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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날다 Mar 18. 2020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놓아줌으로써 영원히 간직할 수 있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누구나 한 마디쯤은 거들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때문에 사랑은 종종 통속과 같은 말이 되곤 한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랑학 개론을 펼치지만 또 사랑만큼 난해한 것도 없지 싶다. 어떻게 사랑을 완성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사랑하면서도 괴로운 걸까? 사랑, 참 어렵다.      

여기, 그 어려운 사랑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영화가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퀴어영화다. 보편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선입견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는 사랑이라는 고차원 방정식을 생각지 못한 창의성과 담백한 아름다움으로 쉽게 풀이해 주고 있다. 덕분에 많은 관객들은 어설펐던 자신의 지난 사랑이 왜 실패했는지, 그 시절 왜 그토록 슬프게 울고 아파했는지,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과 예민했던 감각을 다시금 깨울 수 있다.     

 

엘로이즈(아델 하에넬) - 마리안느(노에미 멜랑)


때는 18세기 유럽.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엘로이즈(아델 하에넬)의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과업을 부여받는다. 얼굴도 모르는 미래의 남편에게 보내질 초상화. 결혼을 원치 않는 엘로이즈는 초상화 그리기에 협조하지 않는다. 마리안느는 단지 산책 친구일 뿐이라며 정체를 속이고 엘로이즈를 캔버스에 담는다. 몰래 훔쳐보고 커튼 뒤에 숨어 완성한 초상화.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초상화도 보여준다. 그러나 엘로이즈의 반응은 차갑고 냉정하다.       


“이 그림은 나를 닮지 않았어요.”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그린 초상화 속 여인이 자신과 닮지 않았다고 말한다. “내 남편의 시선으로 그린, 생명력도 존재감도 없는 그림”이라며 아픈 평가를 더한다. 참혹해진 마리안느는 캔버스 속 엘로이즈의 얼굴을 뭉개버린다. 그런데 놀랍게도, 엘로이즈가 초상화를 그리겠다며 마리안느 앞에 앉는다. 두 사람의 사랑이 발화하는 순간이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시선으로 그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시선(gaze)’은 권력이다. 18세기 유럽 귀족사회, 여성의 초상화가 바로 그 상징이다. 보고, 평가하고, 선택하고……오로지 남성의 시선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의 시선을 통해 보여지고, 평가받고, 선택당하는 위치에 머물고 만다. 그래서 초상화를 거부하는 엘로이즈의 행동은 의미심장하다. 단지 사랑하지 않는(모르는) 사람과의 결혼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 시대 여성의 삶, 전체를 거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시선으로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지기를 바라고 엘로이즈 또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마리안느를 자신의 시선 속에 담는다. 영화는 어렵사리 시작된 연인들의 사랑을 그 흔한 배경음악 한 소절 없이 묵묵히 영상으로만 전달한다. 여백을 채우는 것은 오로지 배우들의 몸짓과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뿐.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일방적인 시선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마주 보기를 통해 그들만의 초상화를 완성한다. 그렇게 탄생한 그림은, “생명력도 존재감도 없던” 이전 작품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실제 엘로이즈도 달라졌다. 결혼을 거부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언니, 그런 언니를 대신해 결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 침묵으로 분노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마리안느와 함께 웃기 시작한다.      

변한 것은 엘로이즈 만이 아니다.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집을 비운 닷새 동안,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그리고 하녀 소피는 신분과 금기를 초월한 연대와 공감을 보여주며 18세기 유럽에서는 불가능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실현한다. 다 같이 식사를 준비하고 낙태를 선택한 소피와 함께 아파한다.      


“우린 똑같은 위치에 있어요. 아주 동등한 위치죠.”     


엘로이즈의 말처럼 여성들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다. 특히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소피의 도움을 받아 낙태 장면을 그리게 되는데 “모든 중요한 주제들은 여성 화가를 비켜간다”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좌절이 여성들의 사랑과 연대로 극복되는 순간이다.      

이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그들의 사랑을 어떻게 키워 갈까? 18세기 유럽이라는 현실, 두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신화에서 그녀들의 미래를 창조한다. 저승세계에서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지 못한 오르페우스의 이야기가 실은 의도된 헤어짐일 수 있다는 상상을 펼친다. 시인이고 싶었던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 대신 그녀와의 추억을 선택한 것이며 에우리디케도 그 선택을 원했다는 것.      

 

“뒤를 돌아봐!”       


엘로이즈도 신화 속 에우리디케처럼 자신을 떠나는 마리안느에게 뒤돌아보라고 말한다. 마리안느도 오르페우스처럼 뒤돌아 엘로이즈를 쳐다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놓아줌으로써 영원히 간직할 추억을 선택한 것이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은 전형적인 초상화에 생기를 불어넣고 죽어있던 신화를 살아 꿈틀 되게 했다. 그리고 그녀들의 삶조차 송두리째 바꿔 주체적인 여성의 이야기가 역사의 물줄기로 흐를 수 있도록 했다. 자칫 통속이 될 뻔한 사랑이 예술이 되고 삶이 되고 역사가 된 것이다. 이처럼 멋진 사랑이 또 있을까? 진정,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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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문득 그 선배가 생각났다. 스물세 살 봄, 내게 건넨 편지 속에서 그는 “사랑하면서도 현명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고백 같기도 하고 이별 통보 같기도 한……어쨌든 어려운 글이었다. 철학적 의미가 있었을 터이지만 나는 그저 내 수준에 맞게 “사랑하고 싶지만 두렵다”는 뜻으로 읽었던 것 같다. 만약 그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았다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에 대해 어떤 말을 할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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