 당초 계획한 1993년 9월에서 1994년 9월로, 1차 상용 시제품은 1994년 9월에서 1995년 3월로 미뤄진 상태였다. 상용화 시기만 1995년 말로 맞춰졌다. 


우선 기준부터 세워야 했다. 사업단은 머리를 맞대 ‘CDMA 사용자 요구사항’을 같은 해 12월 24일 ETRI뿐만 아니라 LG정보통신, 삼성전자, 현대전자 등 장비개발업체에 통보했다.


'연구소 주도의 공동개발'에서 '업체 간 자율경쟁 개발'로 전환하면서 요구사항의 목적도 보다 분명해졌다. 물밑에서는 아날로그 시장에서 개발 경험이 있는 삼성전자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한편, 독자개발을 선언한 LG정보통신을 돕고, 개발에 어려움을 겪는 현대전자를 지원하기로 했다. ETRI는 주문형 반도체(ASIC) 칩을 개발한다는 임무가 부여됐다.10)


우리나라에서 차근차근 CDMA 상용화 일정이 진행됐던 것과 달리 미국은 또 다른 난관에 봉작했다.  CDMA 기술방식이 특허 시비로 인해 미국에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인터디지털이 퀄컴을 상대로 미국 필라델피아 연방지방법원에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인터디지털은 퀄컴의 CDMA 기술이 자신들의 3가지 특허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퀄컴은 미국 샌디에이고 연방지방법원에 미국 통신산업협회(TIA)가 발표한 CDMA표준에 의한 시스템이기에 인터디지털의 특허를 침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냈다.


다행스럽게도 같은 해 9월 퀄컴이 제기한 소송은 1개월 만에 인터디지털과 장점적인 합의에 도달하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필라델피아에 제기한 소송은 그대로 남아 있어 향후 특허권 시비 불씨는 남겨놓은 상태였다.11)


기지개 켠 신세기통신…빠른 걸음 한국이동통신

1992년 12월 3일 체신부가 CDMA 기술을 이동통신 단일 표준화 기술로 발표하기는 했으나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사진은 당시 광고의 한 장면 [사진=SKT]

해를 넘긴 1994년 3월 시끄러웠던 2차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이 마무리됐다. 한국이동통신은 선경그룹으로, 제2이통사는 포철과 코오롱 등이 함께하는 ‘신세기통신’이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 직후인 3월, 약속된 대로 CDMA 시제품의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4월 ETRI와 LG정보통신(당시 금성정보통신), 삼성전자, 현대전자 등 3개 통신설비 제조업체는 공동개발 중인 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CDMA) 이동통신시스템으로 시험통화에 성공했다. 이 시험통화는 이동전화 단말기와 단말기간, 이동전화 단말기와 일반 가입전화 간 진행해 통화 품질 양호라는 결과를 도출했다.12)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전환되면서 대대적인 투자가 이뤄졌다. 대표적으로 한국이동통신 소속으로 CDMA 기술개발을 주도했던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이 선경그룹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선경그룹은 비용뿐만 아니라 사업관리단이 준비 중이었던 사용자 요구사항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댔다. 개발업체의 성취 욕구를 자극하는 한편, 장비의 결함을 발견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시험통화를 성공시킨 사업관리단은 예정대로 개발업체들을 대상으로 상용시험계획서를 발송했다. CDMA 개발을 위한 일종의 모의시험을 치르겠다는 의도였다. 주요 내용으로는 통화시험 등의 기본적인 예비시험을 치른 후에 통과한 업체들에게 한국이동통신 서울 장안동 사옥에 시스템 설치 자격을 부여해 주기로 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LG정보통신, 현대전자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마침내 같은 해 8월 개발업체들을 대상으로 108가지 항목에 대한 예비시험이 실시됐다. 이를 위해 사업관리단은 선경그룹과 함께 서울 장안동 연구실에 이동통신 시스템과 단말기, 기지국 상태 등을 점검할 수 있는 시험장비를 마련했다.


