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이동통신 춘추전국시대 개막
1996년 4월 15일 새벽 6시 서울 정보통신부 청사 광화문 세안빌딩.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재계 관계자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신규 이동통신 사업자 신청 접수는 오전 10시였으나 1호 접수자가 되기 위해, 상대방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혹시 모를 미연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일찌감치 접수장에 찾아왔다.
정보통신부는 앞서 1994년 이뤄진 제2이동통신 사업자 접수 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여러 장치들을 마련했다. 우선적으로 접수창구의 혼란을 막기 위해 오전 8시부터 지하 2층 주차장에서 접수권을 발부했다. 관계자들로 북새통을 이룰 것도 방지하지 위해 접수에 나서는 인원은 최대 4명으로 축약했다. 또한 트럭 몇 대를 대동해 서류를 내야 했던 이전 사례를 비춰 사업계획서 본문 분량도 제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접수에 나선 사업자들의 서류량은 방대했다. 많은 서류와 함께 보안에도 최대한 신경을 썼다. 예컨대 신청서류를 작성하는 직원들이 격리된 지역에서 1개월 동안 외부차단된 상태로 일하기도 했다. 하물며 친인척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였다. PC만 약 100여 대 프린터도 10대 이상이 동원된 곳도 있었다. 복사지만 따져도 약 3톤가량으로 쌓였다.
선착순 경쟁에서 1위를 차지한 곳은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가 아닌 주파수공용통신(TRS) 접수 사업자였다. 한진글로콤이 접수 1호 사업자로 기록됐다. 이후 PCS 사업자 접수에 나선 LG텔레콤과 한솔PCS(한솔-데이콤), 글로텔(효성-금호-대우), 에버넷(삼성-현대), 그린텔(중소기업) 순으로 접수 서류를 제출했다.
정보통신부는 3명씩 5개 조의 접수요원이 접수장인 21층에서 사업자를 기다렸다. 약 20여 명의 접수요원은 법인명과 대표자명의 일치여부, 허가신청서 기재사항 누락여부 등을 점검했다. 하지만 워낙 서류량이 방대했기 때문에 PCS의 경우 1개 사업자만 확인하더라도 1시간가량이 소요됐다. 그나마 오후부터는 요령이 붙어 보다 처리 속도가 빨라졌다.
접수와 함께 각 컨소시엄의 관계자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책임자인 이성해 정보통신부 정보통신지원국장부터 기자들의 동선까지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보고하기 바빴다. 또한 상대방의 주주 구성과 접수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와는 달리 누구보다 여유로운 곳은 한국통신이었다. 이미 PCS 사업자 1자리를 꿰찬 한국통신은 마감시간인 오후 4시가 되기 1시간 전인 3시에 접수장에 나타났다.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각 책임자들에게 여러 질문이 쏟아졌다. 정장호 LG그룹 사장은 평생 만든 사업계획서 가운데 가장 만족스럽다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LG그룹과는 달리 에버넷 진영은 시끄러웠다. 에버넷 사업자계획 대표자로 남궁석 삼성데이터시스템 사장이 표기되면서 컨소시엄의 주도권이 삼성에 있다는 지적이 일었다. 양사는 이에 대해 극구 부인했다. 삼성과 현대는 에버넷 대표는 외부에서 영입돼 계획서 대표는 의미가 없다고 손사래 쳤다. 현대전자는 홍성원 부사장이 주로 담당했기에 직급상 높은 남궁석 사장을 표기한 것뿐이라 해명했다.
다만, 업계에서는 현대가 정보통신부에게 ‘대표자’를 표기하는 항목을 쓰지 않고 공백으로 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는 설이 돌면서 그만큼 주도권 다툼이 치열했을 것이라 예상했다.1)2)3)
내부적으로 서류 준비와 외부적으로 진흙탕 싸움을 이어 온 사업자들은 접수가 끝나자마자 로비전에 돌입했다.
