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이동통신 춘추전국시대 개막
“한계도 불가능도 없다. 청년정신을 실천하겠다.”
1997년 7월 12일 경기한국스포랜드.
64세의 한 어르신이 번지점프대에 올랐다. 장장 40m 높이의 번지점프는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 뛰기에는 매우 위험하다. 이 번지점프대 역시 그랬다. 나이제한은 55세. 하지만 그보다 훌쩍 많은 노인이 무대 위에 오른 셈이다.
“훌쩍.”
64세 어르신은 위험천만한 번지점프대에서 몸을 던졌다.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다. 오히려 희열을 줬다. 한국기네스협회는 국내 최고령 번지점프 기록 보유자로 이 어르신을 모셨다.
1997년 당시 PCS 사업권을 획득하고 상용화를 앞둔 시점. 정용문 한솔PCS 대표(사장)의 얘기다. 이 날 정 사장을 따라 도전에 참여한 임직원 34명 전원이 번지점프에 성공했다. 정 사장은 번지점프를 하기 위해 사전에 신체검사를 받을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한솔의 청년정신을 보여주겠다는 퍼포먼스였다. 이 같은 사례는 당시 국내 이동통신 시장이 얼마나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다.1)
1998년 1월 상용화를 목표로 한 PCS 기업의 로드맵이 앞당겨졌다. 정장호 LG텔레콤 사장은 1997년 2월 21일 기자간담회를 개최하고 정부의 지침보다 3개월 더 빠른 10월 상용화를 발표했다. 여건이 다소 미흡하더라고 강행노선을 견지하겠다는 선언이었다.2) LG텔레콤의 폭탄발언에 한국통신과 한솔 역시 부산하게 움직였다.
막상 10월 상용화를 선언하기는 했으나 그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우선 기지국 확보가 어려웠다. 앞선 이동전화사업자(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가 기지국 노른자를 확보하고 있었고, 국민의 전자파 공해 두려움 확산으로 인해 혐오시설화된 이미지 제고가 필요했다. 또한 막대한 투자비를 감내해야 했다.
이동전화의 경우 800MHz 주파수를 이용했으며, PCS는 1.8GHz 주파수로 보다 높은 대역폭을 활용했다. 주파수 특성상 느리지만 유연한 저주파 대비 고주파는 빠르지만 도달거리가 짧았다. 즉, PCS는 더 많은 기지국이 필요했다. 대략 2~3배 많은 기지국이 요구됐다. 또한 초기 이동통신 기지국의 경우 약 20~30평가량의 공간이 필요했다. 안테나와 송신기, 축전지와 무정전전원공급장치(UPS), 냉방장치 등 갖춰야 할 시설이 많았다.
주민들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실제 1996년 6월 충남 성거지역에 기지국을 설치하기 위해 나선 신세기통신이 주민 반대로 인해 무산된 사례가 있었다.3) 한국이동통신 역시도 서울 대치동과 일원동 아파트 밀집지역 기지국 설치 당시 주민 반대로 무산됐으며, 대구 근교에는 철탑까지 세웠음에도 이전 설치해야만 했다.
정보통신부 역시 이러한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전파감리과가 나서 전 세계적으로 기지국을 설치하고 있으며, 전자파가 인체 해를 끼친다는 정확한 근거는 없다고 해명했다. 다만, 주민 반발을 피해 이동전화 사업자가 가급적 공동기지국을 운영해 달라고 촉구했다.