결과적으로 예비시험을 통과한 업체는 삼성전자와 현대전자였다. 약속대로 서울 장안동 연구실에서 상용시험기를 가동했다. 탈락한 LG정보통신은 재시험 기회를 주기로 했다.13)


상용시험기를 가동한 이때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8월 말 ETRI와 퀄컴이 공동 추진한 CDMA 방식 디지털 이동전화 시스템 개발이 종료됐다.14) 이동전화교환기와 제어국, 기지국, 가입자 위치 등록장치 등에 대한 개발이 완료됐다. 단말기는 LG정보통신, 삼성전자, 현대전자뿐만 아니라 맥슨전자가 차량용 시제품을 개발했다. 이동전화로 불린 휴대폰의 경우 연말까지 개발을 마칠 계획을 알렸다.


개발된 CDMA 이동전화 시스템은 서울 시내 12개 지역에서 900명을 대상으로 1995년 3월까지 성능시험을 진행하기로 했다. 또한 1995년 10월부터 3개월간 시험운용을 진행해 예정대로 1996년 초 상용화에 나서기로 했다.


한국이동통신이 선경그룹을 등에 업고 CDMA 개발에 매진하는 동안, 신세기통신 역시 부산하게 움직였다. 1994년 10월 신세기통신은 삼성전자와 LG정보통신, 현대전자 등 CDMA 시스템 제조업체에 장비구입을 위한 제안요청서를 발송했다. 이 요청서는 11월 중에 접수를 진행키로 했다. 이후 한 달간 심사와 평가를 거쳐 12월 초 시스템 공급업체를 최종 선정하기로 했다.15)


시험내용은 한국이동통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동전화교환기와 기지국제어기, 기지국 가입자 위치 등록기 등을 공급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서류심사뿐만 아니라 현장확인심사도 병행하기로 했다. 일반사항과 기술사항, 가격 등의 3개 항을 종합평가에 최종 공급업체를 결정한다는 계획이었다.


신세기통신이 발 빠르게 대응하자, 이번에는 한국이동통신이 속도를 높였다. 한국이동통신은 11월 11일 제안요청서를 발송한 이후 1994년 11월 15일 세계 최초로 CDMA 방식 시스템 운용 시험에 성공했다.16)


이날 한국이동통신은 대전시 대덕 중앙연구소에서 윤동윤 체신부 장관을 비롯한 정보통신 관계자뿐만 아니라 조병일 한국이동통신 사장 등이 참석해 시스템 운용 시험에 나섰다. 시험 내용으로는 CDMA 시스템과 아날로그 시스템, CDMA 시스템과 공중전기통신망(PSTN) 시스템, CDMA 시스템과 CDMA 시스템 간의 상호접속이었으며, 모두 성공했다. 즉, CDMA 방식의 첫 시험통화가 이뤄진 셈이다.


이 기세를 몰아 한국이동통신은 서울 장안동 집중운용보전센터에 3대의 교환기를 설치하고 구역을 나눠 CDMA 상용시험에 착수했다.


한편, 체신부는 1994년 12월 29일 신세기통신에 식별번호 017을 부여한다. ‘디지털 017’의 시작점인 셈이다.17)


쉽지않은 상용시험…TDMA 악연 재현


1994년이 CDMA 개발을 마치고 모의고사를 치룬 해였다면, 1995년은 상용화를 위한 실제 망 구성에 매진해야 했다. 연구소에서만 뛰어놀던 CDMA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기지개를 폈다. 


이불밖은 언제나 위험하다. 무엇보다 기존 상용망인 아날로그망에 연동이 시급했다. 아날로그 주파수 대역에서 CDMA 운용 주파수를 뽑아내야 했는데, 그 과정이 꽤나 험난했다. 자칫 잘못하면 아날로그도 CDMA도 모두가 불통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작업이었다. 상용망과의 연동이 어려운 이유였다. 게다가 아날로그 시스템만을 운용해왔기에 독자 개발한 디지털 시스템을 접목시킨다는 것은 가지 않는 길을 홀로 가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즉, 상용망 시험은 교환기와 단말기 개발, 기지국 최적화, 시스템의 완벽한 구축 등 수많은 과제들을 하나씩 해결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동통신사 혼자만 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이동통신사뿐만 아니라 통신장비제조업체, 단말기 제조업체 등이 똘똘 뭉쳐야 했다.