앞서 각 진영의 희비가 갈렸다.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LG그룹은 PCS사업추진팀을 2개 팀으로 나눠 일주일간 휴가를 보냈다. 한솔도 정보통신사업단 인원에게 3박 4일의 위로휴가와 함께 포상금으로 50만 원씩을 쥐어줬다. 이와는 달리 에버넷과 글로텔은 휴가를 반납했다. 공교롭게도 휴가를 보낸 곳과 반납한 곳으로 나뉜 양 진영은 선정 발표날 또다시 희비가 갈리게 된다.
로비전은 크게 ▲심사위원회 구성내용과 정보통신부의 기류변화 ▲총선 이후 정치권 동향 등의 정보수집 ▲대외적인 홍보 전략으로 구분됐다. 이 가운데 상대방을 흠집 내기 위한 공세 역시도 계속됐다.
우선 명문을 앞세웠다. LG텔레콤은 컨소시엄의 강점과 중소기업 육성계획을 공개했다. 한솔PCS는 대 고객 서비스 극대화와 중소기업 지원계획을 앞세웠다. 2002년까지 총 3천억 원의 중소기업 장비 구매, 데이콤 초고속광통신망을 이용한 저렴한 서비스를 예고했다. 글로텔은 기술개발 실적과 중소기업 추가 지분할당으로 대응했다. 그린텔은 중소기업 역량과 사업권 획득의 당위성을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 가운데 4월 19일 정보통신부는 통신위원회를 통해 평가부문별 청문회식 평가와 계량, 비계량 평가 등 3가지 방법을 동시에 적용하는 신규 기간통신사업자 선정 심사기준 최종안을 확정했다. 22일부터 자격심사와 사업계획서 계량 평가, 비계량 평가를 차례로 심사하고 신청법인에 대해 청문회가 필요하다면 진행키로 했다. 이 과정에서 모순이 발생하거나 미비한 사안이 있다면 심사항목별 배점의 10% 범위에서 감정을 하기로 했다.4)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곳은 LG텔레콤과 에버넷이었다. 이미 CDMA 상용화를 통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LG그룹의 위세가 드높았다. LG그룹의 기술력이 알려지면서 LG정보통신의 주가가 연일 상향 곡선을 그렸다. 또한 소위 주인 없는 연합 컨소시엄인 에버넷 대비 단독 진출의 당위성이 효력을 얻기도 했다.
4월 24일 남궁석 삼성데이터시스템 사장의 작심 발언이 두 진영의 갈등에 불을 지폈다. 남궁 사장은 공식적으로 LG그룹 데이콤 지분문제를 따지기 위한 공청회를 열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장기신용은행이 데이콤 지분 9.8%를 매각할 당시 LG그룹 측이 시장가보다 높은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이를 매입했다고 주장했다.
정보통신부 규정에 따르면 기간통신사업자에 10% 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는 업체는 신규 통신사업 참여가 금지됐기 때문이다. 즉, LG그룹의 데이콤 지분 10% 이상 확보가 기정사실화된다면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게다가 삼성은 LG그룹이 가진 데이콤 지분이 18% 이상이라고 지적했다.
LG그룹은 데이콤 지분과 관련해 최대한 말을 아꼈다. 군불을 때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삼성의 지적이 경쟁에서 지고서도 물고 늘어지는 비신사적인 행위라 힐난했다. 삼성 역시 장기신용은행의 데이콤 지분 매각에 새한미디어를 통해 참여했으나 탈락했다는 것. 또한 데이콤의 지분을 보유한 곳은 삼성뿐만 아니라 에버넷으로 연합전선을 꾸린 현대, 동양그룹이 있었기 때문에 삼성 진영도 충분히 경영권 행사가 가능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5)
두 진영의 갈등은 데이콤뿐만 아니라 청와대 내략설 등을 서로가 유포하고 있다며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지자 정보통신부가 진화에 나섰다.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은 26일 정보통신정책토론회 간담회에 참석해 사전내략설과 조기선정설은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못 박았다. 또한 데이콤 지분 논란은 법 테두리 내에서 판단할 문제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지분제한조사 결과에 따라 심사에 반영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사업계획서의 평가와 정책목표 등을 감안해 방향이 맞는 컨소시엄을 선정할 것이며, 도덕성 평가는 최소한으로 하겠다고 밝혔다.6)
정보통신부가 나서 논란을 진화하고자 했으나 별반 효과가 없었다. 이에 따라 정보통신부는 작심한 듯 5월 6일 대그룹 과열 경쟁 자제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울러 도덕성 관련 부문의 구체적 내용을 적시해 10일까지 제출할 것을 명했다. 도덕성 평가를 최소화하겠다는 말을 번복한 사례였으나 그만큼 첨예한 경쟁이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단초이기도 하다.7)
서류 심사를 마친 정보통신부는 5월 22일 심사위원 구성을 마무리하고 23일부터 본격적인 1차 심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박항구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 이동통신기술연구단장을 총괄위원장으로 하는 비공개 심사위원단을 꾸렸다. 그중 PCS부문은 이명호 한국통신개발연구원(KISDI) 박사를 위원장으로 세웠다.
