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이동통신 춘추전국시대 개막
1994년 체신부는 1차 통신구조 개편방향을 통해 한국이동통신은 선경그룹에,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신세기통신을 낙점했다. 곧이어 2차 통신사업 구조개편을 예고했다. 국가 주도에서 민간 자율경쟁으로 한발 내디딘 체신부는 자율경쟁을 보다 강화할 요량이었다.
이를 위해 체신부는 정보통신의 가림막을 일시에 거뒀다. 누구나 통신사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파괴적 혁신을 이어갔다. 예를 들어 이동통신 사업이 막혔던 한국통신(현 KT)과 데이콤(현 LGU+)에게도, 제2이동통신사업자에 간접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삼성과 현대, LG, 대우 등 재벌기업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비로소 ‘황금알을 낳는 거위’ 잡기에 모두가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왔다.
그중에서도 단연 관심사는 ‘개인휴대통신(PCS)’이었다. PCS는 기존 사업자인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이 수행하고자 하는 무선통신의 상위 개념이다. 즉, 누구나 이동통신 시장에 뛰어들 수 있는 황금알 바구니였다. 게다가 윤동윤 체신부 장관이 1994년 5월 30일 국회 당정협의회를 마치고 PCS와 관련해 우선적으로 1개 사업자를 선정하겠다고 하자 시장이 들썩거렸다. 이어 같은 해 6월 30일 체신부는 2차 통신사업 구조개편방향을 최종확정하고 1995년 중반 PCS 사업자를 선정하고 1997년 상용화를 목표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사이 새로운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보통신의 위상은 보다 더 높아졌다. 정부조직법이 개정돼 ‘정보통신부'가 신설됐다. 기존 체신부의 역할은 소속기관인 체신청(신설)으로 이관됐다.
누구나 기회가 된다는 말은 이해관계가 복잡해진다는 의미다. PCS 사업 역시도 관련 기업의 갈등을 촉발시켰다.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은 신규 사업자에 대한 견제에 나서야 했고, 한국통신과 데이콤은 태생적인 통신 역량을 갖추고 있었기에 위협적인 후발주자였다. 또한 막대한 재력을 갖춘 재벌기업 역시 호시탐탐 PCS 자리를 노렸다.
PCS 표준 역시도 갈등을 증폭시켰다. 선발주자인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은 CDMA 상용화를 목표로 사업을 추진했기에 PCS 역시 자신들이 유리한 CDMA 표준을 밀어 붙여야 했다. 하지만 후발주자들은 이미 CDMA가 선점한 시장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범용성을 확보한 TDMA를 택해야 했다.
문제는 복잡하게 꼬인 업계 갈등 양상에 따라 정보통신부도 오락가락을 반복했다는 데 있다. 1995년 8월 정보통신부는 당초 계획을 수정해 통신사업허가계획 1차 시안을 마련하고 PCS 사업자를 1곳이 아닌 3곳으로 늘렸다. 공모는 1996년 6월 말로 연기했다. 같은 해 10월 20일 통신사업허가계획 2차 시안을 통해 PCS 기술표준을 CDMA로 확정했다.
TDMA를 밀던 후발주자 한국통신은 즉각 반발했다. 해외 진출을 명목으로 TDMA 사업을 이어나가겠다는 계획을 분명히 했으나 표준이 바뀌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상용화하겠다는 준비 측면이 강했다. 다만, 한국통신은 10월 31일 TDMA 방식 포기를 선언했다. 정보통신부의 압박이 심했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1995년 12월 14일 정보통신부는 신규 통신사업자 허가일정을 공개했다.
내년 4월 15일부터 3일간 허가신청을 접수받아 6월까지 심사를 마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내년 1월 10일 관련업계를 대상으로 설명회 개최를 예고했다.
1차는 자격심사다. ▲사업계획 타당성 ▲설비규모 ▲재정능력 ▲기술개발실적 및 계획 ▲기술능력 ▲사업자 자격 등 6개 항목에 대해 100점 만점으로 평가한다. 각 항목별로 60점 이상을, 총점으로 70점을 넘겨야 한다. 2차는 정보통신발전 출연금 심사다. 최고 상한액으로 1천100억 원 일시출연금이 결정됐다. 만약 상한가를 제시해 동률을 이루면 3차 추첨 순서로 넘어간다.1)
시장은 이미 들썩인 상태다. 재야에 웅크리고 있던 삼성과 현대, LG, 대우 등 4대 재벌그룹뿐만 아니라 제2이통사에 도전한 금호, 신흥강자인 한솔, 거기다 데이콤까지 뛰어들 태세를 마쳤다. 제2무선호출 10개 사업자도 연합 컨소시엄을 꾸리는 한편, 중소기협중앙회도 중소기업 컨소시엄을 구성하기로 했다. 고합그룹도 PCS 사업 참여를 위해 기술제휴계약을 서둘렀다.