예를 들어 한국이동통신의 실제 현장을 살펴보면, 기존 기지국 서비스를 중단해야 했기 때문에 매일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만 작업이 가능했다. 문제는 작업에 나선 이들이 한국이동통신 직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외업체 직원들도 포함돼 있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데, 그 사공들끼리도 말이 안통했다. 게다가 이 작업은 시간 제한이라는 변수까지 부여됐다. 당시 경험자들에 따르면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는 후문이다.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던 와중에 서정욱 사업관리단장이 1995년 3월 한국이동통신 대표로 선임된다. 서 단장이 이끌던 개발사업단은 한국이동통신 소속의 디지털사업본부로 전환됐다. 서 대표 취임으로 인해 전사적으로 CDMA에 올인하는 방향으로 조직이 재편됐다. 


한국이동통신은 상용망 연동 진행과 더불어, 이미 예비시험을 치룬 장비업체들을 대상으로 본시험 공고를 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비시험에서 낙방한 LG정보통신이 통신장비제조업체로 선정됐다. 1995년 5월 8일 예비시험에서 떨어졌던 LG정보통신은 한국이동통신 1차 수도권 지역 CDMA 방식 디지털 이동전화 시스템 공급업체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LG정보통신 시험결과는 총 933개 항목에서 가장 높은 77% 통과율을 기록했다. 시스템 공급능력과 납품일정, 선능, 신뢰성, 상용시험 중간결과, 경제성 등의 종합평가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경쟁사인 삼성전자가 38%, 현대전자가 34%를 기록했으니 비교불가였다. 앞서 LG정보통신은 1995년 1월에도 시스템상용실험에 합격점을 따냈다. 


경쟁사였던 신세기통신 역시 CDMA 시스템 구축을 위해 노력했으나, 변수가 나타났다. 1995년 5월 11일 개인휴대통신(PCS) 사업권 획득을 준비하던 한국통신이 PCS 무선접속기술로 시분할방식(TDMA)을 개발하겠다고 밝히면서 또다시 CDMA와의 기술 표준 경쟁이 부상했다. 그나마 CDMA로 방향이 모아지는가 했으나 다시 분산의 시기를 맞이하게 상황이 초래됐다.18)



1) 주호석 기자, <체신부 CDMA <코드분할 접속> 상공부 TDMA <시간분할접속> [디지털이통방식] 논란>, 매일경제, 1993. 3.16.

2) <차세대 이통 시스팀 95년내 상용화 추진>, 경향신문, 1993. 4. 4.

3) <무선통신 기술개발 10개년 계획 수립>, 매일경제, 1993. 5. 8.

4) 주호석 기자, <서비스개시 2년이상 늦춰져>, 매일경제, 1993. 6.11.

5) 주호석 기자, <CDMA 조기 상용화 체신부-업계 불협화음>, 매일경제, 1993. 7.13.

6) <인터뷰 한국 온 미 퀄컴사 제이콥스 회장 "CDMA방식 이동통신 앞날 밝아">, 한겨레, 1993. 8.21.

7) 주호석 기자, <인터뷰 서정욱 이통기술 사업단장 "CDMA기술 기간 내 개발 총력">, 매일경제, 1993. 9. 7.

8) <이통기술개발단 발족>, 매일경제, 1993. 9.17.

9) 서정욱, <미래를 여는 사람들>

10) <미래를 향한 결단, CDMA 상용화>,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47~148

11) <<코드분할다중접속> CDMA 특허 시비 해결>, 매일경제, 1993.10.27.

12)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 국내개발 시험통화 성공>, 조선일보, 1994. 4.20.

13) 10) <미래를 향한 결단, CDMA 상용화>,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49

14) <CDMA시스템 용량 시험 성공 전자통신연>, 매일경제, 1994. 8.29.

15) 주호석 기자, <신세기통신 핸드폰 CDMA시스템 장비공급업체 선정착수>, 매일경제, 1994.10.14.

16) <CDMA 시험통화 성공>, 동아일보, 1994.11.15.

17) <이동전화 통신망번호 신세기토신 017로 확정>, 매일경제, 1994.12.29.

18) <미래를 향한 결단, CDMA 상용화>,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49~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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