22일 발표와 함께 심사위원들은 저녁시간을 이용해 한국통신 도고수련관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6월 1일까지 10여 일 동안 외부와 차단된 채 심사에만 집중했다. 이전 신규통신사업허가신청 요령과 전기통신사업법 등 기본적 규정을 기반으로 통신서비스 수행 기초자질을 평가했다. 좀 더 공정한 심사를 위해서 실제 법인명 대신 코드번호로 사업계획서 신청법인을 구분해 놨다. 오전과 오후 빡빡한 일정 속에서 심사가 이뤄졌다. 또한 다른 심사위원의 심사 결과조차 열람이 금지됐다.
심사위원회 심사마감 직전인 5월 31일 정보통신부는 청문평가 일정을 공개했다. 3일부터 5일까지 과천시 주암동 통신개발연구원(KISDI)에서 청문평가를 실시하고 PCS 장비업체군은 4일, 비장비업체군은 5일 진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청문평가가 시작된 3일 정보통신부는 시간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4일 오전 장비업체군을, 오후 비장비업체군에 대한 청문평가를 단행키로 했다.8)
10일 모든 심사가 마무리됐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정 사업자 발표날.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이 최종 선정된 신규 PCS 사업자를 발표했다. PCS 사업자로 선정된 곳은 한국통신과 LG텔레콤, 한솔PCS로 낙점됐다.9)
이 중 데이콤 지분으로 인한 잡음이 있었던 LG텔레콤에 대해서는 데이콤에 대한 모든 형태의 실질 경영지배 시도를 포기하고 보유 지분을 1년 안에 5% 이하로 낮추는 것을 허가조건에 넣겠다고 발표했다.
1996년 6월 10일. PCS 사업자로 선정된 한국통신과 LG텔레콤(LG정보통신), 한솔PCS(한솔-데이콤)과 달리 에버넷(삼성-현대)과 글로텔(금호-효성-대우), 그린텔(중소기업)은 실의에 빠졌다.
에버넷의 경우 해제 과정에서 삼성과 현대 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삼성은 당장 해제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현대는 제휴 사업이 종료된 마당에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삼성으로서는 주도권을 쥐고 통신 사업 영위에 대한 가능성의 끈을 놓지 않았으나 현대 입장에서는 PCS 탈락이 오히려 당시 추진했던 제철 사업권 획득으로 이어지는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10)
LG텔레콤과 에버넷과의 평가점수는 7월 22일 정보통신부가 국회에 신규통신사업자 선정 평가자료를 제출하면서 공개됐다. LG텔레콤은 100점 만점에 84.58점, 에버넷은 82.75점으로 격차가 크지 않았다. 6개 심사항목 중 기술개발실적과 기술개발계획의 우수성 부분에서 당락이 결정됐다.