PCS 사업자는 갈등을 해소하면서 커버리지까지 확보해야 했다. 상용 서비스를 위해 필요한 최소 기지국 수는 1천에서 1천500여 개. 상가나 빌딩이 밀접한 도로변 중앙이나 전원공급이 쉬운 곳, 고속통신선이 가까운 곳, 주변보다 더 높은 꼭대기층 등을 공략해야 했다. 물론 이미 유리한 고지는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 텃밭이라는 난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G텔레콤이 조기 상용화 카드를 꺼내자 한국통신프리텔도 3월 20일 사업설명회를 열고 연말 600여명의 직원을 확보하고 영업체계 구축과 전국망 구축에 약 1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9월까지 전국 주요 도시 통신망을 구축해 10월부터 수도권과 부산지역에 시범서비스를 시작, 연말까지 5대 광역시와 전국 73 개시를 커버하겠다고 선언했다.4)
한솔 PCS도 올해 내 1천100여 개 기지국을 구축하고 연말까지 700여 명의 직원을 모으겠다고 답했다.
정보통신부는 1997년 4월 2일 통신서비스 요금 자율화를 골자로 ‘이용약관인가대상 기간통신사업자 고시’를 발표했다. 인가대상 업무와 사업자를 명시적으로 규정해 자율화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 이를 통해 자발적인 요금인하를 유도했다.5) 이후 5월 인가제를 신고제로 전환시키는 내용의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을 마련해 국회 상정했다.6)
그에 앞서 한국이동통신은 3월 21일 주주총회에서 SK텔레콤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현재까지도 이동통신 1위 사업자로 군림한 SK텔레콤의 첫 출발점이다. 그룹 차원의 기업 이미지 통일작업에 발맞춘 조치였다. 이동통신에서 종합정보통신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PC통신과 무선케이블, 멀티미디어 사업을 추가했다. 고객만족 경영 10대 과제와 7개 비전 슬로건을 채택해 경쟁 역량을 끌어올렸다.7)
정부의 바람과는 달리 시장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기존 이동전화 사업자에게 새로운 경쟁요소가 발생한 것. 바로 시티폰이었다. 시티폰 사업자인 한국통신과 나래이동통신, 서울이동통신은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그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근거는 단말 가격. 당시 시티폰 단말가격은 10만 원대로 상당히 저렴했다. 가입자 확보에 따른 리베이트 제공으로 인해 마진을 포기한 결과였다.8)
그러다 보니 이동전화 휴대폰의 가격도 내려갔다. 대략 전년대비 20~30%가량 저렴했다.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이 가입건당 일정액의 리베이트를 주는 제도를 강화하면서 대리점들 역시 마진을 포기하고 판매 경쟁에 나섰다.
가령, 용산전자상가에서 판매하는 삼성 ‘애니콜 200F’의 경우 10만 원가량 적어진 93만 원에 판매됐다. 가입보증금 20만 원과 가입비 7만 원을 고려한다면 실제 휴대폰 가격은 66만 원대인 셈이다. ‘애니콜100’ 시리즈는 20만 원 이상 떨어져 43만 원 수준으로 판매됐다. LG정보통신의 프리웨이 LDP-880 역시 75만 원 수준으로 내려갔다.
게다가 SK텔레콤 대비 열세였던 신세기통신은 스폿성 이벤트 진행으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 4월 프로모션을 개최하고 삼성 애니콜 단말을 30~35만 원 선에 판매했다. 5월에도 50~60%가량 단말을 할인해 출고했다.9)
자연스럽게 가입자는 크게 증가했다. 부동의 1위인 SK텔레콤은 1997년 3월 가입자 100만 명을 돌파했다.10) 스폿성 프로모션 전략을 구사한 신세계통신은 4월에만 4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했으나 5월에는 무려 10만 명이 증가한 50만 명을 돌파했다. 3월 20일 서비스를 도입한 시티폰도 1개월도 채 안돼 10만 명을 확보했다. 한국통신 5만 6천 명, 나래이동통신 3만 4천 명, 서울이동통신 2만 명 수준이었다.
시장 과열로 초조해진 곳은 PCS사업자였다. 이동전화와 시티폰 가입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곧 초기 PCS 가입자를 뺏긴 것이나 진 배 없었다.
