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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날다 Jul 15. 2019

"삶도, 워크아웃이 필요하다"

18년 5개월 만에 퇴사당하고 76일 만에 쓰러진 노동자의 긍정 일기

# 76일 만이다.

18년 5개월 간 다니던 조직에서  "그만 다녀도 좋다"는 통보를 받은 후, 쓰러졌다. 퇴사 때문에 쓰러진 것은 아니다. 강제 퇴사가 아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든 내겐 계기가 필요했고 시의적절하게 지금이 그 계기라는 것에 동의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로 나를 맞아준 곳은 18년 전 일했던 방송국이었다.

퇴사당하기 전부터 시사프로그램 작가가 필요하니 어디 좋은 사람 없냐며 거간꾼 역할을 해달라는 전화를 받은 터였다. 내심 그때, '그 자리 내가 가면 안 될까요?'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으니... 퇴사를 당했건, 어쨌건 나쁘지 않은 도피처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적당히 몸에 밴 직장인 습관만 조금 교정하면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그런데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물리적 원인은 대략 알만한 것들이다.  

감당하기 힘든 많은 업무량, 과도한 의욕으로 인한 수면부족, 영양 부족, 면역력 저하, 스트레스성 두통, 탈수...... 하지만 이런 물리적 힘듦은 지난 18년 5개월 동안에도 늘 나를 따라다녔다. 특별할 게 없던, 말 그대로 누구나 조금씩은 한다는 '스. 트. 레. 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삶에도 워크아웃이 필요하다" 남편은 말했다.

살면서 지켜본 내 모습은 일 외 다른 것, 취미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더 건강하게 살기 위해  이제는 워크아웃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진심으로 충고했다. 아! 그렇구나. 그런 방법이라도 있다니,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까, 까, 까, 까마득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세세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말이다. 그렇게 오래전인데 매 순간의 느낌이 새록 새록 생경한 시절이 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좌충우돌했던 그 날들이다. 어찌어찌 적응하고 성취하고 자리 잡고 버텨 여기까지 왔지만  '처음의 나'는 비극적으로 절망했었다. 분명 그랬었다.


#매일 아침 일하러 나가기 위해 머리를 감는 일이 마치 목을 내어 놓는 것과 같다고 느꼈다.

그때 알았다. 돈을 번다는 것은 목을 내어놓고 모든 것을 처분에 맡기는 것이며 더욱 못 견디게 힘든 것은 처분을 하는 자들조차 목보다 더 한 것을 내어놓고 살기에 그 아래 사는 나는 서 푼어치 자존조차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근데 진짜 비극은 남들이 보기에 서 푼어치 자존이지만 그게 바로 내가 가진 전부였다는 것.


#꿈을 위해, 가치를 위해..

따위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말인지 그때 이미 온몸으로 알았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실은 돈이 필요해 일하지만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온갖 모욕을 참고 견디게 해 줄 이유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이 글을 마음에 담고 살겠다 다짐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고 이러한 노동을 통해서 생산된 대상 속에서 자기를 의식하고 확인한다. 따라서 노동은 단지 생계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유적 본질을 실현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장인 것이다."  

                    - 마르크스「독일 이데올로기」 해제, 손철성•서울대학교철학사상연구소


#나에게 고백한다.

깨어있겠노라, 자각하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늘 그러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난 18년 5개월, 잊고 살았다. 노동자로서 노동시장에 나섰을 때의 첫 다짐을...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로서 보호받지 못하는 '프리랜서' 시장에 또다시 나서게 되니 푸르게 아팠던 첫 다짐이 다시금 나를 흔들어 일으켜 세운다.  


# 이제는 치유의 처방전이 필요하다.  

부족했지만 열심히 달려왔다. 육체적 정신적 체력은 방전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러나 염세주의와 낭만주의 그 어딘가에서 방황했던 내 노동의 시간은 아직도 달리고 있다. 제법 긴 휴식, 약물 치료...... 다행히 워크아웃 정도는 감당할 힘이 아직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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