글로텔에서 빠져나온 금호는 7월 8일 LG텔레콤 컨소시엄 합류를 위한 협상에 나섰다. 호남지역 PCS 영업권을 넘겨받고 지분 5% 확보가 목적이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다만 상대 진영 견제를 목적으로 9월 9일 합의안대로 최종 확정됐다.11)
또 다른 글로텔 소속의 대우와 효성은 한국통신이 추진한 컨소시엄에 참여했다. 11월 1일 확정된 한국통신 PCS 자회사 지분은 대우와 효성이 각각 4.5%, 2.8%를 확보하면서 2, 3대 주주로 등극했다.12)
신규 이통사업자 선정이 불공정하다며 가장 크게 반발한 곳은 중소기업이 모여 있는 그린텔이었다. 정보통신부 장관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었기에 더욱 극렬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정보통신부는 한국통신이 추진할 컨소시엄 구성에서 중소기업 지분을 33% 넘겨줄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 마저도 반대하며 정통부 방침에 만족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13)
하지만 입장발표 4일 만인 6월 18일 그린텔은 한국통신 지분 33%와 LG텔레콤, 한솔PCS의 일부 주식을 중소기업중앙회에 배정할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업계 움직임을 수용한다는 뜻을 내비치며 강경입장을 완화하는 노선으로 전환했다. 구심점을 잃은 그린텔은 연말까지 좌충우돌하다 각 PCS 사업자에 일부 흡수됐다.14)
비장비업체군의 평가점수는 한솔PCS가 81.17점으로 6개 항목 중 5개 항목에서 1위를 차지하며 가장 높은 점수를 차지했다. 그린텔이 78.39점, 글로텔은 76.8점으로 나타났다.
6월 10일 선정발표를 들은 LG그룹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다만, 대규모 자축 행사 대신 소소한 회식자리를 마련했다. 구본무 LG그룹회장과 정장호 LG정보통신 사장 등은 서울 여의도 트윈타워 지하 1층 식당에서 약 2시간가량 생맥주 파티를 열었다. 100여 명 이상의 직원이 참석한 이 파티는 생맥주가 무제한으로 제공됐다.
정장호 사장은 국민과 정부에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 국내에서 최적의 장비 선택과 저렴한 서비스 요금을 통해 국민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해외에도 적극 진출해 국내 통신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향상하겠다고 말했다.15)
LG그룹은 우선 정장호 LG정보통신 사장을 LG텔레콤 사장으로 선임하고 공석인 LG정보통신 대표를 물색했다. 7월 4일에는 임직원 150여 명이 참석해 서울 서초동 반도빌딩에서 기념비 제막식을 개최했다. 'LG텔레콤의 산실. 반도빌딩 8층 영원히 기억되리라’라는 문구가 새겨진 기념비가 모습을 드러냈다.16)
같은 달 11일 LG텔레콤은 드디어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정장호 사장을 LG텔레콤 대표로 정식 선임하고 정보통신부로부터 사업권을 받아 1998년 1월부터 수도권 지역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2년 이내 전국 서비스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저렴한 요금과 최고 품질 통신서비스 제공을 약속했다.17)
LG텔레콤은 LG정보통신과 LG전자, LG반도체 등 LG그룹계열 3개 사와 더불어 117개 기업으로 구성된 컨소시엄의 결과였다. LG그룹이 지분은 29%, 자본금 총 2천억 원으로 출범했다. 2000년 초반 매출액 5천700억 원을 예상했다. 또한 전국망 구축을 위해서 8천300억 원을 투자한다는 복안이었다.
한솔그룹 역시 축제 분위기였다. ‘한솔플랜 2000’을 세우고 탈제지에 박차를 가하던 한솔 입장에서 PCS 사업권 획득은 정보통신을 주력사업으로 키울 수 있는 기회였다. 한솔PCS 수장으로는 정영문 한솔기술원장을 세웠다. 정 대표는 한솔 계열 전체가 총력을 다한 결과로, 계획대로 철저하게 사업준비를 해 1998년 서비스 개시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한솔은 발 빠르게 움직여 선정 10여 일 만인 6월 20일 한솔PCS 사업설명회를 개최했다. 1998년 1월 상용화를 목표로 자본금을 5천억 원으로 증자한다고 밝혔다. 2000년부터 전국 서비스로 확장해 2002년까지 1조 320억 원의 매출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국내 시장 점유율도 35%를 목표로 세웠다.18)
이어, 한솔PCS는 8월 1일 한국종합전시장 국제회의실에서 창립 주주총회를 개최하고 공식 출범했다.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PCS 사업권에 도전했던 LG텔레콤, 한솔PCS와는 달리 한국통신은 사업권을 따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역방향으로 사업이 추진됐다. 대표를 선임하고 컨소시엄을 구성해 자회사 설립까지 이뤄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많지 않았다.