PCS 사업자는 대외적으로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공동으로 광고를 집행했다. 당시 PCS 3사의 광고문구가 이같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안타깝습니다. 몇 달만 참으면 차세대 이동통신 PCS를 쓸 수 있는데 그새를 못참으시다니…. 기다려 주십시오-PCS세상”11)
시간이 흐를수록 광고 수위는 점차 높아졌다. 나중에는 기술 품질 논란으로 번졌다. PCS 사업자들은 이동전화 서비스에 대해 폄하하면서 PCS가 더 높은 기술 우위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이동전화 사업자 역시 억측이라며 상대방을 비난했다. 이 같은 과열경쟁에 정보통신부가 나서 마케팅 담당자를 불러 세우기까지 했다.12)
PCS 진영은 대내적으로는 유통망 확보에 힘썼다. 초기 선점이 경쟁의 핵심이었기에 누가 고객 접점에서 가장 많은 가입자를 단숨에 끌어올리는가가 성패를 좌우했다.
LG텔레콤은 ‘오픈마케팅’ 전략을 채택했다. 전속 대리점 체제를 대신해 단말기 제조업체와 주유소, 편의점, 슈퍼마켓 등을 가입대행점으로 유치했다. LG그룹 내 2천700여 개 LG정유와 400여 개 LG유통 편의점, LG정보통신과 LG전자 유통망을 풀가동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통신프리텔은 대리점 망을 개설하는 한편, 주주사로 입성한 금호와 효성, 대우 등에 조력을 구했다. 1만 2천여 주주사의 다양한 유통망을 활용하는 한편, 260개 전화국과 200여 개 시티폰 대리점을 모두 총동원했다.
유통망에 다소 열악한 한솔PCS는 전속 대리점 중심의 단일 유통체제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전국 6곳의 지역본부를 중심으로 최신 영업관리 시스템을 도입해 전산망을 연결하겠다는 것. 전국 500여 개 대리점 개설을 목표로 우수대리점을 육성하겠다는 복안이다.
또한 가입자를 뺏기지 않을 심산으로 이동전화 대비 저렴한 요금제를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심하게는 2배가량 저렴하다는 문구까지 가져왔다.13)
이에 자극받은 SK텔레콤은 이동전화 보증금과 가입비 인하를 고민했다. 이 과정에서 2만원의 보증보험 의무가입 시 보증금을 면제하고 가입비를 낮추는 새로운 약정제도를 검토했다. 현재 약정할인제도의 초기 모델인 셈이다. 신세기통신 역시 보증보험제 시행을 고려했다.
초반 기세를 올린 시티폰은 이동전화의 공격적 마케팅과 PCS의 홍보전으로 인해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휴대폰과 PCS폰의 대결구도가 형성됐다. 하지만 7월부터 PCS 사업자들이 공동협력을 종료하면서 5개 사업자의 각자도생이 시작됐다. 14)
앞서 LG텔레콤은 기존 10월 상용화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8월 조기 시범서비스 도입을 발표했다. 초기 계획 대비 무려 5개월이나 앞당긴 결과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시범 서비스를 개시한 후 10월 광역시로 확대해 상용 서비스를 전개하고 1998년 상반기 전국망을 구축하겠다는 로드맵을 제시했다.15)
LG텔레콤의 초강수에 한국통신프리텔과 한솔PCS도 가만있지 않았다. 프리텔은 9월부터 수도권과 부산에서 시범서비스를 실시하고 10월 전국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확대한 뒤 11월 상용 서비스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우선적으로 시범 서비스를 8월로 앞당겼다. 전국망은 가장 빠른 12월을 예고했다.
한솔PCS는 9월 광역시 기반의 시범서비스 후 11월 전국 77 개시를 중심으로 상용서비스를 개시한다고 예고했다. 한솔 역시 12월 전국망을 목표로 했다.16)
발 빠른 시범 서비스를 나서긴 했으나 당초 계획했던 2배가량 저렴한 요금제는 실현되지 않았다. 막상 뚜껑을 열었을 때 저렴하기는 했으나 그 낙폭이 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후 요금담합 의혹이 발생하기도 했다.