누구보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곳은 한국통신이다. 국가 주도 정보통신 사업 추진으로 인해 막강한 유선 네트워크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었고 민영화 추진을 통해 자립의 꿈을 펼치고 있었다.
게다가 PCS 사업권 획득에는 한 가지 제약이 있었다. ▲PCS 뿐만 아니라 ▲주파수공용통신(TRS) ▲발신전용 휴대전화(CT-2) ▲무선데이터통신 ▲무선호출 사업자도 함께 선정했는데, 각 기업들은 이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고 중복 선택은 불가했다.
한국통신은 이 같은 제약에서 자유로웠다. 우선 중복 허가 신청이 가능했다. 여기에 PCS와 발신전용휴대전화(CT-2) 사업에 대한 허가를 신청할 경우 2차 심사가 면제됐다. 즉 3개 PCS 사업자 중 한 곳은 한국통신이 차지한다고 해도 무방했다.
앞서 1995년 초부터 한국통신은 PCS 사업 선정을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상철 단장을 중심으로 무선통신사업추진단을 구성했다. 이동전화보다 낮은 요금과 20만 원대 단말기로 전국을 재패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삼성전자와 LG정보통신, 대우통신 등과 PCS 공동개발협약도 체결했다.
CT-2 시범서비스는 같은 해 3월 8일 서울 여의도 지역을 시작으로 시범 서비스를 개시했다. 시티폰을 위한 네트워크 인프라는 추후 PCS 커버리지로 쓰겠다는 복안이었다.2)
1996월 1월 8일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신규 통신사업자 허가신청과 관련해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은 당초 공고한 대로 진행하되 추천으로 선정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보고했다. 사실상 3차 심사인 추첨제를 폐지하겠다는 것. 이에 따라 1차 심사 기준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3)
자연스럽게 1월 10일로 예정된 신규 통신사업자 허가신청 요령 설명회는 연기됐다.4) 업계 서면질의를 배포해고 그 결과를 검토해 심사기준을 강화했다. 이 때문에 질의기한인 1월 20일 이후에나 설명회 개최가 가능하게 됐다.
업계는 역시나 반박에 나섰다. 1차 심사기준 강화를 위한 시간 벌기에 나섰다는 지적과 함께 이석채 장관이 취임하면서 PCS 표준 등 첨예한 이해 문제를 재검토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형성됐다.
그 과정에서 정보통신부는 여러 난관에 부딪쳤다. 지분 제한 문제와 중소기업 우대, 기술점수 우대 등이 도마 위에 올랐다. 각 기업들은 자신들이 유리할 수 있는 지점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내기 바빴다. 이 때문에 우대됐던 항목이 폐지되기도 하고 지분 기준 시점도 오락가락했다.
마침내 3월 6일 이석채 장관은 기자간담회를 개최하고 통신사업자 선정기준을 발표했다. 이미 사업권을 획득한 것이나 다를 바 없는 한국통신과 통신장비제조업체, 비통신장비제조업체로 구분해 별도 심사해 각 부문에 1개 PCS 사업자를 선정하겠다고 확정했다. 한국통신의 경우 별도 회사를 설립해 운영하고 다른 기업들이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고 설계했다.
아울러 본격적인 이동통신 시장 경쟁을 위해 1997년 허가제를 자유신청제로 바꾸고, 1998년부터는 사업자 간 합병과 매수를 허용하겠다고 선언했다.5)
업계는 대체적으로 환영했다. 대기업의 경우 제한이 풀렸다는 점에, 중소기업의 경우 경쟁에 불리한 재벌 등과 거리 두기가 가능했다는 점에 집중했다. 통신장비제조업체는 삼성과 현대, LG, 대우 등 빅4 기업과 비통신장비업체는 한솔과 금호, 효성, 데이콤 등 중견기업이 유력 후보군으로 분류됐다.
1) 석종훈 기자, <새 통신사업자 내년 상반기 추첨해 선정 사업권 쟁탈전>, 조선일보, 1995.12.15.
2) <발신전용휴대전화(CT-2)지역사업권을 잡아라 수도권 나래 서울이통 이수화학 삼파전>, 매일경제, 1996. 3. 8.
3) 석종훈 기자, <통신사업자 추가선정 추첨식 사실상 백지화>, 조선일보, 1996. 1. 9.
4) 이지환 기자, <신규통신사업자 설명회 연기 업계 "선정일정 순탄할까" 우려>, 매일경제, 1996. 1. 9.
5) 주호석 기자, <PCS 개인휴대통신사업자 선정기준 변경 통신장비 4대 그룹선 1곳만 허가>, 매일경제, 1996.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