선정 10일 후인 6월 20일 한국통신은 무선통신사업추진계획을 발표하면서 이상철 한국통신 무선사업본부장을 신규 자회사 대표로 선임했다. 초기 자본금 5천억 원, 초기인력 400여 명의 PCS 자회사를 연말께 출범시키겠다고 밝혔다.19)
7월 3일 대전인력개발본부에서 열린 ‘KT비전2005’에서는 무선통신사업을 2000년까지 제1사업자로 부상시키겠다고 단언했다.20)
한국통신은 11월 1일 컨소시엄을 확정해 발표했다. 한국통신은 33.33%, 한국통신 계열사와 직원 12%, 대기업은 10.3%, 외국기업은 9%, 중소중견기업에게는 약속했던 36%를, 대우 4.5%, 효성 2.8%로 배분됐다. 이 자리에서 이상철 대표가 정식 선임됐다. PCS자회사명이 최초 공개되기도 했다. ‘한국통신프리텔’이 잠정 확정됐다.21)
12월 27일 오전 11시 서울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마침내 한국통신프리텔 창립총회가 개최됐다. 한국통신프리텔은 서울 중구 서소문동의 장안빌딩에 사무실을 마련했다.22) 현판식은 해를 넘긴 1997년 1월 6일 가졌다.
한국이동통신 ‘스피드 011’, 신세기통신 ‘파워디지털 017’.
당대 이통사를 대표했던 브랜드는 다름 아닌 식별번호였다. 사업자는 몰라도 식별번호는 알 수 있었던 시대였다. 그만큼 식별번호는 향후 사업을 영위함에 있어 막대한 영향력을 주는 핵심 키워드였다.
이에 따라 정보통신부도 ‘정보통신번호체계 개선 전담반’을 마련하고 ‘신규통신사업자 서비스 식별번호 부여 방안’을 추진했다. 초기 설계했던 PCS 식별번호는 ‘018’이었다. 다만 사업자는 3곳. 때문에 식별번호는 3자리에서 4자리로 늘어났다. ‘0182, 0183, 0184’가 해당 후보군이다.
018 이외에 가용할 수 있는 식별번호로 ‘016’과 ‘019’가 있기는 했으나 전자는 무선호출공통식별번호로 활용할 예정이었고, 후자는 예비번호로 확보해야 했다.
1996년 9월 2일 열린 신규통신사업자 서비스 식별번호 공청회는 그야말로 뜨거웠다. ‘018X’ 부여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정보통신부와 이전 이동전화(CDMA) 식별번호와 동일한 세 자릿수를 원하는 PCS 사업자와의 강대강 구도가 형성됐다. 대체적으로 불이익을 고려해 정부 입장에 큰 반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지 않았으나 식별번호만큼은 양보가 없었다. 011과 017이 있는 이상 018X는 꽤 불리한 번호였다.23)
정보통신부와 PCS 3개 사업자, 한국이동통신, 신세기통신은 9월 10일 양평 플라자콘도에서 또다시 난투전을 겨뤘다. 정부와 PCS 간 입장은 변함이 없었으나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은 오히려 향후 경쟁을 해야 할 PCS 사업자 편을 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들도 네 자릿수로 회귀할 수도 있고 고객 관점에서도 혼란만 야기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24)
연말까지도 정보통신부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27개 신규사업자가 사업채비를 갖추고 있기에 예비번호 자원이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서비스별로 한 개의 식별번호를 부여한다는 방침은 여전했다. PCS에게는 ‘018X’ 이외에는 없다는 얘기였다.