1997년 8월 1일 한국통신프리텔과 LG텔레콤이 나란히 PCS 시범 서비스를 개시했다. 한국통신프리텔은 7월 21일부터 예약판매를 시작해 예약가입자 9만 명을 확보한 상태였다. LG텔레콤은 이날부터 예약가입 접수를 시작했다. 한솔PCS도 9월 시범 서비스를 앞두고 이날부터 예약판매에 돌입했다.
이상철 한국통신프리텔 사장은 “핀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려야 한다”라며 서비스 안정성이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 강조했다. 고객 부담이었던 보증금을 과감히 폐지했다.
정용문 한솔PCS 사장은 원샷018을 통해 이동전화 점유율 1위를 이루겠다고 선언했다. 최고 통화품질과 최상의 서비스로 어떤 악조건에도 당당히 맞서겠다고 다짐했다. 정장호 LG텔레콤 사장은 고객접점을 중요시했다. 이미 통화품질에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오픈마케팅 전략을 통해서 누구나 쉽게 휴대폰을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장담했다.17)
PCS 초기 기세는 대단했다. 그만큼 가입자 확보에도 열을 올렸다. 예를 들면 내부적으로 추석 보너스를 PCS폰으로 확정하는가 하면,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 대리점까지 열렸다. 기존 이동전화 법인고객을 뺏기 위해서도 높은 조건을 내걸었다. 신용카드 제휴를 통해서 더 많은 혜택을 뽐냈다. 잡지만 구독하더라도 PCS폰이 떨어지는 세상이었다. PCS 사업자들이 부족한 단말 확보를 위해 제조업체를 압박하다 보니 양측의 갈등까지 발생했다.
시범서비스임에도 1개월 만에 PCS 예약가입자는 70만 명을 돌파했다. 기세를 몰아 PCS 3사는 자정과 공휴일 요금, 심야요금 할인제도를 도입했다. 가령 공휴일과 오전새벽 시간, 늦은 밤에 10초당 15원을 책정했다. 심야 요금은 10~13원으로 낮췄다.
요금체계는 시간이 갈수록 더 복잡해졌다. 가입비와 보증금, 기본료, 통화료, 심야할인, 자정 공휴일 할인 등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운 선택형 요금제가 채택됐다. 10종에 이르는 이 요금제는 기본료를 낮추는 대신 통화료를 높이거나, 기본료가 높으면 통화료가 저렴해지는 형태였다. 통화량이 많으면 프리미엄으로 적으면 라이트 요금을 선택하는 식으로 고객 편의를 제공하는 차원이었으나 워낙 복잡해 혼란만 가중시킨다는 지적도 따랐다.
가령, 한국통신프리텔의 표준 요금은 기본료 1만 6천500원에 표준 통화료 19원이나 라이트 요금제는 기본료가 1만 원이고 통화료는 35원에 책정됐다. 한솔PCS도 라이트 요금제는 동일하나 표준 요금제는 1만 7천 원의 기본료에 통화료는 18원이었다. LG텔레콤은 표준 1만 5천 원에 통화료 21원 수준이다. 기본료는 1~5만 원대로 통화료는 10초당 10~35원을 형성했다.18)
1997년 10월 1일 마침내 PCS 3사 모두 상용 서비스에 돌입했다. 3사는 PCS 세상이 열렸다며 7조 원 시장에서 자웅을 겨루겠다고 호언장담했다.19)
한솔PCS는 9월 22일 하얏트호텔에서 018 PCS 개통식을 앞서 개최했다. 강봉균 정보통신부 장관과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등이 참석했다. LG텔레콤은 하루 앞선 9월 30일 서울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019 PCS 상용서비스 개시 축하연을 열고 구본무 LG그룹회장과 함께 축하공연을 관람했다. 한국통신프리텔은 10월 1일 오후 6시 하얏트호텔에서 각계 인사 9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016 PCS 개통식을 열었다. 이 자리는 강봉균 정보통신부 장관과 이계철 한국통신 사장, 오명 동아일보 사장까지 자리했다.