양보 없는 혈전만 거듭했던 정보통신부는 해를 넘긴 1997년 1월 초부터 입장을 일부 유보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016과 019를 풀겠다는 심경을 내비친 것. 결국 1월 7일 정보통신부는 새 사업자의 조기 경쟁력을 확보하고 기존 사업자와의 공정경쟁환경 조성이라는 명분으로 식별번호 세 자릿수 배정을 공식화했다.25)
PCS 사업자는 즉각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당초 PCS 고유 식별번호였던 ‘018’에 대한 선호도가 높기는 했으나 우리나라에서 기피하는 비속어와 비슷했기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016은 신세기통신의 017보다 앞선 번호였기 때문에 매력적이기는 했으나 발음상 매끄러운 연결이 어려웠다. 이와는 달리 019는 발음이 쉽고 마케팅 측면에서 활용도가 높기는 했으나 끝자리라는 게 걸렸다. 각 사업자는 원하는 식별번호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하는 한편 보안에 최대한 신경 써 정보통신부에 의견을 전달했다.
마침내 1월 30일 정보통신부는 통신위원회를 개최하고 신규 통신사업자 식별번호를 확정했다. 한국통신프리텔은 ‘016’, 한솔PCS는 ‘018’, LG텔레콤은 ‘019’가 부여됐다. 이동통신 5개 사업자를 대표하는 식별번호가 모두 확정된 순간이다.26)
1) 석종훈 황순현 기자, <새벽부터 몰려 "1호 접수" 경쟁 상대제안서 탐색 첩보전 방불>, 조선일보, 1996. 4.16.
2) 김의태 김동섭 기자, <오전 6시부터 접수창구 "북새통">, 경향신문, 1996. 4.16.
3) 이지환 기자, <접수 첫날 현장 스케치>, 매일경제, 1996. 4.16.
4) 오문길 기자, <이성해 지원국장 일문일답>, 매일경제, 1996. 4.20.
5) <헐뜯기로 번진 삼성 엘지 PCS 경쟁>, 한겨레, 1996. 4.25.
6) 조민호 기자, <이석채 정통부 장관이 밝힌 통신사업자 선정기준 "정책목표 부합한 그룹 선택">, 매일경제, 1996. 4.30.
7) 조민호 기자, <신규통신사업자 도덕성 평가 강화>, 매일경제, 1996. 5.10.
8) 이지환 기자, <일정단축 결과발표 앞당겨 질듯>, 매일경제, 1996. 6. 4.
9) 이지환 기자, <PCS 사업자 LG 한솔 선정>, 매일경제, 1996. 6.11.
10) 김종영 기자, <현대 제철소 사업추진 발걸음 빨라졌다>, 매일경제, 1996. 6.12.
11) 김의태 기자, <금호 PCS 사업참여 LG텔레콤과 제휴 지분 5% 미만 소유>, 경향신문, 1996. 7. 9.
12) 임정욱 기자, <한통 PCS에 대우-효성 참여>
13) 이지환 기자, <한국통신 PCS사 지분 중기에 3분의1 배정>, 매일경제, 1996. 6.15.
14) <중기협 "실리가 중요" 강경입장 완화>, 한겨레, 1996. 6.19.
15) 백우진 기자, <LG "해냈다" 생맥주 파티 희비 엇갈린 기업 표정>, 동아일보, 1996. 6.11.
16) <PCS 진출 기념비 제막>, 매일경제, 1996. 7. 5.
17) 이지환 기자, <LG텔레콤사장 정장호 씨>, 매일경제, 1996. 7.12.
18) 김화균 기자, <한솔PCS 사업설명회>, 경향신문, 1996. 6.21.
19) 엄판도 기자, <한통 PCS자회사 12월 설립키로>, 경향신문, 1996. 6.21.
20) 김의태 기자, <한통 "2005년 매출목표 30조원">, 경향신문, 1996. 7. 4.
21) 유진평 기자, <한통PCS 1만4천여사 컨소시엄 확정>, 매일경제, 1996.11. 2.
22) 김승환 기자, <한국통신프리텔(주) 창립총회>, 동아일보, 1996. 12. 28.
23) 석종훈 기자, <통신업계 [번호] 전쟁>, 조선일보, 1996. 9. 3.
24) 조민호 기자, <정보통신부 통신사업자 PCS 식별번호 공방>, 매일경제, 1996. 9.13.
25) 황순현 기자, <PCS 식별번호 3자리수 될듯>, 조선일보, 1997. 1. 8.
26) <[공정경쟁] 원칙 세자리로 한통프리텔016 한솔018 LG019...온세는 008>, 매일경제, 1997. 1.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