이동통신 5개 사업자의 치열한 경합을 통해 고객에게 보다 질 좋은 서비스가 전달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에 따른 부작용 역시 상당했다.
우선 무분별한 가입자 유치전으로 인해 단말 부족 현상을 겪었다. PCS 사업자가 준비한 초도 단말 수량이 이동통신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유통망을 대대적으로 확보했으나 팔 물건이 없는 셈이다. 고객 역시 하릴없이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불만도 상당했다.
그러다 보니 PCS 3사가 고객 달리기에 나섰다. 한국통신프리텔은 단말 지연 보상책으로 기본료와 가입비를 면제하고 300분의 무료통화 정책을 내놨다. LG텔레콤은 순차 공급과 함께 예약가입일자를 12월까지 늘렸다. 한솔PCS는 300분 무료통화와 기본료 1개월 면제 등의 혜택을 마련했다.
PCS 3사가 모집한 예약가입자는 약 200만 명 수준. 하지만 상용화 1개월께 실제 개통이 실현된 고객은 15만 명에 불과했다.20)
단말 부족 현상은 PCS 상용화 1개월 후 제조업체들이 본격적인 양산체제에 돌입하면서 점차 해소됐다. 이 과정에서 국내 휴대폰 브랜드가 재정립됐다. 삼성의 ‘애니콜’, LG정보통신의 ‘싸이언’, 현대전자 ‘걸리버’가 자웅을 겨뤘다.21)
예약가입자가 몰리면서 고객정보시스템 입력 지연 문제도 발생했다. 제 때 예약가입을 했음에도 전산화가 느려 밀리는 상황이 발생한 것. 고객입장에서는 우선순위가 밀리기 때문에 예민한 사고였다.
초기 통화품질이 성패를 좌우할 수 있어 기지국 불법 운용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기지국은 정보통신부의 무선국 검사와 허가를 통해 운영해야 하는데, 이 과정을 생략한 채 우선적으로 운영하게 된 것. 이 같은 무분별한 불법 운용 경쟁은 서로 간의 간섭을 일으킬 수 있어 오히려 고객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22)
무엇보다 과열된 마케팅 경쟁은 곧 설비투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전국망 구축에 1조 원가량을 투입한 PCS 3사의 중복투자도 문제겠지만 그만큼 투자비 회수 기간도 길어지기 때문에 지속가능경영이 어려웠다.
또한 약속한 통화품질 역시 좋지 못했다. 터널을 통과하거나 지하로 내려갈 때 한강대교 등을 지날 때 PCS 통화가 끊기거나 버벅거렸다. 꿈의 통신 대신 악몽 통신이라는 지적까지 일었다. PCS 3사는 통화 품질을 강화하면서 지하에서도 터진다는 문구의 대대적인 광고를 내기도 했다.
정보통신부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다. 10월 말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 실시하는 '정보통신 서비스 품질평가’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학계 연구기관, 이용자단체 전문가들로 품질평가제 수립 전담반을 구성하고 내년 상반기 공청회를 거쳐 이동전화 위주 품질 평가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소통률과 통화완료율, 통화음질, 고객지원 만족도, 시스템장비, 전화기, PCS와 휴대전화, 무선호출 등에 주요 항목으로 제시됐다.23)
또한 12월 4일에는 한국통신프리텔과 한솔PCS가 전국망 로밍에 합의하기도 했다. 별도 독자망을 구성하지 않고 공동망을 운영하면서 약 1조 원가량을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를 위해 이상철 한국통신프리텔 사장과 정용문 한솔PCS 사장은 이날 조선호텔에서 만나 'PCS 전국통합망 구축 및 운용에 관한 협정조인식'을 열었다. LG텔레콤도 언제든지 망 공동운영이 가능하다는 열린 자세를 보였다.24)
PCS 3사는 안정적 사업 운영을 위한 특단의 조치까지 내리면서 연말까지 100만 명의 가입자를 유치하기는 했으나 대외정세가 좋지 않았다. 우선적으로 국제통화기금(IMF) 여파와 단말기 가격 인상, 소비심리 위축 등 경제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아울러 PCS 3사가 초기 겪었던 여러 부작용은 해소되지 않은 채 끝까지 회사 존립을 위협했다.
1) 김승환 기자, <한솔PCS 정용문 사장 최고령 번지점프 성공>, 동아일보, 1997. 7.13.
2) 김동섭 기자, <PCS 서비스 이르면 11월 개시>, 경향신문, 1997. 2.22.
3) 황순현 기자, <통신업체 기지국 설치 주민반발>, 조선일보, 1996. 6.28.
4) 최용성 기자, <PCS 10월 시범서비스 <개인휴대통신>>, 매일경제, 1997. 3.21.
5) <통신서비스 요금 자율화>, 매일경제, 1997. 4. 3.
6) 김승환 기자, <통신요금 10월 완전자율화>, 동아일보, 1997. 5. 9.
7) <정보통신의 새이름 [SK텔레콤]>,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202-205
8) 황순현 기자, <10만원대 시티폰 등장 여파 휴대폰 '마진포기' 할인경쟁>, 조선일보, 1997. 4. 7.
9) 석종훈 기자, <불황현장 가격전쟁 <2> 휴대전화 자고나면 인하...또 인하>, 조선일보, 1997. 4.13.
10) <디지털 011 이동전화 가입 100만명 돌파>, 동아일보, 1997. 4. 2.
11) 함석진 기자, <'지금사라' '기다리라' 공세 휴대폰 시장 셀룰러폰-PCS 고객선점 각축전>, 한겨레, 1997. 5.21.
12) 김승환 기자, <휴대전화 PCS과열경쟁 감정싸움>, 동아일보, 1997. 7.24.
13) 최득룡 기자, <'유통 가격 파괴'로 시장쟁탈전 PCS 각개약진 3사 '기선싸움' 가열>, 1997. 7. 8.
14) 조찬제 기자, <'제휴는 끝났다' PCS 광고 전쟁 한솔 한통 LG 개별홍보 돌입>, 경향신문, 1997. 7. 3.
15) 유진평 기자, <인터뷰 정장호 LG텔레콤 사장 올해 35만명 고객확보 목표>, 매일경제, 1997. 7.11.
16) 김학진 기자, <한국통신프리텔-한솔 내달 PCS 시험서비스 요금 10초당 19~21원>, 동아일보, 1997. 7.16.
17) 최득룡 기자, <이동전화시장 지각변동예고 포성없는 '무한 공중전' PCS 시범서비스 돌입...'전파전쟁'가열>, 경향신문, 1997. 8. 4.
18) 김승환 기자, <헷갈리는 PCS 요금>, 동아일보, 1997. 9.20.
19) <이동전화 대중화 시대>, 매일경제, 1997.10. 1.
20) 박문규 기자, <PCS단말기 계속 품귀>, 경향신문, 1997.11. 1.
21) 김학진, <PCS단말기 공급부족 이제 풀린다>, 동아일보, 1997.11. 6.
22) 김재섭 기자, <PCS 기지국 36% 불법운용 드러나>, 한겨레, 1997.10. 2.
23) 김학진 기자, <정보통신분야도 품질평가 나선다>, 동아일보, 1997.11. 1.
24) 최득룡 기자, <한통 한솔 PCS 기지국 공동구축 투자비 1조 감축>, 경향신문, 1997.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